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시 눈썹을 나도 그렇게까지는 못할 것 같은데”
박찬욱 영화 초반 춘자와 진숙이 밀수로 성공했을 때 옷을 사입는데 아랫도리와 윗도리를 바꿔 입잖아요.
류승완 옛날에 자매그룹 ‘바니걸스’가 그렇게 입었어요.
박찬욱 거기서 영감을 받은 거예요?
류승완 네, 그리고 의상팀이 저보다 어리니까 제가 좋아했던 당시 헤어스타일이나 김추자 선생이 무대에서 어떤 옷을 입었는지 보여줬죠. 남자 의상의 경우, 장도리(박정민)가 입은 끈으로 묶은 티셔츠는 브루스 리(이소룡)가 즐겨 입던 옷이니 만약 못 구하면 만들어서라도 입혀달라고 했어요. 권 상사(조인성)의 셔츠 칼라가 넓은 건 저희 아버지가 예전에 입었던 옷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랬으면 좋겠다고 말했죠.
박찬욱 하여간 바니걸스처럼 아래위 바꿔 입은 컨셉이 처음부터 나를 사로잡았어요. 이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가 한눈에 잘 보이더라고요.
류승완 감독님이 사로잡혔다고 하시는 게 참 저희 같은 대중영화 만드는 사람들한텐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습니다. (웃음) 감독님의 <헤어질 결심>과 겹치는 배우가 박정민, 고민시예요.(<헤어질 결심>에서 박정민은 해준(박해일)이 쫓는 용의자 산오 역을, 고민시는 서래(탕웨이)가 보는 드라마의 여주인공 역을 맡았다. -편집자) 박정민 배우의 몸을 일단 벌크업한 다음 근육 운동 무게를 점점 올려 근육을 키우고, 촬영 일주일 앞두고는 식단을 통해 근육을 쫙쫙 갈라지게 만들 계획이었어요. 근데 의상 피팅은 촬영 한참 전이잖아요. 피팅하러 왔는데 얘가 살크업돼서 너무 보기 싫은 거예요. “정민아, 고생이 많다. 네가 정말 연기자로서 부담되겠지만 이 모습으로 나와주면 안되겠니?” 그랬더니 정민이는 운동하는 게 힘드니까 “그래주시면 저야 좋죠”라는 거예요. 거기다 가발도 씌웠죠.
박찬욱 박정민이 고민시한테 윙크할 때 세상에! 영화에서 윙크하는 장면 많이 봤지만 사람을 안 보고 딴 데 보고 윙크하는 건 처음 봤고, 그나마도 가까운 쪽 눈으로 하지 않나요? 먼 쪽 눈으로 윙크하는 건 정말 처음 봤어요. 정말 전무후무한 윙크 장면인 것 같아요.
류승완 너무 사랑스럽죠. 고민시는 또 그 연기 안 받아주잖아요. 껌만 씹고.
박찬욱 고민시가 정말 잘했죠. 우리가 만약 70년대에 그 연기를 봤다면 정형화됐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지금 이런 식의 연기를 보니까 정말 신선하더라고요.
류승완 박 감독님 영화에서 제가 많은 영향을 받은 게 연기예요. 감독님은 문어체 대사를 배우가 과감하게 하도록 하시잖아요. 대본으로 볼 땐 상상이 안 가는데 영화에 어울려요. 헤어스타일도 마찬가진데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는 말할 것도 없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김병옥 선배가 단발머리로 나올 때를 보면…. 멀쩡한 배우 이상하게 만드는 건 전세계에서 코언 형제 다음이 박 감독님이에요. 의상도 과감하게 세팅하시잖아요. 항상 임계점을 벗어나시니까 나는 여기까지 가도 멀쩡하게 보일 수 있겠다.
박찬욱 고민시의 눈썹은 나도 그렇게까지는 못할 것 같던데! 한복 입고 배 타는 건 정말…. 왜 배 탈 때 고민시에게 한복을 입혔어요?
류승완 80년대에 아버지를 따라 찻집에 가면 한복 입은 분들이 있었던 기억이 나거든요. 그때 당시 노란 저고리에 파란 치마가 유행해서 그 색으로 구해다 입혔는데 배 위에서 너무 시선이 가서 바꿨죠. 눈썹은 ‘태평양’보다 더 오래된 화장품 브랜드 ‘쥬단학’의 자료를 보면 정소녀씨 눈썹이 그래요. 면도해서 눈썹을 그린 거더라고요. 배우로서 부담스러워할 수 있는데도 고민시 배우는 오히려 신기해했어요.
