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올드 오크’ 켄 로치 감독, 떡갈나무의 마지막 잎새
2023-06-09
글 : 김혜리

창문만큼 큼직하고 도수 높은 안경 뒤에서 87살 감독의 눈이 반짝였다. 1967년 이후 지금까지 수고한 만큼 짐을 벗지 못하는 노동자들로부터 뗀 적 없는 그의 눈은 날카롭기는커녕 지극히 상냥했다. 경쟁부문에서 마지막으로 상영된 <올드 오크>는 단기기억과 시력이 쇠약해져 다음 모퉁이를 돌 힘이 부족하다고 발표한 켄 로치 감독의 잠정적 은퇴작이다. 최근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와 <미안해요, 리키>(2019)의 뉴캐슬을 떠나 유서 깊은 광업도시 더램으로 무대를 옮긴 <올드 오크>는 파업 투쟁과 연대의 추억을 안고 황폐해져가는 도시에 남은 노동자들이 정부가 덜컥 배치한 시리아 난민들을 어떻게 맞이하는지를, 마지막 공동 회합장인 펍 ‘올드 오크’를 중심으로 보여준다. “왜 우리 마을이냐? 리버럴들이 많은 런던이 아니고?”라는 항의 속에 펍의 주인 티제이(데이브 터너)와 사진찍기를 좋아하는 난민 여성 야라(에블라 마리)는 펍의 뒷방을 교류와 연대의 장소로 가꾸고자 애쓴다. 민중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몇몇 장면들은, 켄 로치의 리얼리티와 리얼리즘은 노동자 계급의 본원적 도덕성에 대한 신념을 포함하고 있음을 확인해주었다.

- 희망적인 영화다. 오늘날 영국에서 희망을 갖는 일이 가능한가.

= 의심의 여지없이 어두운 시기지만 영화 속 희망은 진짜라고 생각한다. 타인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런 반응이라고 믿는다. 연대는 긴 노동계급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심어진 정신이며 오래된 산업 종사자들은 과거 투쟁과 연대를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이 연대를 재발견하고 조직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정치를 쌓아올리고 구체화하면 된다. 신문과 방송, BBC의 염세주의가 그것을 가려 못 볼 뿐이다.

- 스웨덴에서 왔다. 스웨덴은 이제 파시스트 정치인들에 기초한 정부를 갖게 됐다. 이들은 농촌 인구에게 자신이 그들 편이라고 설득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국민들이 자신의 이익에 반해 투표하도록 만들고 있다.

= 1920년대에도 일어났던 일이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이 붕괴하고 일관성 있는 좌파의 부재와 빈곤을 틈타 파시스트들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좌파를 죽이고 부상했다. 홀로코스트의 디테일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그런 일이 가능했고 누가 지지했는지, 파시즘이 어떻게 세력을 얻었는지를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큰 기업들이 파시즘을 후원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영국 정부는 파시스트 프랑코를 스페인에 데려가 공화국을 무너뜨렸다. 영국이 스페인에 투자한 이유는 공화국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날아갈까 두려워서, 파시즘보다 자본의 손실을 두려워해서였다. 지금 미디어는 인종주의자에게 발언권을 주고 우익의 어젠다를 논의 테이블에 올린다. 미국 트럼프 전 대통령과 영국 보리스 존슨 전 총리의 화제성에 미디어가 현혹돼 있는 동안 좌파 지도자는 발언권을 잃었다. 홀로코스트 직전과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 그리스에서 왔다. 그리스인들은 이민자들 때문에 직업과 돈이 말랐다고 탓하고 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에게 책임을 돌렸듯이. <올드 오크>는 난민과 노동자를 다시 모이게 하고 생각과 감정을 나누게 한다. 어떻게 보면 극장에 모여 영화를 보는 경험도 일종의 커뮤니티 미팅이라는 점에서 같은 맥락의 행동 같다.

= 현재 경제 시스템에서 사람들은 회의도 줌으로 하고 상품은 배달시킨다. 물건을 사고 식사를 하는 과정에 판매원, 종업원과 대화할 기회도 없다. 사회의 모든 면이 파편화됐고 모든 것이 고립을 향해 달려간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독일을 제외하면 유럽은 충분히 책임지지 못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에 수백만의 난민을 떠맡겨버렸으니 그리스 국민들의 반응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국제사회의 실패다.

