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조인성씨 액션 신은 류승완 감독쯤 되면 아무 기약 없이 현장 가서 바로 하나요?
류승완 왼손만 가지고도? (웃음) 농담이고요. 이번에 함께한 유상섭 무술감독님은 박 감독님 작품을 많이 하셨고 최동훈, 나홍진 감독님 작품의 무술감독도 많이 했던 분이에요. 근데 그분이 인터넷으로 공개한 제 데뷔작 <다찌마와 리>(2000)의 스턴트 더블이었어요.
박찬욱 아, 그 단편영화.
류승완 그러니까 저하고는 20년도 더 된 관계죠. 물론 액션 신을 촬영할 때마다 긴장은 되죠. 다칠 수 있으니까. 조인성 배우가 태권도 4단이라 사범증도 있고 태권도를 되게 잘해요. 근데 무릎이 안 좋아져서 <모가디슈> 끝나고 수술을 했죠.
박찬욱 <모가디슈> 때문에?
류승완 그건 아니고 사람이 너무 긴 게 안 좋습디다. 너무 기니까 무릎에 하중이 많이 가나봐요.
박찬욱 액션영화 전문가인 제삼자라면 이 영화의 액션 신을 보고 어떤 점이 특징이라고 말할 것 같아요?
류승완 일단 기본에 충실한 것.
박찬욱 뭐가 뭔지 다 알 수 있다는 거죠?
류승완 그렇죠. 동선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 이미지 라인의 규칙을 지키는 것, 그다음 타점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 요새 갈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선의 방향과 동선의 방향, 어떻게 움직여졌는지, 그리고 어떤 공간에서 액션이 벌어져서 작용하는 건지 명확하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빠른 컷 전환 혹은 사운드로 속이기보다, 정확하게요.
박찬욱 맞아요. 그래야 파워가 있어요.
류승완 그리고 액션과 유머를 동시에 가지고 갔어요. 또 긴장을 놓치지 않으려 한 점도 있어요. 조인성씨 액션 장면이 제가 많이 해왔던 걸 개선한 것이었다면, 후반부 수중 액션은 그런 규칙 안에서 해보지 않았던 시도였어요. 스킨스쿠버가 아니라면, 물속 깊은 바다를 실제로 보는 경험이 없잖아요. 시야가 얼마나 나오고 움직임에 있어 얼마만큼 자유가 있는지 대부분 모르는데, 물속에 들어가면 이런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걸 현실감 있게 보여주면서 그 안에서 재미를 찾으려고 했죠.
"어떻게 배우들이 물에 대한 공황과 공포를 극복했어요?"
박찬욱 스쿠버다이빙을 안 해봤을 텐데 수중 액션을 어떻게 설계했어요?
류승완 최근 몇년간 수영을 즐겨서 물속에서 제가 체감한 걸 기준으로 했어요. 지상에서 액션은 중력의 영향 때문에 상하 움직임에 한계가 있잖아요.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와이어를 쓸 수밖에 없죠. 후반부에서 춘자가 벌이는 액션 신은 몸이 떠 있는 상태에서 카메라도 돌아요. 스파이더맨처럼 붕 떠가서 도는데 그런 걸 찍고 싶었던 것 같아요. 물속이라면 그런 게 가능할 것 같았는데 되더라고요. 무술감독님과 수중발레팀이 물속에서 어떤 동선이 가능한지 프리프로덕션 때 테스트하면서 액션을 짰죠. 대표적인 예가 춘자와 진숙이 바닷속에서 크로스하는 장면인데, 한 사람은 위에서 내려오고 한 사람은 올라가다가 손을 당겨서 추진력을 얻죠.
박찬욱 두번 나오죠. 아래위 사람이 바뀌죠?
류승완 그렇죠. 아래위에서 잡아당겨주고 서로 위치가 바뀌는 거죠.
박찬욱 그 동작이 두 번째로 등장할 때 굉장히 큰 감동을 주죠.
류승완 그 장면이 원래 하이파이브였어요. 근데 수중발레팀이 실제 물속에서 쓰는 그런 테크닉이 있나봐요. 테스트 때 그 동작을 보고 너무 매력적이어서 아예 설정을 바꿨어요.