박찬욱 고민시 배우가 이 계장(김종수) 앞에 달려나와서 읍소할 때 역시 한복이 빛을 발해요. 사극에서 사또 앞에서 “이년을 죽여주시옵소서” 할 때 같아.
류승완 전 한복 입은 사람들이 멋있게 느껴져요. <박쥐>에서 좋았던 것 중 하나가 ‘행복한복집’이었거든요. 정창화 감독의 옛 무협영화에서 남자들이 하얀 도포 입은 모습도 멋있어요. 한복 입은 장면을 찍을 기회가 없으니까 틈만 나면 한복을 입혀요. <모가디슈> 초반 대사 부인(김소진)이 노란 한복을 입고 나오고 <부당거래> 요정 신에서도 한복 입은 여성들이 등장해요.
박찬욱 김종수 배우 얘기를 안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정말 재발견인 것 같아요. 영화와 TV에서 많이 봤지만 새삼스럽게 또 발견했어요.
류승완 김종수 선배가 1964년생이신데 신선해서 좋아요. 지역 극단에서 조용히 생활하고 발견되지 못할 수도 있었던 배우인데, <밀양>에서 기회를 얻고 독립영화와 주류영화 경력을 쌓다 요즘 빛을 보기 시작하셨잖아요.
박찬욱 <미생>에도 나왔죠?
류승완 <미생>에서 끝내줬죠. 이분이 원래 부산 분인데 호남 사투리도 구사하세요. 영호남 사투리가 섞이는 게 진짜 힘들잖아요. 언어 센스가 되게 좋으신 거죠.
박찬욱 영화에서 신사적이고 구수한 사람처럼 보이다가 차츰 본색을 드러낼 때 정말 놀라웠고, 모든 순간이 다 재치 있고 센스가 있어요. 그리고 옷을 입혀놔도 멋있고 클로즈업하면 정말 미남이더라고요.
류승완 마흔 넘어 첫 영화 연기를 했으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있었겠어요. 근데 그걸 다 저장해놓고 화가 아닌 에너지로 전환해 언제고 끄집어내 써먹을 수 있으시니까…. 첫날 첫 촬영 때 이분이 세관으로서 밀수꾼들 단속하는 장면을 찍었는데 리허설 중에 김종수 선배가 줄에 걸려 휘청하셨어요. 얻어걸린 거예요. 정말 좋아서 혹시 카메라를 돌렸냐고 물었죠. 롤은 돌렸는데 다른 연결이 안 맞아서 그 장면은 못 썼어요. 근데 배우도 아쉬워하더라고요. 비슷하게 맞춰 연기한 걸 썼는데 그 순간 연출자가 생각하는 것과 배우가 생각하는 것이 딱 맞는 지점이 빠르게 오는 분이구나 생각했죠.
박찬욱 하여튼 정말 김종수씨의 놀라운 발견이었어요. 류승완 감독의 영원한 후원자 김규현 교수(캘리포니아대학교 데이비스 역사학과 교수로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서 류 감독과 처음 만난 이후 우정을 이어오고 있으며 미국 학계에 류 감독의 영화를 소개한 인물이다. -편집자)가 미국에 이 영화를 이렇게 소개하고 싶다고 그랬잖아. “해녀들과 깡패들이 만났다. 그리고 상어도!”
류승완 해녀 VS 갱스터 VS 샤크!
박찬욱 김종수 배우 때문에 난 거기에 “해녀들과 깡패들과 상어가 만났다. 그리고 공무원!”이라고 덧붙이고 싶더라고.
긴 시간 이어진 두 감독의 연결점들
류승완 제가 일방적인 스토커였죠. 월간 영화잡지 <스크린> <로드쇼>에 박 감독님이 비평문을 기고하셨어요. 중고등학생 때 읽곤 했는데, 다른 비평문들은 어렵고 불란서 말도 많이 나왔고 언급한 영화를 구하기도 힘들었어요. 근데 박 감독님 비평문은 우리가 구해서 볼 수 있는 영화나 상영영화에 대한 글이었어요. 감독님의 기고문들이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고, 글을 보고 나서 영화를 보면 해석이 달라졌어요. 감독님의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을 보고 ‘내가 맞았어!’라고 생각했죠. 병원 복도 액션 신이 있거든요. 저는 액션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으니까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감독님에게 그 장면에 대해 말씀드렸더니 “복도 신 찍을 때 난 현장에 있지도 않았어”라고 하셨지만.