- <올드 오크>의 ‘악역’들이 궁금하다. 극 중 펍의 단골인 노동계급 남자들은 단골 술집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참지 못한다. 이들은 당신의 전작 속에서 자본가에게 착취당하거나 부당한 처우를 받은 인물일 수도 있다.

= 그들이 악하다고 전혀 생각지 않는다. 시리아 난민을 배척하는 그들의 말 안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예컨대 지역사회가 아무런 준비도 못한 채 난민을 받아들일 경우 아이들은 당장 학교에 가야 하고 이미 30명 이상의 학급을 책임지던 교사들은 영어를 모르는 7, 8명의 난민 학생들에게 시간을 할애하느라 기존 학생과 학부모의 불만을 사게 된다. 의료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사실상 일자리는 바닥나고 인구가 줄어 상점, 교회, 학교가 문을 닫는 상황에서 티제이에게 반발하는 이웃들의 말도 현실적이다. “왜 하필 가진 것 하나 없는 우리 동네에 난민을 배정하는가?” 여기까지 정당한 문제 제기일 수 있지만 이 의식이 한발만 더 나아가면 “모든 어려움이 난민 때문이다”로 빠진다. 이들은 마지막 퍼블릭 스페이스인 펍을 지키려다 끔찍한 짓까지 저지르게 된다. 나는 관객이 그들과 한 걸음씩 나아가다가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단계에 이르길 바랐다.

- 그렇다면 난민을 배정하는 공정한 시스템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

=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 모든 국가가 현재 우리가 가진 유일한 조직인 유엔의 계획에 협조해야 한다. 우선 영국은 난민을 양산하는 이라크와 불법적 전쟁을 중단해야 한다. 침략하지 말아야 한다. 제국주의 열강으로서 영국은 난민의 주요한 원인 제공자임을 인정하고 국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우리는 거기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둘째, 난민의 필요와 인권을 존중하고 항상 국제적 연계 속에 대응해야 한다. 이것은 국제주의다.

- 이번에도 비전문 배우들과 일했다. 시리아 난민과 더램 주민 역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나.

= 이스라엘 점령지인 골란 하이츠 출신의 에블라 마리(주인공 야라 역)를 제외하면 난민 역 배우들은 시리아의 같은 지역에서 온 가족이었다. 내가 잘 모르는 문화에서 온 분들이라 매 신 배우면서 했다. 당신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폴 래버티가 쓴 시나리오 속 상황이 편안한가? 대원칙은, 그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행동은 카메라 앞에서 하지 않게 한다는 것이었다. 비전문 배우와 일할 때는 맞는 사람을 찾아 그들이 전문가가 되게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요구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연기의 주인이 돼야 한다.

- 영화 속 마을의 경험에 현재 영국의 문제가 들어 있다. 임금은 낮고 병원도 제대로 가기 힘든 국민이 있는 상황에서 대관식에 어마어마한 돈을 쓰고 있는 걸 어떻게 생각하나.

= 왕실과 정치인에 대한 냉소는 팽배해 있다. 신이 왕을 축복하는 서사를 담은 대관식은 서열화된 사회를 믿는 거대한 프로파간다다. 상속된 부와 계급에 기초한 시스템의 정점이다.

- 그동안 노동계급에 집중해왔다. 역사가 반복되고 문제는 늘 그대로라고 가정할 때, 어떤 힘으로 계속할 수 있나.

= 한번 싸움을 시작하면 밖으로 쉽게 나올 수 없다. 싸움이 당신의 일부가 되니까. 계급 이익과 갈등은 방식을 바꿔가며 계속된다. 1980년대에는 공적 소유를 파괴한 대처주의자의 공격이 있었고 모든 것을 사유화하는 흐름은 조합을 분열시켜 노동계급을 더 착취하기 쉬운 환경을 만들었다. 지금도 보건 서비스 중 많은 부분이 야금야금 민영화되고 있다. 치과 치료와 치매가 그러하다. 변한 게 없다고 정부는 말하지만, 하나를 허락하면 다음 것을 내주게 된다. 기후 환경 이슈는 이제 엔드게임이다. 폴 래버티 작가와 함께한 최근 몇몇 영화는 지금 아니면 영영 불가능하다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내 영화가 무슨 효과를 냈는지 알기는 정말 어렵다. 많은 노동조합이 우리 영화를 모금과 캠페인을 위해 상영하긴 했지만 우리는 과장해서는 안된다. 결국 하나의 작은 유럽영화일 뿐이고 코러스 속 한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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