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성장한 동력은 무엇일까. 콘텐츠의 퀄리티? 다양성을 중시하는 시대적 흐름? 물론 이들 요인도 중요하지만 K팝을 위시한 K콘텐츠의 확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팬덤이다. 팬과 스타의 소통을 중요시하고, 좋아하는 연예인 관련 이슈는 물론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데까지 아우르는 집단행동에 적극적이며,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그들만의 밈을 만들어내 결속력을 다지는 풍경은 K팝이 내수 시장 중심으로 소비될 때부터 싹튼 문화다.
유튜브와 SNS의 성장으로 대형 방송국과 유통사를 끼지 않고도 해외 팬덤을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고부터는 팬 행동 양식도 함께 수출됐다.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위해 트위터에서 ‘해시태그 총공’을 한다거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아티스트의 음악을 틀어달라며 전략적으로 사연을 보내는 식의 행위가 전세계로 번지면서 미국 시장에서는 K팝 가수들의 충성도 높은 팬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팬 문화를 사업화할 수 있다면 어떨까. 방탄소년단이 소속된 하이브의 팬덤 플랫폼 위버스, SM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 디어유를 중심으로 한 팬덤 플랫폼 시장이 신성장 사업으로 주목받은 배경이 여기에 있다. 여기엔 IT 기술과의 밀접한 연계가 뒷받침된다. PC통신 동호회, 다음 카페, 허브 홈페이지 그리고 최근의 트위터까지 팬덤이 결집하는 공간은 계속 변해왔고, 팬 커뮤니티의 변천사는 IT의 발전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버스와 디어유는 IT 전문가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해 디지털 역량을 기르는 데 힘써왔다. 그리고 네이버와 다음이 검색 기능으로 유저들을 견인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는 대형 플랫폼이 된 것처럼, 이들은 플랫폼 안에서 다양한 팬 활동을 할 수 있게끔 유도한다. 스타와 함께 메신저 토크를 하는 것처럼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프라이빗 메시지 서비스, 실시간 댓글을 남길 수 있는 라이브 방송, 유료 멤버십 가입자에게만 공개되는 사진과 영상 등 플랫폼 전용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아예 콘서트 추첨 응모를 플랫폼 안에서만 받는다. 앨범부터 콘서트 DVD까지 아티스트와 관련된 물품을 이곳에서 구입하게끔 유도하기 위해 한국 앨범 판매량 집계에 반영된다는 점을 강조하거나 플랫폼 전용 굿즈를 특전으로 주기도 한다. 커뮤니티, 커머스, 콘텐츠, 공연을 아우르는 종합 플랫폼의 탄생이다.
자, 여기까지는 그들만의 이야기로 느껴질 수도 있다. 팬덤 플랫폼 산업은 K팝에서 시작돼 성장했고, 열성적인 K팝 팬덤은 언제나 존재했으며 관심 없는 사람들은 애써 귀 기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글로벌 이용자들의 유입이 매출을 키우면서 아예 산업 규모가 달라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위버스앱의 누적 다운로드 수는 6월 말 1억건을 돌파했고 월간 활성자 이용자 수(MAU)는 980만명에 이른다. 엔씨소프트의 유니버스를 인수하며 몸집이 커진 디어유는 SM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다. SM 소속뿐만 아니라 JYP엔터테인먼트, 스타쉽엔터테인먼트, IST엔터테인먼트 등 막강한 팬덤을 가진 K팝 아티스트들이 입점해 있다. 지난해 디어유의 프라이빗 메시지 서비스 버블에서 발생한 매출은 492억원, 이는 전체의 98%에 다다르는 수치다.
K팝에서 다른 엔터테인먼트 분야로 확장세
플랫폼 규모 자체가 커지면서 K팝 밖에서도 이 산업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배우 박보영은 배우 본인의 의지로 시작했던 네이버 V LIVE가 위버스로 인수되면서 자연스럽게 위버스 커뮤니티도 개설한 케이스로, 커뮤니티 가입자는 17만명이다. 박보영이 소속된 BH엔터테인먼트의 손석우 대표는 넷플릭스를 위시한 OTT의 성행이 전환점이 됐다고 전한다. “원래 배우들은 팬덤 규모 자체가 크지 않다. 아이돌 출신이 아니라면 국내 기준으로 팬미팅 2천석을 넘기기 힘들고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OTT 산업이 발전하면서 배우에게도 글로벌 팬덤이 형성되는 사례가 늘어났다. 과거 한류에 비해 국적과 연령대도 다양해졌다. 그에 따라 위버스나 디어유 버블 같은 플랫폼을 통해 팬덤의 수요가 커질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다.”
