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영화제는 새로운 만남과 발굴의 장이다. 신인배우가 첫 영화로 칸의 레드 카펫을 밟는 건 흔한 경험은 아닐 테지만 올해는 유달리 한국 신인배우들의 활약이 눈에 띈 한해였다. <화란>의 김형서, 홍사빈 배우는 자신들의 첫 장편영화를 들고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으로 칸의 문을 두드렸다. 경쟁부문에서도 한국 배우의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난니 모레티 감독의 <브라이터 투모로>에는 한국영화에 대한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한국인 통역사 역할로 처음 연기에 도전한 피아니스트 유선희도 배우로서 처음 칸에 도착했다. 칸에서 데뷔한 한국 배우들의 앞날을 응원하며 그들의 활약을 소개한다.
타고난 영리함과 타는 듯한 목마름, <화란> 배우 김형서
“첫 연기, 첫 영화가 <화란>이라서 너무 다행이고 감사하다.” 가수 비비로 활동 중인 배우 김형서는 <화란>의 하얀 역할로 자신의 첫 번째 연기 경력을 시작했다. 김형서가 맡은 하얀은 연규(홍사빈)의 어머니와 하얀의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연규와 가족이 된 소녀로, 위태로운 소년 연규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버팀목이다. 첫 연기에서 이렇게 어둡고 복합적인 캐릭터를 선택한 이유를 묻자 “일단 무작정 연기를 해보고 싶은 충동이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가능한 용기였던 것도 있고.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마음에 와닿았다”고 답했다. 겸손한 답변이었지만 초심자의 행운이라고 치부하기엔 캐릭터의 해석과 표현력이 남다르다. 하얀이란 캐릭터를 어떻게 이해했느냐는 질문에 실로 영리한 답변이 돌아왔다. “사실 내가 공감이 갔던 캐릭터는 연규였다. 연규가 느끼는 답답함, 무력함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희망까지 여러 가지로 끌렸다. 그래서 연규가 바라는 게 무엇일지를 상상하며 연규의 시선에서 하얀을 그려보았다.” <화란>은 희망 없는 세상에 사는 소년 연규와 그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보는 폭력 조직의 중간 보스 치건(송중기) 사이의 사연이 중심인데, 둘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건 바로 하얀의 존재다. “하얀은 쓰레기더미에서 피어난 꽃처럼 환경을 탓하지 않는 올곧은 아이다. 나도 살면서 길을 자주 잃는 편인데 그럴 때마다 주변에 하얀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접근했다.” 타고난 영리함으로 캐릭터의 쓸모와 본질을 꿰뚫는 배우 김형서의 감각은 베테랑 못지않다. 동시에 연기에 대한 갈증에 휩싸인 이 야심만만한 신인배우는 마치 스펀지처럼 경험을 빨아들이며 언제 어떤 순간에서도 배움을 구한다. “칸에 와서 즐겁지만 한편으론 아직 한참 멀었구나, 갈 길이 멀구나 싶은 마음 가득이다”는 그 진심 어린 말은 배우 김형서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야생동물의 냄새,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 <화란> 배우 홍사빈
소년은 울지 않는다. 아니 위태로울수록 단단해진다. 희망도 미래도 없는 동네에서 태어난 18살 소년 연규는 돈을 모아 화란(네덜란드)으로 떠나는 것이 꿈이다. 화란이 어디 있는지, 가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도 모르는 소년의 꿈은 덧없어서 더욱 처절하고 애잔하다. 연규 역을 맡은 배우 홍사빈은 이번 영화가 장편 극영화 데뷔작이지만 말해주지 않으면 믿지 못할 만큼 놀라운 에너지와 깊은 눈빛으로 화면을 장악한다. “부담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숙소에서 계속 대본을 보며 연기 구상을 했는데 막상 현장에 나가면 감독님, 선배님들이 모두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어떤 선택을 해도, 아니 실수를 해도 틀린 게 아니라는 걸 배울 수 있었던 현장이었다.” <화란>은 홍사빈의 동물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순간으로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생활감에 찌든 피로한 눈빛은 탁월한데, 홍사빈은 “캐릭터를 대할 때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일단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친구를 대하듯 접근한다”고 비결을 밝혔다. “오늘은 이 친구와 얼마나 가까워졌을까, 오늘은 조금 멀어진 것 같으니 내일은 좀더 다가가볼까 하면서 천천히 친해진다.” 겪어보지 못한 어둠에 가닿을 수 있는 비결은 어쩌면 상대를 이해하려 무릎을 낮추는, ‘듣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시작은 부담감에서 출발했지만 점점 책임감으로 바뀌었다. 배우로서 이만한 무게를 경험해본 건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한다. 후회도 많이 하는 편이라 그만큼 노력하는 중이다. 이 영화가 태어나는 과정을 함께한 입장에서, 칸에서 이 영화의 탄생을 목격하는 건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다.”
새로운 도전이 주는 즐거움, <브라이터 투모로> 배우 유선희
변화는 밀물처럼 소리 없이 밀려온다. 최근 한국 콘텐츠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곳곳에서 실감하는 가운데 칸에서도 한국에 대한 변화한 인식을 만날 수 있었다. 난니 모레티 감독의 <브라이터 투모로>는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고전적인 영화를 제작하고자 하는 감독의 분투기를 그린다. 영화 제작이 좌초될 위기에 처했을 때 감독의 구세주로 등장한 것은 다름 아닌 한국 프로듀서들이다. 한국 프로듀서들은 난니 모레티 영화의 가치를 알아보고 투자를 약속하는데, 이때 한국 영화인들과의 통역을 맡은 인물로 캐스팅된 배우가 바로 유선희 피아니스트다. 꾸준히 피아노 솔로 앨범을 내며 로마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유선희 피아니스트는 우연한 기회에 난니 모레티 영화에 캐스팅되고 처음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공연이 멈추고 정체된 시기에 난니 모레티 영화의 오디션 제안을 받았다. 한국인 통역사 역할인데 아시아계 배우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것 같은 역할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지금, 유선희 배우는 이미 주연으로 한편의 영화를 마쳤고 넷플릭스 시리즈에도 출연하며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난니 모레티 감독은 완벽을 추구하는 분으로 명성이 자자한데, 클래식 음악은 워낙에 반복을 많이 하는 작업이라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피아노 연주는 사실 홀로 감당해야 하는 작업인 데 반해 영화는 함께하는 창작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한국 문화를 대하는 시선과 위상이 달라졌음을 실감한다는 그는 언젠가 한국영화에도 출연하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