박찬욱 근데 왜 나를 찾아와? 난 액션영화에 별로 관심 없었는데.
류승완 감독님 영화에는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던 갱스터 분위기가 있었어요. <달은… 해가 꾸는 꿈>을 극장에서 못 보고 비디오로 계속 돌려봤거든요. 미국 B영화에서 볼 수 있는 이상한 동물 병원에서 치료하는 장면이나 감독님만의 이상한 대사들이 그렇게 좋았어요. 그러다가 제가 독립영화협의회 워크숍에서 한국 영화산업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해 찍을 때 인터뷰를 요청해서 감독님을 뵈었죠. 감독님이 <달은… 해가 꾸는 꿈>으로 데뷔하고 흥행이 안 돼서 다음 작품을 계속 준비하는데 안 풀릴 때였어요. 근데 제가 워낙 감독님의 팬이니까 계속 연락하고 따라다니고 제가 무언가를 만들면 보여드렸죠. 지금 생각하면 감독님이 진짜 귀찮았을 것 같아요. 그러다 감독님이 새 작품에 들어가신다고 해서 연출부 막내로 있다가 그 영화가 엎어지기도 하고 하여튼 굉장히 긴 시간이었어요. 1993~94년이니까.
박찬욱 지난 세기 일이지.
류승완 감독님이 머리 묶고 다니셨거든요. 되게 멋있으셨지 그때. 감독님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을 인터뷰하고. 항상 영화를 보고 얘기하시는 점도 좋았어요. 강남 양재동에서 시나리오 쓰실 때 감독님이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개봉관에서 못 보고 놓쳐서 강북의 먼 동시상영관에 전화해서 상영하냐고 묻고 보러 가신 일도 기억나요. 그리고 항상 지하철에서 책을 보셨고…. 감독님이 저한테 영향을 많이 미쳤어요. 저는 감독님이 아니었으면 장편 시나리오를 못 썼을 거예요. 감독님이 쓰시던 워드프로세서가 있었거든요. 전자 타자기인데 개인 PC를 쓰는 시대로 넘어오면서 감독님이 그걸 안 쓰자 저한테 물려주셨어요. 제가 그걸로 첫 장편 시나리오를 완성했어요.
박찬욱 난 또 무슨 예술적인 영향을 줬다는 줄 알았더니 기계 준 걸 얘기한 거야?
류승완 그게 제일 크죠!
박찬욱 맞아, 사실 그런 게 제일 크지. 나는 액션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사람이 왜 나를 찾아오나, 내가 도움이 안될 텐데 오랫동안 걱정했죠. 김성수 감독을 찾아가야 하는데…. 류승완 감독은 언제나 변함이 없는 사람이라는 게 제일 좋았어요. 아주 어렵던 시절도 있었고 일약 스타가 돼서 여성지에 인생 스토리가 실린 적도 있었어요. 도무지 영화감독이 스타가 되지 않던 시절에 그렇게 됐으니 변할 만도 한데 류 감독은 그러지 않았어요. 류 감독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노동자 이미지예요. 끝없이 노동하는 사람. 나도 좀 그렇긴 하지만. (웃음)
류승완 감독님이 진짜 성실하시죠.
박찬욱 계속하잖아, 작품을. 쉬지 않고 계속 쓰고 계속 찍는 게 참 감탄스럽습니다. 나도 지금 시리즈를 만들고 있는데 <동조자>란 미국 작품인데요. 일곱개나 되는 에피소드를 편집하려니까 아주 힘들어요. 게다가 시차가! 어떤 사람은 LA, 어떤 사람은 상파울루에 있어서 만날 시간을 잡는 것도 힘들고. 그다음에 <전, 란>이라는 작품을 프로듀스하고 있는데요. 제가 각본도 썼어요. 거기도 박정민이 나오네. 더위와 장마 때문에 애를 먹고 있죠. 제작비도 커서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류승완 액션영화 하고 싶은데 왜 찾아왔냐고 하셨지만, 제 안목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 한국 액션영화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장면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올드보이>의 복도 장면이고 거기서 무기인 장도리가 <밀수>에 영향을 줬어요. 근데 <올드보이>의 복도 장면은 제가 그 창작의 비밀을 알고 있는데, 귀찮아서 한컷으로 찍은 게 그렇게 될 줄이야! 저는 지금도 감독님 영화는 그 어떤 액션영화보다 격렬한 액션을 내포하고 있다고 봐요. <헤어질 결심> 마지막 신에서 파도와 싸우는 박해일의 모습은 그 어떤 액션영화보다 격렬하고 <박쥐> 엔딩에서 김옥빈이 차 밑에 들어가서 햇빛을 피하려고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건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못지않아요. 참고로 제가 <동조자> 촬영 첫날 공교롭게 LA 근교에 있어서 현장을 찾았을 때 김지용 촬영감독이 세팅한 걸 보고 ‘아, 역시 달라!’ 감탄했는데 앵글을 잡은 게 아니었더라고요! 카메라를 돌리데요?