작품 출연료와 광고 혹은 팬미팅이 수익의 원천이었던 배우 매니지먼트사 입장에서는 수익 다변화를 고민하는 시대가 됐고, 글로벌 시장에서 사랑받은 콘텐츠들이 충성도 높은 팬덤을 형성한 뒤 시즌2, 3가 릴리즈되는 시점이 됐으며, 이들은 “K팝 시장에서 먼저 전략화된 팬덤 비즈니스가 배우쪽에서도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지켜보고”(손석우 대표) 있다. 디어유 버블에 입점한 배우 신예은이 소속된 엔피오엔터테인먼트의 박가을 매니지먼트 총괄은 “기존 배우들은 팬덤 형성에 시간이 좀 걸린다. 웹드라마 <에이틴>을 통해 아이돌형 팬덤이 형성된 신예은은 요즘 세대에 맞는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다른 K팝 아티스트만큼 높은 수익을 기대하며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일종의 ‘선공개’ 형식으로 소수 정예 팬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는 의미가 강했는데, 플랫폼 바깥으로 이슈가 확산되면서 긍정적인 화제성을 이끌어내는 풍경을 보고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틱톡,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등이 배우의 화제성과 연계되는 중요한 창구가 된 것처럼, 팬덤 플랫폼이 자리 잡아가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박가을 매니지먼트 총괄)
사업 초기부터 글로벌 시장에 주력한 팬덤 플랫폼은 해외 시장 공략이 필수적인 최근 K콘텐츠 시장에서 확실한 이점을 갖고 있다. 손석우 대표는 “K콘텐츠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사업은 웹툰과 팬덤 플랫폼”이라 분석하며 이 시장을 주시하고 있다. 다른 업계는 한국에 넷플릭스 같은 플랫폼이 없다는 것이 늘 지적되는 데 반해 웹툰과 팬덤은 한국이 플랫폼을 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버스의 경우 아예 이용자의 90%가 해외에 있다. 6월10일부터 11일까지 서울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과 88잔디마당에서 위버스 플랫폼에 입점한 아티스트들이 출연하는 <Weverse Con Festival> 현장에서 만난 글로벌 팬들의 목소리는 팬덤 플랫폼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20대 여성인 스칼렛, 애슐리, 로즈, 케이트, 리사는 엔하이픈과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공연을 보기 위해 10일 올림픽공원을 찾았다. 한국에 유학 왔다가 K팝을 좋아한다는 공통점 덕분에 친해지고 함께 티케팅을 했다는 그들은 위버스 없이 취미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전한다. 미국에서 온 스칼렛은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을 읽다 보면 같은 것을 두고 국가마다 팬들의 반응이 어떻게 다른지 즉각 비교할 수 있어서 흥미롭다. 좋아하는 남성 아티스트가 여성 댄서들과 페어 안무를 선보이는 것을 두고 우리는 멋진 퍼포먼스라고 생각했는데, 특히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정작 멤버들의 안무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격렬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이 부분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프랑스에서 온 로즈는 언어 접근성을 언급했다. “트위터에서는 아티스트의 글을 번역해주는 팬 계정을 통하지 않으면 콘텐츠를 즐기기가 어렵다. 그런데 위버스는 (사용 언어를 영어로 설정해두기만 하면) 처음부터 영어로 콘텐츠를 제공하고 나 같은 해외 국적 팬들이 한국에서 열리는 콘서트 티켓 추첨 신청을 하기도 수월해서 잘 이용하고 있다.”