박찬욱 두 주인공의 우정이 백 마디 말보다 그 장면으로 잘 설명됐어요.
박찬욱 물속 액션을 위한 배우들의 훈련은 어땠어요?
류승완 우선 김혜수, 염정아 배우는 저희 사무실에서 만나서 티타임을 가졌는데….
박찬욱 한꺼번에?
류승완 네, 혼자 오라고 하면 안 올 것 같아서 “염정아 배우도 오신다는데요?”라고 말했어요. (웃음) 출연 결정 전이었고 대본만 드리면 까일 것 같아서 그랬는데 김혜수 배우가 “정아도 온대요?”라고 하더라고요.
박찬욱 결정도 안 했는데 다른 배우와 같이 만나는 건 조심스럽지 않나요?
류승완 얼마나 절박하면 그러겠어요. 정아씨한테도 “혜수 선배님이 오신다고 그러는데?”라고 말하니까 오시더라고요.
박찬욱 두분이 원래 친해요?
류승완 함께 연기하고 싶어 했고, 서로에 대한 존경심이 컸어요. 그렇게 회의실에 모여서 해녀와 바다 자료를 보여드리면서 준비가 제대로 돼 있다는 걸 어필했는데 김혜수 선배가 감동먹어서 굳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공황이 온 거예요, 이 사람이. 원래 물을 좋아하는데 <도둑들> 촬영으로 공황이 왔고, 우리 회의실에서 화면으로 물을 보니까 다시 증상이 나타난 거예요. 그런데도 티를 안 냈죠. 그 와중에 염정아 배우는 수영을 전혀 못하면서도 회의실에서 “너무 좋아요”라고 해놓고 집에 가서 김혜수 선배한테 전화로 “제가 사실은 물을 너무 무서워해서 세면대에 물 받아놓고 눈 뜨는 것부터 연습하려고요. 언니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라고 했다는 거예요.
박찬욱 어떻게 배우들이 공황과 공포를 극복했어요?
류승완 3개월 정도 훈련 기간이 있었어요. 김혜수 선배는 <소년심판>촬영으로 좀 늦게 합류했는데 처음 훈련 때 물에 못 들어가는 거예요. 물에 조금 들어갔다가 나오고, 조금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다가 옆에서 동료들이 “언니 최고예요!”라고 외치니까 어느 순간 둥둥둥 뜨더라고요. 배우들한테 고마운 게 초등학교 운동회처럼 한 배우가 촬영하러 물속으로 들어가면 “파이팅!”을 외쳤어요. 나중에는 촬영 중에 저도 배우들의 분위기에 말려서 오케이를 외치기도 했어요. (웃음) 배우들에게 너무 고마운 게 힘든 내색을 안 했고 현장 분위기가 진짜 좋았어요. 저도 이런 적은 처음이었어요. ‘이 현장이 안 끝났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재밌었어요.
박찬욱 김혜수, 염정아 두 배우들과는 어땠어요? 류 감독이 원래 두 사람과 친분이 있었어요?
류승완 <닥터 K>(1998) 연출부 시절 제가 인물 담당이었거든요. 그때 김혜수 선배가 소속사가 바뀐 지 얼마 안돼서 제가 스케줄 연락을 배우와 직접 했어요. 그때도 김혜수 선배는 스타였으니까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지금도 기억나는 건 밤 촬영이었는데 고개를 살짝 내린 김혜수 선배가 고개를 들고 눈을 크게 뜨는 모습을 모니터로 본 적 있거든요. 그땐 화질이 좋지도 않았는데 김혜수 선배가 눈을 크게 뜨니까 모니터가 밝아지는 거예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니까 팬이 기도 했고 어려운 존재였죠. 그렇게 배우와 연출부로 만났다가 감독이 되고 나서 다시 만났을 때 김혜수 선배가 반가워하셨던 기억이 나요. 근데 제가 <주먹이 운다> <짝패> 같은 영화를 하니까 선배와 같이 일할 기회가 없었죠. 이번에는 꼭 김혜수 선배와 같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흔쾌히 승낙해주셨어요. 정아씨의 경우, <장화, 홍련> <범죄의 재구성>에서의 연기를 좋아했고 예전부터 정아씨의 차가운 이미지를 좋아했어요. <밀수>에서 진숙이 감정을 잘 표현 안 하는데 제가 갖고 있던 염정아 배우의 느낌을 갖고 구상한 거죠. 근데 만나보니까 정아씨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인 거예요. 의외성까지 가지고 있으니 현장에서 정말 좋았죠.
