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규 PD는 KBS1 <다큐 인사이트> 여성 아카이브X인터뷰 시리즈(이하 아카이브 시리즈)를 통해 세상의 성편견과 성차별을 전면으로 통과한 여성들의 증언을 4차례 기록했다. 아카이브 시리즈 속 여성들의 증언에 무게를 싣는 건 KBS가 보유한 수많은 영상 자료들이다. <다큐멘터리 개그우먼>에선 여성 희극인들이 시대를 몸소 바꾸어낸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했고, <다큐멘터리 윤여정>에선 배우 윤여정의 측근들이 얼마만큼 윤여정이 개혁적이고 창의적인 배우인지 증명했다. <다큐멘터리 국가대표>에선 여성 스포츠 선수들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받아온 부당한 대우를, <다큐멘터리 뉴스룸>에선 국내외 여성 앵커들이 남성 일색이었던 방송국 보도국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생생히 진술했다. 2년 만에 돌아온 아카이브 시리즈의 5탄은 <다큐멘터리 걸;GIRL>(이하 <걸>)이다. 마침내 ‘나를 사랑해줘’가 아닌 ‘나를 사랑한다’며 스스로를 기꺼워하는 가사를 노래하는 걸그룹의 등장 과정을 살피기 위해 이은규 PD는 K팝 역사의 한가운데서 굳건히 제 몫의 일을 하고 있었던 각종 세대의 걸그룹 멤버를 인터뷰룸으로 소환했다.
- 아카이브 시리즈를 기획할 초기부터 걸그룹을 다루고 싶었다고 들었다.
= S.E.S., 핑클, 베이비복스 등을 1세대 걸그룹으로 잡는다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걸그룹이 등장한 지 25년이 넘었고 방송사엔 그 시간만큼 푸티지가 쌓여 있다. 그 시간 속에서 걸그룹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고 싶었다. ‘누구에게나 성장 서사가 있다’가 기획안의 첫줄이었다. 20세기 소년들에겐 <삼국지>가, 20세기 소녀들에겐 <작은 아씨들>이 그들의 성장 과정에 함께였듯이 나의 성장에 함께한 서사는 걸그룹이었다. 사실 이 특집의 경우 많은 여성학자들이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젠더 연구의 취재원으로 걸그룹 멤버를 섭외하는 게 가장 어려운데 하물며 그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카메라 앞에서 젠더 이슈를 증언하는 게 가능하겠느냐라는 요지의 걱정이었다.
- 이번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데 영향을 준 덕질의 경험이 있나.
= <다큐멘터리 개그우먼>을 만들 때부터 출퇴근길 차 안에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들었다. 가사 중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부분을 들을 때마다 힘을 얻었고, 이 무렵부터 걸그룹 기획을 준비했다. 사실 3세대 걸그룹이 조명된 이후에야 여자도 걸그룹을 덕질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걸그룹을 응원하는 소녀들이 많아진 풍조는 굉장히 고무적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이 여학생들의 롤모델이 되는 것, 반가운 일이지 않나.
- 최종적으론 S.E.S.의 바다, 원더걸스의 유빈, 나인뮤지스의 전 멤버 세라가 인터뷰이로 등장했다. 취재원이 확정되며 기획의 방향이 바뀌기도 했나.
= 기획의 방향은 어차피 계속 바뀐다. 다만 처음부터 주지했던 부분은 4세대 걸그룹의 이야기까지 작품에 포함해 걸그룹 담론의 통시적 변화를 살피려 했다는 점이다. 걸그룹의 서사를 잘 다루는 매체는 이미 정말 많다. <댄스가수 유랑단>도 그렇고, 르세라핌이 자체적으로 만드는 다큐멘터리도 그렇다. 우리가 더 이야기할 게 있을지, 우리가 너무 늦게 이 주제를 꺼낸 게 아닌지 고민하기도 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KBS 내 방대한 푸티지를 잘 아카이브하는 일이었다.
- 이전 연작들에 비해 <걸>은 인터뷰룸의 컨셉이 명확하다. 우주와 달의 모습이 후경에 깔리고, ‘중력’이라는 키워드가 누차로 반복된다.
