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일하는 여성의 모습 여성 연대에 방점을 찍다, ‘여성백년사-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이혜진 PD
2023-07-07
글 : 임수연
사진 : 백종헌

남성 독립운동가 세 사람을 말하시오. 안창호, 안중근, 윤봉길…. 어렵지 않게 이름을 댈 수 있다. 그렇다면 여성 독립운동가 세 사람일 경우는 어떨까? <여성백년사-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이하 <여성백년사>)는 유관순 외에 바로 떠오르는 여성 독립운동가가 없어 자기반성을 하는 패널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100여년 전 이 땅에서 본연의 목소리를 냈지만 주류 역사학계에서 자주 소환되지 못했던 여성들의 미시사를 조명한다. 만연한 성차별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 존엄성을 지켰던 그들의 모습은 현 한국 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 최우수상, YWCA가 뽑은 좋은 미디어콘텐츠상 대상을 받은 <여성백년사>를 연출한 이혜진 PD는 이 연결점에 주목하며 여성들의 역사를 수집해나갔다.

- <여성백년사>는 어떻게 시작된 기획인가.

= EBS <다큐 프라임> 시리즈는 PD들이 기획안을 내면 서류 심사와 프레젠테이션을 거쳐 기획의 참신성과 완성도, PD의 연출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선발된 아이템으로 제작된다. <여성백년사>는 내가 처음으로 쓴 <다큐 프라임>기획안이었다. 2009년 EBS에 입사했을 때부터 여성의 역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하고 싶었는데, 방송국 특성상 교육적인 의미가 담기지 않으면 편성되기가 어렵다. 100년 전 경성을 주제로 한 전시를 보러 갔다가 그들이 남긴 기록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고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여성 인권을 주장하기도 했던 모습을 발견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구성으로 기획안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입사 초부터 여성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 대학교 4학년 때 들은 교양 수업에서 나혜석을 알게 됐다. 나혜석에 심취해서 거의 한달 동안 도서관에서 나혜석에 관한 책만 읽었다. 이를테면 이혼 여성을 향한 비난에 부조리를 느낀다든지 당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80년 전에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는 게 재밌었다. 오히려 과거 여성들이 더욱 거침없이 자기 이야기를 전했다는 것도 신기했다. 나중에 나혜석 같은 여성들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만든다면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인 후 하고 싶었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발굴한다는 기획인 만큼 자료 조사의 난이도도 높았겠다.

= <다큐 프라임>의 장점은 충분한 준비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EBS 내부에서도 PD들이 무척 하고 싶어 하는 프로그램이다. 취재 작가와 메인 작가, 나 이렇게 셋이서 당시 신문, 잡지 기사는 거의 다 봤고 관련 논문도 많이 찾아봤다. 취재 작가의 가족이 한의사라서 고어 해석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웃음) 2부에 나오는 동양 최초의 여성 택시 기사 이정옥의 경우 신문에 작게 나온 토막 기사에서 발견한 것이다. 사실 방송에 담긴 것은 조사한 내용의 100분의 1도 안된다.

- 자료 조사한 내용 중 무엇을 다큐멘터리에 담아낼 것인지를 어떤 기준으로 결정했나.

= 현재를 반추해볼 수 있는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단순히 그들이 입은 피해나 억울함에 초점을 두지 않고 현실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했던 일이 명확한 이들을 주목했다. 이를테면 1부에 나오는 김명순 소설가는 현대인들에게 ‘최초의 미투’로 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전에 작가로서 무척 뛰어난 역량을 갖춘 사람이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 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을 소개했다. 근대 신여성이라고 하면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을 많이들 꼽는데 나혜석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X> 등 다양한 매체에서 여러 차례 다룬 바가 있다.

- 유튜버 이승국, 통역사 안현모, 역사학자 심용환, 배우 김현숙 등 패널들이 시간 여행을 하고 과거 인물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토크멘터리 형식을 취했다. 자칫 딱딱할 수 있는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가고픈 연출자의 배려가 돋보였다.

= 요즘 시청자들의 눈은 과거 경성을 재현한 영화와 드라마에 맞춰져 있다. 상대적으로 제작비가 적은 다큐멘터리는 그 정도 규모의 세트와 의상, 보조 출연자를 동원하기 어렵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스토리텔링 기법에 역사 토크멘터리 형식을 접목했다. 사실 방송 전에는 시청자들이 어색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과거 인물을 맡은 배우들이 뻔뻔하게 연기를 잘해줬다. (웃음)

- <여성백년사> 1부는 김명순, 2부는 다양한 직업여성들, 3부는 N번방 사건을 추적한 이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같은 흐름은 어떻게 결정됐나.

= 1~2부는 과거, 3부는 현재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는다는 것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심지어 3부에서 요즘 여성들의 고민을 담기 위해 결혼 정보회사 대표도 취재했다. 그러던 중 추적단 불꽃의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를 읽게 됐다. 이 이야기를 다루는 것만으로 1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이야기를 얕게 다루기보다는 지금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이야기, 디지털 성폭력을 집중적으로 다루자고 결정했다.

