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처럼 달려나가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도입부에서 우선 화면의 리듬을 지배하는 것은 소년 소녀들의 잽싼 동작을 역동적으로 처리하는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 특유의 ‘달리는 리듬’이다. 2층 계단을 순식간에 뛰어올라 어머니의 병원에 불이 난 상황을 목격한 마히토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길로 전쟁의 포화로 물든 거리를 달음박질치는데, 만화적인 속도감과 불로 번지는 화면의 풍경은 비단 역사만이 아닌 어느 유년의 신화로 진입 중이란 사실을 생동감 있게 알린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첫 작품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부터 꾸준히 이어진 축지법에 가까운 빠른 달리기는 경쾌함과 슬픔을 동시에 견인하는 강력한 기술이자 미야자키 하야오의 활극이 시작됨을 알리는 일종의 주문이다.
조류의 향연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조류 캐릭터는 주로 변신 모티프와 함께 등장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하울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유바바로 이들은 새(까마귀)로 변해 날아간다. 반면 이번 신작은 왜가리, 펠-리컨, 거대 앵무새가 가히 습격이라 할 만한 물량 공세를 펼치는데, 이들은 생태주의에 천착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오랜 공상 속에서 자연스레 태동한 존재인 동시에 상공 위의 전쟁, 제국주의 아래 소진된 인간, 신경증적 공포 등이 점철된 저승 세계의 표상이기도 하다.
비행기의 딜레마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비행선은 줄곧 가장 미학적인 사물이자 작품의 모티프로 기능하곤 했다. <붉은 돼지> <천공의 성 라퓨타>로 대표되는 미야자키 하야오, 스튜디오 지브리의 비행기 사랑은 <바람이 분다>의 가미카제 특공대 제로센을 낳아 정치적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특히 많은 한국 관객들이 난색을 표했다. 감독은 <바람이 분다> 개봉 당시 “한 시대를 살아냈다고 해서 무조건 죄를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라고 말하며 한국 관객에게 가미카제 특공대 비행기가 불편하게 다가간 만큼 수많은 일장기가 추락하는 이미지로 이미 자국에서도 비판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말
“저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어린 시절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고 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애니메이터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가정환경부터 미야자키 하야오가 품었던 근원적인 슬픔과 염오까지, 모두 그 자신의 절절한 유년에 근거하고 있다.
“저는 이것이 생명 자체에 대한 모욕이라고 강하게 느낍니다.”2016년, AI로 만든 기괴한 게임 캐릭터를 보며 미야자키 하야오가 가한 신랄한 비판.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는 생명체를 표현함에 있어 판타지마저 최소화한 자연주의적 접근이 두드러진다.
“누구나 무의식 속 깊은 곳에 내재한 바다와 파도 치는 외재적 바다가 있다. 이것은 서로 통한다. 나는 직선을 없애고 싶다. 따스하지만 비뚤어져서 마법이 존재할 수 있고, 투시도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수평선조차 불거져 나와 뒤틀어지고 흔들리는 세계를 그리고 싶다.”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바다에 대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마히토는 죽음의 장소로서의 바다에 당도한 뒤, 곧 바다 위로 날아가는 와라와라들을 보며 그곳이 탄생의 배경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대들은 어떻게 마감할 것인가아마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이 될 확률이 클 것으로 보이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나온 시점에 그와 같은 거장에게 애니메이션 작업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묻게 된다. 결과물은 비범할지언정 미야자키 하야오에게도 작업의 고통은 끝까지 평등했다. <NHK 월드-일본>이 제작한 4부작 다큐멘터리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한 10년>(2019)에서 하야오는 하루 종일 아틀리에를 서성이면서 신음한다. 남다른 탁월함을 소유한 그가 마감을 앞두고 중얼거리는 말들은 제법 친근하다.
“뭔가를 먹어야겠어.”
“졸린다, 낮잠을 자야겠군.”
“집중이 안돼. 아직 리듬을 못 찾고 있어.”
“이빨 빠진 빗이 된 것 같구먼.”
“완전히 궁지에 몰렸다고.”
“난 일상에서 행복했던 적이 없어.”
“고통, 고통, 정말이지 고통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