= 4세대 걸그룹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하다 그들의 주체성에 관한 여러 담론을 알게 됐다. 그중 “걸그룹들이 주체적인 이야기를 하지만 걸그룹이 과연 주체인가” 하는 논의도 있었다. 이래도 저래도 한소리씩 듣는 걸그룹을 보며 이들에게 가해지는 중력이 너무 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중력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달, 우주와 같은 배경을 구상하게 되었다.
- 전작들에 비해 대중음악평론가, 댄서 등 산업 전문가들의 코멘터리가 대폭 확대됐다. 그리고 이들은 전부 여성이다.
= 처음엔 걸그룹과 인터뷰를 성사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해 많은 전문가들에게 섭외 요청을 넣었다. 전작 <다큐멘터리 윤여정>처럼, 당사자 없이 꾸리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려 한 것이다. 걸그룹을 좋아하기만 했지 이 산업에 관해선 잘 알지 못하다 보니 프레젠터로 와주신 분들이 프로그램 전체에 자문위원 역할도 겸해주셨다. 우리 연작의 대원칙은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프레젠터들은 웬만하면 여성으로만 구성하려 했다. 또 해당 산업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대부분 여성들이기도 하고.
- 3세대 걸그룹에 관해 많은 평론가들이 그들의 안무와 노래 가사에 드러나는 수동성을 지적한다.
= 이 문제에는 굉장히 다층적인 논의가 얽혀 있다. 가령 섹시한 컨셉으로 활동한 당시 걸그룹 멤버들이 그래서 불행했냐고 묻는다면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3세대 걸그룹의 수동성 이슈를 보다 여러 각도에서 조망하고 싶었다. KBS1의 주 시청자가 장노년층이다 보니 그들에게 걸그룹 젠더 담론이 4세대에 이르러 변화했다는 걸 뚜렷하게 설명하기 위해선 3세대 걸그룹의 퍼포먼스 영상을 과거의 사례로 불가피하게 갖다붙일 수밖에 없었다. 걸그룹은 본인의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그걸 불쌍하고 안됐다는 식으로 편집한 것만 같아 여전히 마음에 걸린다.
- <다큐멘터리 개그우먼>의 김숙도, <걸>의 유빈도 공통적으로 시대를 잘 만난 것이 아니라 본인들이 시대의 변화를 만든 것이라 역설한다.
= 언제나 인터뷰이들은 ‘우리가 줄곧 노력하다보니 시대가 바뀐 것이다’라고 언급한다. 연작을 제작할 때마다 동일한 경험을 한다. 항상 시대가 변했으니 여성들의 이야기를 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에서 기획을 시작하는데, 종래엔 시대를 바꾸기 위한 여성들의 투구에 늘 탄복하게 된다.
- 아카이브 시리즈를 처음 기획할 때 회사 내부의 반응은 어땠나.
= 처음 <다큐멘터리 개그우먼>의 기획안을 냈을 때만 해도 “그래도 개그‘맨’의 목소리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냐?”라는 반응이 일부 있었다. 이런 질문을 접할 때면 “인터뷰이가 전부 남자일 땐 이런 질문 안 하시잖아요?”라고 반박하곤 한다. 아직도 어떤 주제를 이야기할 때 담론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이 전부 남성인 경우가 허다하다. 여성 인터뷰이로만 이루어진 프로그램도 있어야 세상의 비율과 맞지 않을까.
- 아카이브 시리즈만의 시그니처라 하면 화면 정중앙을 가득 채우는 여성들의 얼굴이다. 동일한 프레이밍을 계속 유지하는 이유가 있나.
= 당사자의 목소리가 가장 힘이 있지 않나. 당사자의 목소리가 잘 들리고 보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정중앙에서 정면을 바라보는 여성들의 이미지를 넣었다.
- 연작을 보다 보면 ‘여성 최초’의 수식이 붙는 인터뷰이가 자주 등장한다. 생각해보면 남성들은 언제나 많은 기회가 보장됐기 때문에 남성 최초란 타이틀이 필요 없었다.
