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야 할 영화들에 트로피가 돌아갔다. 제76회 칸영화제 수상 결과에 언론은 대체로 만족스런 반응을 보냈다. “올해 심사위원단의 선택은 공동 수상을 남발했던 지난해와 비교했을 때 훌륭한 결속력을 보여주었다”(프랑스 언론 <레제코>)는 평처럼 심사위원들은 전반적으로 <스크린 데일리>를 비롯한 매체들의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은 판단을 내렸다. 얼핏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그동안 매체 평가와 심사위원단의 관행과도 같았던 불일치를 떠올려보면 오히려 올해의 결정은 이례적이라 할 만하다. 루벤 외스틀룬드 심사위원장은 기자회견 때 밝혔듯 “대담함을 기준에 두고 각자의 본능에 따라 적당한 타협을 하지 않을 것”이란 심사 기준을 끝까지 관철했다.
올드 보이들의 귀환은 무엇을 남겼나.
올해 경쟁작들의 두드러지는 경향은 올드 보이들의 귀환이었지만 감독상을 수상한 <포토푀>의 트란 안 홍을 제외하곤 수상으로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21편의 경쟁작 중 신예는 <바넬과 아다마>의 라마타 툴라예 사이뿐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칸의 단골 손님이거나 기성감독 중심이었다. 물론 왕빙처럼 칸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신선한 이름도 있었지만 켄 로치와 마르코 벨로치오, 빔 벤더스와 카트린 브레야의 이름 앞에서 웬만한 이들은 명함을 내밀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경쟁부문 바깥으로 영역을 넓혀보면 반가운 이름이 더 자주 눈에 띈다. 예컨대 <쿠비>의 기타노 다케시나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빅토르 에리세 감독처럼 오랜만에 영화를 만든 이들의 귀환은 반가움 이상의 상징적인 지점이 있다. 모든 영화제가 그런 것처럼 칸 역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것과 옛것, 20세기적인 것과 21세기의 조화를 꿈꾼다. 그런 의미에서 우연의 결과이든 의도된 선정이든 관계없이 올해 칸은 자신들이 존경하고 쌓아왔던 업적들에 대한 최대한의 예우를 (경쟁부문에 오르지 못한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항의가 있긴 했지만) 보여주었다.
올드 보이들의 귀환은 단지 신작을 만들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굳이 경쟁부문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올해 칸으로 돌아온 이들의 신작은 새롭지 않은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 어느 때보다 젊고 생생하며 날카롭다. 정확히는 스타일적으로 새롭지 않기에 여전히 시대의 제일 앞자리에서 세상을 근심하는 날카로운 시선이 돋보인다. 대표적으로, 켄 로치의 <올드 오크>를 그의 필로그래피 중 상단에 놓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미학적인 도전을 하거나 새로운 영화언어를 논하는 데 관심이 없다. 오직 지금 현재의 자리에서 말할 수 있고, 응당 말해야 하는 비판 정신을 한층 날카롭게 가다듬을 뿐이다. 시골의 오래된 펍을 배경으로 이민자들과 하층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을 그린 이 작품은 마지막 작품이 탐낼 법한 거대한 야심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늘 해왔던(하지만 좀더 감정적이고 따뜻한) 사회적 빈곤 문제를 다시금 환기한다. 칸의 식구들, 오랜 단골들, 귀환자들은 억지로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 다. 미학적인 확장이나 실험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오랫동안 추구해왔던 길에서 다시 한 걸음을 더 내디뎠을 뿐이다. 바로 그 한 걸음이 거장을 만든 비결이다. 그저 한 걸음씩 보태온 작업들이 꾸준함과 세월을 만나 무르익었을 때 마침내 깊이와 진정성에 도달하는 것이라 해도 좋겠다. 누리 빌게 제일란, 토드 헤인스, 난니 모레티, 카트린 브레야, 빔 벤더스 그 밖에도 많은 기성감독들은 나이가 무색하게 세상과 영화를 근심한다. 이들의 시선은 여전히 뜨겁고 태도는 결연하여, 언제나 영화의 최전선에 서 있어왔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뚝심이 돋보이는 균형 잡힌 수상 결과
한편 심사위원들의 선택은 그래서 더욱 빛이 난다. 예우 차원에서 섣불리 상을 나눠주었다면 오히려 모욕적으로 느껴졌을지 모른다. 올해 경쟁부문의 선명한 기준은 미학적인 도전과 과감한 목소리, 그리고 균형이었다. <어바웃 드라이 그래시스>나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같이 작가성이 뚜렷한 작품부터 <아나토미 오브 어 폴>이나 <포토푀>처럼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작품,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아키 카우리스마키 같은 단골손님과 조너선 글레이저처럼 처음 칸을 찾는 감독까지 골고루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조너선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홀로코스트라는 어둡고 무거운 소재롤 지적이고 절제된 영화언어로 표현한 영화로 영화제 기간 내내 주목받았다. 황금종려상을 받은 쥐스틴 트리에의 <아나토미 오브 어 폴> 역시 내내 높은 평가를 받으며 팽팽한 경쟁을 벌였는데 두편 모두 잔드라 휠러가 주연을 맡았다는 점이 재미있다(이어지는 글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아나토미 오브 어 폴>에 황금종려상이 돌아가 쥐스틴 트리에는 제인 캠피언 감독의 <피아노>(1993),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티탄>(2021)에 이어 역대 세 번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여성감독으로 기록됐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단지 감사와 영광을 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프랑스 연금개혁 문제를 언급하며 정부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을 이어갔다.