박찬욱 그날 와서 나한테 한 말이라고는 “미국 현장에는 주머니에 손 넣고 다니는 애들이 많네요”. <밀수>에서 조인성이 박정민한테 주머니에 손 빼라고 한 게 다 그런 연결이었구먼.
류승완 그렇죠. 감독님께서 스토리보드를 중요시하는 분인데도 그 드라마는 여건상 스토리보드 없이 글 콘티로 하셨어요. 환경이 바뀌었을 때 어떤 것이 나올까 궁금해요. 제가 간 날, 주인공이 베트남어를 구사하는 장면을 찍고 있었는데 박 감독님이 “야, 영어는 그래도 어떻게 알아듣기라도 하겠는데 이건 어디가 오케이인지 모르겠다” 하시던데, 의도치 않게 박찬욱 감독님이 무성영화의 경지로 갈 수가 있겠구나!
박찬욱 아니야, 조금 해보니까 베트남어를 구사하는 컨설턴트나 나나 현장의 누구든 오케이는 오케이인 줄 알더라. 그냥 느껴져. 전혀 언어를 몰라도.
류승완 박씨가 적응이 빠른가봐요? 박정민 배우도 그렇고 감독님도 그렇고.
박찬욱 어휴 썰렁해! 이렇게 썰렁하게 마무리할 수가 없는데…. 류 감독 영화에 대해 꼭 얘기하고 싶은 건 허세가 없다는 거예요. 뭘 아는 척, 뭐가 있는 척 그런 게 없고 아주 순수하다는 거예요. 순수한 영화적인 즐거움, 쾌감 이런 것을 추구하는데, 그것이 우당탕 소동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순수한 시네마라는 것에 제일 가까운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류승완 저는 개인적으로 되게 영광스러운 자리였어요. 감독님께서 제 영화를 두번씩이나 보시고 꼼꼼히 질문을 준비하고 얘기를 나눠주셔서 감개무량합니다 진짜로. 가슴이 막 떨리네요.
<밀수>와 <서극의 칼>
조인성이 소화한 액션 신에서 박찬욱 감독이 인상적이라고 꼽은 순간은 검으로 나무 벽을 긁는 장면이다. ‘액션 키드’인 류승완 감독은 해당 장면에 대해 “<서극의 칼>을 좋아해서 오마주했다”라고 고백했다. 1995년 국내 개봉한 서극 감독의 액션영화 <서극의 칼>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한 외팔이 검객 정안(조문탁)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으로, 나무로 된 벽을 긁는 장면은 그가 한쪽 팔을 잃는 싸움 신에서 등장한다. <밀수>의 액션 신이 <서극의 칼>로부터 영향을 받았듯이 <서극의 칼> 역시 앞선 액션영화에 빚진 작품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장철 감독의 <외팔이 검객>(1969)을 리메이크한 영화가 <서극의 칼>이다.
고민시의 레퍼런스 <여자형사 마리>
얇은 눈썹에 새초롬한 표정의 고 마담은 한국 고전영화 속 여성 캐릭터가 다시 현현한 듯한 모습이다. 태어나기도 전의 여성상을 표현해야 했던 고민시는 류승완 감독에게 도움을 청했고, 류 감독은 1975년 개봉한 <여자형사 마리>를 젊은 배우에게 추천했다. <여자형사 마리>는 마약반 형사 치프(정세혁)의 애인인 주인공 마리(루비나)가 조직원들에게 납치당한 치프를 찾기 위해 경찰이 압수한 마약을 빼돌려 조직에 접근하는 내용의 영화이다. 고 마담의 눈썹이 마리의 눈썹과 상당히 닮았다. 김혜수 역시 고민시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고 마담이 한복을 입고 살랑살랑 걷는 걸음걸이는 김혜수가 직접 코치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