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야, 나한테 기대.” 인터뷰 전, 배우 김혜나가 함께 사진 촬영하던 정이서에게 건넨 말에 울컥한 까닭은 그 한마디가 <그녀의 취미생활> 내내 혜정(김혜나)이 정인(정이서)에게 눈으로 하던 말과 같았기 때문이다. 하명미 감독의 장편 데뷔작 <그녀의 취미생활>은 이혼 뒤 심신이 무너진 채 고향 마을로 돌아온 여자 정인과 그곳으로 이사 온 눈에 띄는 여자 혜정의 절박한 이야기다. 정인은 혜정의 조용한 뒷받침 아래 자기 삶에 함부로 침입하는 전 남편 광재(우지현)와 마을 사람들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파리 느낌이 나는 카페의 테라스에서 커피 마시는 게 취미”인 정이서와 취미로 “탱고, 서핑,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김혜나와 마주 앉아 그들이 말하는 ‘내겐 너무나 애틋한 영화’에 대해 들었다.
- 동명의 원작 소설이 있다. 원작을 읽어봤다면, 소설과 시나리오는 어떻게 다르던가.
정이서 당연히 읽어 봤다. 영화화 과정에서 정인이 적극적인 캐릭터로 바뀌었고, 전 남편과 정인의 이야기도 추가됐다.
김혜나 나도 읽었다. 혜정도 영화에서 좀 더 풍성한 인물이 되었다. 하명미 감독님이 혜정에게 살을 많이 붙여주었다.
- 하명미 감독은 어떤 스타일의 창작자인가.
정이서 내가 준비한 정인이를 마음껏 표현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 감독님이 나를 믿어 주고 있다는 걸 느꼈다. 감독님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마음이 원동력이 되었다.
김혜나 현장에서 배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스타일의 감독님은 아니었다. 그럴 시간도 없었고. 대신 좋은 컷이 나오면 천천히 “좋아”라고 하시는데, 그 한마디에 항상 힘을 받아 연기했다.
- 극 중에서 정인의 결혼생활이나 혜정의 도시생활이 나오지는 않는다. 두 배우 모두 각자 맡은 캐릭터의 과거를 상상해 봤을 것 같다.
정이서 나 역시 과거를 대놓고 보여주지 않는 점이 좋았다. 상상의 나래를 내 식대로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정인이 얼마나 박하마을을 절실히 떠나고 싶었으면 광재와의 결혼을 선택했을까. 도시에서의 결혼 생활은 얼마나 힘들었고 또 얼마나 갈 곳이 없었으면 그 싫던 고향으로 돌아왔을까. 이런 식으로 삶의 궤적에 따른 정인의 감정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김혜나 시나리오에 있는 단서들을 가지고 혜정의 과거를 유추했다. 혜정은 두 번 정도 결혼했었는데, 남편들이 다 죽은 상황이다. 그렇다면 그 남편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혜정의 결혼 생활은 얼마나 지옥 같았을까. 피하지 않고 남자들과 맞서 싸우다가 결국 박하마을로 온 여자가 아닐까 하는 일련의 상상을 거쳤다.
- 정인과 혜정의 관계를 적당한 거리를 둔 사이로 표현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두 인물 사이의 감정선을 어떻게 가져갈지 논의한 부분이 있다면. 정이서 자연스럽게 이뤄진 부분이 크다. 낯을 많이 가리는 내가 이번 영화로 처음 만난 혜나 선배님과 점점 친해지면서 느꼈던 감정이 정인이 혜정에게 조심스레 다가가면서 느꼈던 감정과 맞물려 잘 드러난 것 같다.
김혜나 어떻게 연기하자고 얘기하진 않았다. 항상 그 순간의 호흡에 집중했다. 혜정이 정인의 등에 있는 흉터를 보는 신이 떠오른다. 그 흉터를 보고 이서의 눈을 보는데 정말로 눈물이 터졌다. (눈시울을 붉히며)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대사를 해야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현장의 모두가 울었다. 나와 이서도 친해지고 정인과 혜정도 가까워진 촬영 막바지였던 터라 그랬던 것 같다. 정인의 아픔을 내가 진심으로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이 진심으로 우러나왔다.
- 혜정이 일면식 없는 정인을 선뜻 도와준 이유는 무엇이라고 봤나.
김혜나 혜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렇게 결론을 냈다. 소유욕 강한 혜정이 마을에 왔는데 정인이란 사람이 꽤 마음에 드는 거다. 그래서 이 애를 가져야겠다는 욕심으로 정인에게 다가갔는데 그의 아픔에서 자신의 과거를 보기도 하면서 점차 순수하게 돕고 싶은 마음으로 변해간 거라고 생각했다.
- 마음을 밀폐해 버린 정인이 혜정에게만큼은 마음을 연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했나.
정이서 자기와는 다르게 마을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행동하는 혜정의 모습에 흥미를 느꼈을 거고, 알면 알수록 혜정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커졌을 거다. 어렸을 때부터 착한 아이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뭐든 억누르고 살아왔던 정인이 조금씩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체감하던 시기에 혜정을 만났다는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 같다.
- 광재와의 대망의 라스트 신을 찍을 당시는 어땠나. 장총을 들고 액션하는 이 신만큼은 리허설이 필요했을 것 같은데.
김혜나 저녁부터 다음날 거의 해 뜰 때까지 촬영했다. 그만큼 힘들었는데 둘 다 무슨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하얀 원피스를 입어서 정말 웃겼다. 화면에서는 매력적으로 나와 의외이기도 했다.
정이서 그날 액션 팀까지 와서 합을 맞췄다. 사실 우리보다 우지현 선배가 달리고 구르느라 고생을 진짜 많이 했다.
- 이야기를 들을수록 두 배우가 이 영화를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하는지 전해진다.
정이서 작년 여름쯤 나는 배우로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나의 이상과 실제 내 그릇의 차이가 크게 느껴져 몹시 불안했다. 그럴 때 <그녀의 취미생활>이 내게 왔다. 정인으로 사는 동안 인식의 전환을 하게 됐다. 이렇게 한 인물에게 집중하다 보면 느릴지언정 조금씩 나아갈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이 작품이 정말 소중하다.
김혜나 우리 영화가 <델마와 루이스> 같은 작품으로 오랫동안 남았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데뷔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많은 분이 ‘배우 김혜나’ 하면 데뷔작이었던 <꽃섬>(2001)의 김혜나를 많이 떠올린다. 앞으로는 <그녀의 취미생활>의 김혜나로 기억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