전반을 살펴보면 이탈리아영화(난니 모레티, 마르코 벨로치오, 알리체 로르와커)는 외면받았고 일본영화(각본상의 사카모토 유지, 남우주연상의 야쿠쇼 고지)는 의외의 성과를 거두었으며 프랑스영화는 선전했다. 한편 역대 황금종려상을 가장 많이 가져간 미국영화는 2011년 이후로 한번도 수상하지 못했는데 이는 몇년간 칸이 보여주는 행보와는 대조적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티에리 프레모를 비롯한 집행부가 레드 카펫 행사에 할리우드 스타를 모셔 오는 데 그 어느 때보다 공을 들이고 있는 가운데 경쟁부문에서는 관심이 옅어져간다. 올해 가장 높은 평가를 받으며 화제를 독차지한 Apple TV+의 <킬러스 오브 플라워 문>(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비경쟁부문을 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023년 칸이 남긴 흔적들을 되짚으며
수상이 작품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 마당에 굳이 줄 세우기를 할 것 없이 올해 칸영화제는 고른 완성도와 다양한 면면을 선보였다. 덕분에 종횡으로 흥미로운 선 긋기를 하며 영화의 지도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올해는 유독 귀를 기울여야 하는 영화제였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형이상학적인 사운드부터 <아나토미 오브 어 폴>의 불안과 분노, <메이 디셈버>와 <클럽 제로>의 반복되는 중독성까지 그 어느 때보다 사운드의 힘을 실감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주제적으로는 황금종려상 수상작부터 신예감독의 첫 장편인 <바넬과 아마다>까지 다양한 장소에서 싸우고 저항하는 여성들의 초상을 복잡 다양하게 그렸다. <아나토미 오브 어 폴>(151분), <어바웃 드라이 그래시스>(197분), <청춘>(210분), <킬러스 오브 플라워 문>(206분) 등 유독 긴 상영시간을 자랑하는 영화도 많았는데, 단지 물리적으로 긴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미학적, 필연적 선택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물론 정반대의 자리에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 <폴른 리브스>처럼 짧고 간결한 영화들도 각자 다른 아름다움을 뽐냈다.
그 밖에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경쟁부문의 <청춘>, <포 도터스>나 그외 <리틀 걸 블루> <마더 오브 올 라이즈> 등 다양한 부문에서 변화무쌍하고 창의적인 다큐멘터리가 다수 포진했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우크라이나 여류 시인 레시아의 시를 카트린 드뇌브가 낭송하며 시작된 영화제 곳곳에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폴른 리브스> 속 라디오처럼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재미있다. 영화와 정치적 메시지는 언제나 불가분의 관계다. 올해 칸은 풍성하고 다채로운 상영작만큼 많은 후일담이 이어질 것이다. 축제는 끝났다. 하지만 영화의 바다 속으로 숨을 참고 자맥질하여 각자의 보물을 발견해나가는 건 스크린에 불이 꺼진 지금부터 시작이다. 알리체 로르와커의 <라 키메라>에 나오듯 영화는 어쩌면 현대의 신화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두고 차례로 국내 개봉할 영화들을 기다리며 트레저 헌터의 마음으로 올해의 흐름을 정리한 짧은 기록을 갈무리한다. 이후 페이지는 당신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