- 3부에는 대학생 신분으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취재했던 추적단 불꽃,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 단체 리셋 외에 이 사건을 보도한 <한겨레> 기자들이 등장한다. 여성들의 연대를 다룬 흐름에서 김완 기자 같은 남성이 등장하는 것은, 사안의 맥락이나 <한겨레>의 기여도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돌출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 김완 기자를 사전 취재했을 때 여성 연대에 대한 의견을 잘 줬고, 무엇보다 “뿌리 깊은 남성들의 포르노 문화부터 잘못된 것”이라 말해준 것이 이 다큐멘터리에서 무척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이야기를 남자 기자의 입으로 듣는 것이 의미 있었다.

- 사실 패배의 역사를 반복적으로 목격하다 보면 지칠 때가 있다. 그렇다고 희망만을 강조하면 자칫 사건의 심각성을 약화시킬 수도 있고. 특히 현재를 다룬 3부 ‘N번의 잘못’의 구성과 접근 방식에 고민이 많았겠다.

= 특히 1부 김명순 같은 경우는 오랜 기간 무수히 많은 성폭력을 당했던 사람이다. 그의 죽음도 새드 엔딩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김명순이 정말 잘 싸웠다고 생각한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여주고 싶었다. 또한 2부에서 분위기를 전환해 동양 최초의 여성 택시 기사 이정옥, 한국 최초의 미용사 오엽주, 데파트 걸에서 시작해 기자가 된 송계월 등 피해자로서가 아닌 일하는 여성의 모습을 다양하게 담았다. 3부를 준비하던 중 넷플릭스에서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이하 <사이버 지옥>)가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실 아이템을 포기해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사이버 지옥>은 아직 디지털 성폭력은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마무리됐고, 피해자의 용기에 집중한 반면 여성들의 연대를 깊이 다루지는 않았다. 이야기 흐름이나 출연자가 겹치지만 우리는 여성 연대에 좀더 방점을 찍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비슷한 범죄가 반복되고 있지만 여성들의 연대 덕분에 조금씩 달라지고 있고, 오랫동안 지속됐던 성폭력이 다음 세대에도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 처음 EBS에 입사하게 된 스토리도 듣고 싶다. 이후 EBS에서는 어떤 프로그램들을 연출했나.

= 원래 시사 교양국을 지망하던 PD 지망생이었다. 그런데 최종 면접에서 “올해는 여자를 안 뽑는다”거나 “온실 속의 화초 같다”는 식의, 나의 여성성을 스스로 검열하게 만드는 말을 몇번 들었다. 그리고 고생을 모른다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삼성중공업에 입사했다. (웃음) 거제도에서 스쿠터를 타고 다니며 1년 반 정도 일을 한 경험이 결과적으로 방송국 면접을 볼 때 무척 유리하게 작용했다. EBS는 입사 초부터 <생방송 톡!톡! 보니하니>나 <딩동댕 유치원> 같은 유아·어린이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다양한 방송을 경험할 수 있는 방송국이다. 어린이들과 소통하고 학부모의 피드백을 즉각적으로 받다 보면 디테일한 연출을 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가장 오래 맡았던 방송은 <스페이스 공감>이다. 단순히 무대만 중계하는 것이 아니라 뮤지션의 음악 세계와 앨범의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인서트 영상을 고민해야 한다. 추상적인 이야기를 이미지화하는 방식에 대해 공부가 많이 됐다. 관객의 감상이 실시간으로 오기 때문에 시청자 반응을 염두에 두는 버릇이 생겼다. 이후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도 시청자가 너무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고민하게 됐다.

- EBS PD들의 성비는 어떻게 되나. 다큐멘터리 연출자의 성비가 균형 있게 잡히면 회사 전체에 어떤 영향을 주나.

= 내가 입사한 이후에는 남자 PD가 더 많이 들어온 적이 한해도 없다. 그전에는 압도적으로 남자가 많았는데 지금은 확실히 여자가 많다. 성비가 맞춰지면 조직 전체가 균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가령 시사회를 연 후 여성 PD들이 젠더 관점에서 의견을 많이 전달한다. 자연스럽게 남자 PD들도 생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 어떤 다큐멘터리가 좋은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하나.

= 다른 작가가 했던 말 중에서 무척 공감한 내용이 있다. 보는 사람도 바뀌고 만드는 사람도 바뀌는 다큐멘터리가 좋은 다큐멘터리라고. <여성백년사>를 만들기 이전의 나는 젠더 이슈에 무척 회의적인 사람이었다. 부조리한 세상이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의 일에 자신을 모두 던져가며 나서는 리셋과 추적단 불꽃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무언가 해야겠다,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작진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생각이나 행동이 달라지고, 이러한 변화가 시청자에게도 전해지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

나를 연출자로 만든 것

경험에서 비롯된 문제의식 그리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영상이었다. 영상 매체는 내 목소리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한다.

요즘 나를 즐겁게 하는 것

체력이 좋아지고 있는 것. 헬스를 열심히 하는 만큼 체력이 느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다큐멘터리는 드라마처럼 현장 스탭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장비와 소품을 함께 옮겨야 하는데, 근력을 키워서 번쩍번쩍 들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사실 8년 정도 필라테스를 할 때는 미용 목적이 컸는데, 내게 필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이번 PT를 시작할 땐 다이어트가 아닌 무거운 장비를 드는 것이 목표라고 확실히 말씀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