더 나아가 팬덤 플랫폼 자체가 인터넷 문화에 익숙한 전세계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최근 SNS에서 화제가 됐던 하이브 소속 보이그룹 엔하이픈의 위버스 커뮤니티의 풍경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어떤 팬이 자신의 영어 숙제를 사진으로 찍어 글을 올리자 영어가 모국어인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팬이 친절히 댓글로 문제를 풀어주는 모습이 팬덤 플랫폼의 순기능(?)이라며 SNS에서 확산됐다. 유저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만큼이나 그외에 다양한 이야기를 이곳에서 나누고 싶어 하고, 피드를 내리다 보면 지금 이 시각 세계 각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다. “지금 중국 학생들은 수능을 치르고 있어”, “나는 미국에 사는데 오늘 <오펜하이머>를 봤어! 한국에서는 언제 개봉해?” 같은 글이 초 단위로 쏟아진다. 라이브 방송이나 프라이빗 메시지로 대표되는 팬과 스타의 ‘소통’에서 가장 많이 화제에 오르는 소재는 그들이 요즘 재미있게 본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이다. 지금 전세계 Z세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분석하고 싶은 업계 사람이라면 팬덤 플랫폼을 ‘눈팅’하는 것이 좋은 전략이 될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이것은 네이버나 다음 같은 국내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다양한 국가에서 온 수백만명에서 수천만명의 유저가 활동하는 플랫폼을 기반으로 다양한 콘텐츠 및 커머스 산업을 키우는 전략을 성공적으로 찾아낸다면, 어쩌면 이들의 목표는 네이버가 아닌 구글, 아마존이 될 수도 있다.
위버스와 디어유를 중심으로 팬덤 비즈니스의 성장 가능성이 증명되면서 후속 주자들도 각자의 영역에서 플랫폼을 키워가고 있다. 하정우와 황정민의 연기 클래스로 업계에서 화제를 모은 원더월은 지난해 말부터 김준수, 박지훈, 트리플S, SF9 등 다양한 K팝 아티스트들이 입점한 ‘프롬’(fromm) 서비스를 시작했다. 비마이프렌즈의 비스포크(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맞춤으로 생산하는 일) 플랫폼 빌더 비스테이지에는 유명 e스포츠팀 T1, 송은이·김숙, 오디션 프로그램 <팬텀싱어4> 등 다양한 분야의 크리에이터 및 브랜드가 입점해 있다. 아예 포토카드 교환과 같은 일부 팬 문화에 집중해 내실을 키워가는 중소 벤처 기업도 있다. K팝 아티스트들의 포토카드를 간편하게 매입하고 매수할 수 있도록 돕는 앱 ‘포카마켓’을 운영하는 인플루디오는 최근 총 33억원에 다다르는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글로벌 단위의 고민이 필요할 때
물론 한국에서 파생된 팬덤 문화에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팬덤간의 소모적인 신경전이나 집단적 사이버불링, 어린 연예인들이 감수해야 하는 감정노동은 꾸준히 비판의 대상이 됐다. 소통을 중요시하는 팬덤 플랫폼이 “내가 돈을 냈으니 그만큼의 권리를 스타에게 요구할 수 있다”는 식의 정신적 압박으로 번진다거나, “팬심을 이용해 장사를 한다”는 불만이 종종 터져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삼성전자 등 글로벌 브랜드 마케터로 오랜 경력을 쌓고 지금은 팬덤에 관한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인 박한나 비마이프렌즈 CMO(Cheif Marketing Officer)는 “팬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할 때 갈등이 생긴다. 팬들을 모아놓고 무작정 굿즈를 파는 식으로 접근하면 그 관계는 오래갈 수 없다. 팬덤 비즈니스는 팬과 함께 소통하며 무엇을 만들어갈 수 있을지 고민하며 접근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사실 K팝 산업은 회사의 장기 비전까지 분석하며 목소리를 내는 팬덤과 싸우고 갈등하고 달래고 수용하며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K드라마와 한국 영화산업 역시 까다로운 시청자의 니즈를 따라가며 질적, 양적으로 성장했다. 팬덤 플랫폼이 뿌리를 둔 K콘텐츠의 역사를 간과하지 않는다면, 이는 대중문화의 중심지 미국이나 막강한 노동력을 기반으로 성장 중인 중국, 인도만큼이나 한국이 우위를 점한 산업이 될 수 있다. 물론 그 고민이 글로벌 단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무거운 숙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K콘텐츠가 2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성장세를 보여준 것처럼, K콘텐츠의 성장을 이끈 팬덤 문화를 자양분으로 삼은 팬덤 플랫폼 역시 충분한 기대를 걸 만한 신성장 사업이다. 여전히 블루오션으로 보이는, 엔터테인먼트와 IT 산업 모두가 주시해야 할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