홍콩 필름 마트가 열리기 하루 전날 밤, 홍콩고금박물관에서 제16회 아시안 필름 어워즈가 열렸다. 한국영화 <헤어질 결심>은 작품상, 각본상, 미술상, 남녀주연상 등 10개 부문에서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 중에서 각본상(정서경·박찬욱)과 여우주연상(탕웨이) 그리고 미술상(류성희)을 받으며 3관왕에 올랐다. 시상식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박해일 배우에게 짧은 만남을 청했다. 이번 시상식 풍경과 <헤어질 결심>의 여정에서 그가 보고 느낀 것에 대해 물었다.
탕웨이 배우가 만약 상을 받게 된다면 트로피를 대신 받기로 미리 약속을 했나?
'헤결팀'이 10개 부문 후보에 올랐는데 변수를 생각해 봐야 않겠냐는 이야기가 시상식으로 가기 직전 즉석에서 나왔다. 박찬욱 감독님도 안 계시고 탕웨이씨도 몸이 안 좋아 없으니 백지선 모호필름 대표만 계속 시상대에 오르는 게 모양새가 이상해 참석자들이 분야별로 나눠서 시상대에 오르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조영욱 음악감독님은 박찬욱 감독님과 친분이 오랫동안 있으셨으니 감독상과 편집상 수상자로 무대에 올라가고, 류성희 미술감독님은 촬영상을 비롯해 비주얼쪽을 담당하기로 했다. 나는 배우 담당을 하겠다고 했다.
탕웨이 배우가 만약을 대비해 따로 소감을 전하지는 않았나.
몸이 안 좋아서 참석을 못해 아쉽다는 정도의 이야기만 백 대표를 통해 전달 받았다.
"만약에 탕웨이씨였다면 수상소감을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배우 인생을 완성시켜준 박찬욱 감독한테 감사드린다"라고 수상 소감을 대신 밝혔다. 어떤 면에서 이 작품이 그의 연기 인생을 완성시켰다고 생각했나.
무대에 올라 "잘 전해주겠습니다" 하고 빠지려고 했는데 '가만히 있어보자…. 너무 짧은가?'하는 생각이 스쳤다. 탕웨이씨가 수상소감으로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해봤더니, 예전에 칸국제영화제에서 탕웨이 씨가 감독님이 자신을 완성시켜줬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걸 인용하면 되겠다, 감사할 사람들에 대해 짧게 말하면 되겠다 싶었다.
이어서 탕웨이 배우라면 ‘예술가 스태프들과 함께해서 너무 좋았다’고 말했을 것이라고도 전했다. 이 영화를 예술적인 영감이 많았던 현장으로 기억하나.
그들 자체가 예술가고 예술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술로 우리한테 영향을 준 것이고. 그들은 어딜 가더라도 예술가이지만 <헤어질 결심>이란 하나의 콘셉트로 모였던 것이다.
탕웨이 배우의 트로피를 받고 돌아가는 동안 또 바로 남우주연상 시상자가 나왔다.
다음 건 신경 안 쓰고 트로피를 들고 내려가니까 스태프들이 수상자는 사진을 찍어야 한다면서 막 끌고 갔다. "대리 수상했는데 오해가 생기지 않을까, 탕웨이씨한테도 예의가 좀 아닌 것 같다"라고 말하다가 1분이 흘렀다.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묻다가 또 2분이 흘렀고. (웃음) 영화제 측에서 트로피를 보관했다가 탕웨이씨한테 보내줬으면 좋겠다고 차분하게 얘기하고 들어오니까 이미 남우주연상 다음 부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남우주연상 수상은 끝났겠다.
흥미로운 상황이었다. (웃음) 돌아와서 백지선 대표님한테 물었더니 양조위 배우가 받았다고 했다. 사실 개막식 애프터 파티 때 양조위 선배님한테 '헤결팀' 전체가 인사를 드렸다. 양조위 선배님이 파티에 제일 먼저 가서 가장 잘 보이는 공간에서 와인 한 잔 하고 계시더라. 한 분 한 분 손님들을 반갑게 맞아주시기에 줄을 서서 인사를 하자 너무나 반가워하셨다. 작년 부산영화제 때 공로상 받을 때 호명되는 순간 (송)강호 선배랑 내가 제일 먼저 일어나서 박수쳤었다. 나를 기억하시고 <헤어질 결심>도 너무 잘 봤다고 하셔서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가까이에서 서로 안부를 묻는 자리는 처음이라 떨리고 좋았다.
