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야?” 우주 배경 영화에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이 흐른다면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아무리 그가 <Space Oddity>의 ‘톰 소령’이라지만, 심지어 그의 아들인 영화감독 덩컨 존스조차 달 기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더 문>으로 장편 데뷔를 했다지만, 우주영화에 보위의 음악을 삽입하는 것은 어느새 클리셰를 넘어 불문율이 됐다. 이처럼 보위는 늘 시그니처라 불릴 만한 특색이 또렷한 아티스트다. 글램 록이란 장르만 떠올려봐도 귀로는 <Starman> 전주의 기타 리프가, 눈에는 이마 위로 부풀린 새빨간 머리와 눈두덩이의 번개 페인팅이 선연하니 말이다.
<문에이지 데이드림>은, 그리고 이 영화를 연출하고 편집한 감독 브렛 모겐은 모두가 생생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이비드 보위에 관해 “너희가 보위를 아느냐”며 반문한다. 니체의 말을 사변적으로 비꼬는 보위의 인용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사실 아무도 보위를 알 수 없다는 듯 광활한 보위의 우주에 관객을 무작정 표류시킨다. 냅다 광활한 달의 바다로 관객을 데려간 다음 그 위를 떠도는 꼬리 달린 소녀를 등장시킨다. 이같은 오프닝은 엔딩에 이르러서 수미상응한다. 영화의 맥락과 일견 상이한 이 두 장면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끝이 없고 여전히 팽창 중인 우주가 곧 보위라 해석할 수도, 보위의 타계를 곧잘 ‘우주로 돌아갔다’로 표현하는 뭇 사람들의 반응에 관한 은유로 해석할 수도 있다. 모호한 오프닝과 엔딩에 어느 해석을 갖다대도 유사 답안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는 보위가 밝히는 아티스트론과 관련 있다. 보위는 자신의 초기 페르소나인 ‘지기 스타더스트’에 관해 “대중의 해석이 개입할 때 결이 풍성해지는 존재”며, 아티스트가 형태를 갖추기 위해선 “대중의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러 비유와 상징에 보위의 일대기를 일대일 대응하지 않고 구차한 각주도 덧붙이지 않는 연출 태도는 보위가 되고 싶어 했던 아티스트의 형상과 꼭 닮아 있다.
<문에이지 데이드림>이 취하는 또 다른 혼돈은 시각과 청각 사이의 시차다. 데뷔 초 데이비드 보위의 라이브 콘서트 화면으로 시작하는 콘서트 라이브 실황은 줄곧 시간 순으로 편집되지만, 그 위에 흐르는 보위의 보이스 오버 인터뷰 푸티지는 라이브 공연 당시의 시점과 무관하다. 또한 라이브 실황 사이에 삽입되는 몇 차례의 방송 토크쇼 영상도 잘게 쪼개 맥락과 무관하게 포함돼 있다. 영화는 취재 대상이 되는 인물의 활동 시기를 표식하는 인터 타이틀도, 2시간이 넘게 흐르는 보위의 수많은 노래들의 제목 한줄도 자막으로 넣지 않는다. 하다못해 영화는 보위가 이룬 성취나 업적에도 큰 관심이 없다. 그저 늘 여러 요소가 범벅으로 뒤섞였던, 뮤지션의 자아와 화가의 자아와 연기자의 자아가 멋대로 출몰하고 다양한 성적 지향을 오갔던, 수수께끼 그 자체인 보위를 인물 자체와 꼭 닮은 방식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문에이지 데이드림>을 관람하는 경험은 보위라는 완성된 지그소 퍼즐을 엎어 해제하는 과정인 동시에 조각 하나하나를 짜맞추며 보위를 재조립해가는 과정이다. 추측건대 양방향 모두 생전 보위가 대중이 자신을 소비해주길 원하는 방식이었을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