= 분야별로 유리 천장을 깬 최초의 여성들이 등장해도, 그들의 후임 여성들이 등장하고 각광받기 어려운 사회구조다. 90년대 뉴스 영상을 보면 직업군별 최초의 여성들이 문화 꼭지 이전에 항상 보도되곤 했다. 기록을 세운 여성들 이후로 수많은 여성들이 그 자리에 등장했음에도 그 후속 보도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최초의 여성들만 잠깐 조명받고, 이들의 영향으로 등장한 수많은 여성들을 조명하지 않는 미디어의 여성 재현 방식에 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수많은 여성 스타들이 자신이 겪은 성차별을 증언하면 당신들도 그 맥락의 부역자가 아니었냐는 얼토당토않은 비난이 쏟아지기도 한다.
= 시리즈 작업 내내 인터뷰에 응하는 이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 노력했다. 스피커들은 필연적으로 어이없는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인터뷰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변화하는 미디어의 풍경을 증명하는 길을 언제나 고민한다.
- 무심코 사용하는 말의 위험성을 재고하게 됐다. 수많은 인터뷰이들이 자신은 ‘정형화된 미인’이 아니었다는 말을 건네는데, 여성의 아름다움에 어떻게 정형화된 기준이 있을 수 있나.
= 그렇다. 그런데 나 또한 정형화된 방송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 늘 회의한다. 시대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과거엔 이랬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식의 손쉬운 틀을 사용하는데, 사실 굳이 비교를 하지 않아도 현재 열심히 살고 있는 여성들을 조명하는 것만으로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지 않나. 완성본을 보며 창작자로서 다큐멘터리라는 정형화된 장르 내에서 익숙한 관습만 취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했다. 비유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젠더 이슈를 일차방정식으로 푸는 건 그만하고 싶다. 미지수 2개 이상인 고차방정식으로 나아가보려 한다.
- 방송에서 젠더 담론을 제기하는 방식 또한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현직에서 이런 변화를 체감하는 순간이 있나.
= 2016년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 이후론 확실히 달라졌다. 2016년 이후로 여성에 관한 이야기가 방송에 끊임없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고 시의적절했다. 요즘 젠더 이슈를 다룰 때는 시청자 일각에서 백래시가 점점 커지고 있어 난처하다. “왜 여자들만 목소리를 내?”라든지 “또 여성 이야기냐?”라든지. “PC가 과도하네”와 같은 반응도 나오고. (웃음) 연작을 처음 방영했던 2020년에도 젠더 담론을 선명한 방식으로 논했는데,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반발이 크다 보니 지금 시기를 어떻게 지혜롭게 넘어갈 수 있을지 연출자로서 고민이 많다.
- 아카이브 시리즈가 아카이브되고 있다. 아카이브에 관한 생각은.
= <모던코리아>를 만든 이태웅 PD가 했던 말이 있다. “좌든 우든 모두가 같이 공유할 법한 중간의 이야기를 담는 게 아카이브다”라고. 누군가 기록한 것이 있다면, 누군가는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바뀐 시대 맥락에 맞춰 그 기록을 열어봐야 한다.
나를 연출자로 만든 것
KBS2 <체험 삶의 현장>의 유니콘을 기억하나. KBS 입사 후 회사 주차장에서 <체험 삶의 현장>의 유니콘이 서 있는 걸 발견하고 어찌나 반가웠던지. 어릴 때부터 TV가 너무 좋아 당시 여의도에 있던 KBS, MBC 등 모든 방송국을 다 찾아다녔다. 그래서 한동안 회사를 돌아다니는 일이 반가움의 연속이었다. 카메라국 앞 호수엔 어린 시절 보던 <가요톱10>의 흔적이 있다.
요즘 나를 즐겁게 하는 것
아카이브 자료를 찾을 때가 가장 즐겁다. 지금까지는 젠더 위주의 푸티지를 찾았는데, 내년 방송될 신작을 위해 요즘 이전까지와 전혀 다른 테마의 KBS 아카이브를 <모던 코리아> 팀과 함께 뒤지고 있다. 이제껏 몰두했던 작업들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 것 같아 기대 중이다. 아카이브 작업은 계속해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