배우들과 함께 만든 장면들
류승완 제가 잘 안 풀리던 장면이 두개 있었는데 3년 후 군천으로 돌아온 춘자가 진숙과 따귀를 주고받는 장면, 그리고 사건의 실체를 알고 난 뒤 두 사람이 조용히 다방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장면, 그 두 장면은 배우들하고 같이 쓴 거예요. 대본에 골조는 있었는데 따귀를 때리는 건 김혜수 선배가 낸 아이디어였어요. 노트북을 켜놓고 “두분 가지 말고 앉아보세요. 어떻게 하실래요?”라고 물으면 두 사람이 “이렇게 하는 게 어때요?”라면서 시연하고, 저는 “오, 좋은데요?” 혹은 “그건 좀 과하지 않을까요?”라고 답하는 방식이었어요.
박찬욱 일 참 쉽게 하시네! 시나리오를 배우들이!
류승완 감독님! 저도 얼마나 눈치를 보는지 아세요? 저는 배우들과 같이 얘기하는 게 좋더라고요.
박찬욱 그렇게 만드는 장면들이 좋아지죠. 언급한 두 번째 장면에서 너무 놀랐어요.
류승완 그 장면은 원래 블로킹이 복잡한 장면이었어요. 대화가 긴 장면을 어떻게 하면 지루하지 않게 찍을지 고민하다보면, 렌즈를 이상하게 쓰거나 카메라를 움직이거나 블로킹을 일부러 만들곤 하죠.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노트북을 켜놓고 의견을 나누는 시간에 배우들이 조용히 자기가 생각하는 것들을 이야기하는데, 그냥 이렇게 가면 되겠다 싶더라고요.
박찬욱 문제의 두 번째 장면에서 혜수씨가 “너 나 모르냐”라는 대사를 할 때 표정이나 말하는 방식이 너무 훌륭해서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전까지는 아슬아슬한 때도 있었거든요. 좀 지나친 연기가 아닌가. 물론 그것도 다 그 캐릭터가 연기하면서 지나치게 한 것이란 걸 알지만, 어쨌든 때론 ‘너무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방 장면을 보고 나니 ‘본래 춘자는 이런 사람인데 쇼 하느라 연기했던 거구나’를 깨닫게 되고 ‘힘들었겠다, 이 여자 인생. 저렇게 사느라고. 원래는 이런 사람인데…’ 싶더라고요. 그 콘트라스트에서 큰 감동이 왔어요. 김혜수 배우가 큰 그림을 그리고 연기했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류승완 김혜수 선배는 10대 때 성인 연기를 했고, 주말 코미디 드라마도 하고, 진지한 아트하우스 영화에도 나왔어요. 1980년대부터 그랬으니 인생에 얼마나 많은 굴곡이 있었겠어요. 어떻게 보면 이분이 영화 <밀수>에 애정을 가진 게 자기 인생을 대입한 부분이 있는 것 아니었나 싶어요. 순탄하게만 사는 사람은 없잖아요. 내가 의도치 않은 상황에도 맞닥뜨리고, 그 모든 것들을 상대하면서 가짜로 살아온 순간과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건 어떤 차이가 있는 건지…. 제작 당시 김혜수 선배가 가장 많이 했던 말 중 하나가 “우리는 진짜여야 된다”였어요. 영화를 완성하고 돌이켜보면 가짜인 순간조차도 가짜로 살아야만 하는 사람의 진심이 있었기 때문인 듯해요.
박찬욱 그렇지, 절박함이 있는 거지.
류승완 언젠가부터 인물의 일관성이란 게 과연 존재하나 하는 의심이 들어요. 인물의 성격을 규정짓고 설명하는 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배우가 합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배우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성격이 더해지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김혜수 선배가 만든 캐릭터는 온전히 김혜수라는 개인, 김혜수라는 배우가 창조해냈다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