<질투는 나의 힘>으로 많은 트로피를 받고 20년 만에 그때에 버금갈 만큼 많은 상을 받고 있다. 계속해서 시상식에 참여하고 트로피를 받는 과정을 겪고 있는데 어떤 감정인가.
수상자 후보에 오른 영화가 정말 오랜만이다. <제보자>때 후보에 오른 게 마지막일 거다. <헤어질 결심>과 관련된 부름에 최대한 응했고 너무 좋은 성과들이 있었다. 따져보면 작년 4월 칸에서부터 시작해서 거의 1년 가까이 이 작품의 여운을 느끼면서 영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 기점이 될 수 있는 홍콩은 편안한 마음으로 왔다.
여러 시상식에 참여했지만 가장 화제가 됐던 건 청룡영화상이 아닐까. 정훈희 선생이 <안개>를 부를 때 탕웨이 배우가 눈물짓자 옆에 있던 박해일 배우가 보여준 눈빛을 보고 '여기까지가 영화다'라고 말한 이들도 있었다. 그때 상황을 설명해달라.
모두 정훈희 선생님이 초대가수로 나오는 걸 전혀 정보를 모르고 있었다. 객석에 있던 분들이 다들 놀랐다. 옆을 슥 봤더니 탕웨이 씨도 처음에는 반가워하더라. 그러다 자기가 한없이 깊게 들어갔다 나온 캐릭터를 떠올린 것 같다. 왜냐하면 탕웨이씨가 현장에서 그 음악을 무수히 많이 들으면서 캐릭터를 대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탕웨이씨가 영화와 음악에 젖어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이제 진짜 '우는 구나, 마침내'라고 생각했다.
탕웨이 배우의 인생을 완성시켜준 작품이라고 언급했는데, 박해일 배우에게 <헤어질 결심>은 어떤 작품인가.
데뷔해서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을 박찬욱 감독님이 잘 정제시켜서 하나로 응축시킨 작품이지 않을까. 배우 인생에서 쉼표를 찍고 하나의 챕터를 정리한 것이라 생각한다. 한번은 이 영화가 나에게 주는 영향이 어디까지일까 생각했다. 칸에서부터 시작해서 국내 개봉, 해외에서 만난 관객들이 전하는 감상을 듣는 과정, 여러 시상식 참석 등 긴 시간을 두고 한편의 영화를 느꼈던 경험이 앞으로의 나에게 큰 자산처럼 느껴진다.
팬들의 입장에서도 <헤어질 결심> 만큼 오랫동안 이야기하는 작품이 흔치 않았다.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 때,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나 이창동 감독의 작가주의 영화 등이 지금의 <헤어질 결심>을 향한 애정만큼 길게 관객의 사랑을 받긴 했다. 한 작품을 오랫동안 좋아해주고 여러 번 관람하는 현상 자체는 그때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 재상영운동이 관객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맞다. 돈을 모아 관객들이 영화를 지키려고 했던 운동이 있었다. 작품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작품이 이렇게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까 아닐까가 중요하다. 어쩌면 애정이 이어지는 작품은 클래식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참여한 사람으로서, 작품이 계속해서 회자되고 시간을 견뎌낸다면 행복한 일이다. <헤어질 결심>도 그랬으면 좋겠다.
<헤어질 결심> 현상과 언급한 표현이 딱 맞는 것 같다. 클래식으로 가는 영화.
정말 무한한 작품들이 여러 플랫폼을 통해서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도 남는 작품을 만든다는 걸 생각하게 된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끼리는 어마어마한 숙제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홍콩에 와보니 어떤가.
빨간 택시를 보고 청소년기에 본 홍콩영화들이 떠올랐다. 총 싸움이 나고 유덕화 배우가 선글라쓰 쓰고 나오는 장면 같은 것들. 바닷가를 보면서 액션영화의 와이드숏이 저 해변가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홍콩에 처음 왔는데 정말 영화 도시 같다. 그리고 과거에 본 영화들이 스치듯 떠오른다. 이곳은 정말 아시아 영화의 역사를 보여주는 곳이다 싶다. 국적을 떠나서 아시아 영화만의 느낌이 여기에 있다고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