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적이지 않다. 스토리가 불친절하고 난해하다. 지나치게 많은 상징과 의미들이 부담스럽다. 제목부터 가르치려 드는 것 같다. 1930년 일본의 군수업자를 배경으로 하여 태평양 전쟁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점이 불편하다. 남편이 아내 사후 처제와 결혼한다는 몇몇 설정이 낯설고 이상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쏟아지는 혹평과 아쉬움은 당연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 경험을 반영했다는 이번 작품은 지브리의 전작들과 비교한다면 지나치게 진지하고 딱딱한 면이 있다. 전개 과정에서 충분한 설득과 설명 없이 ‘이세계 허용’이라는 식으로 눙치고 지나가는 지점도 종종 눈에 띈다. 심지어 논리적인 전개보다는 의식의 흐름과 작가의 생각이 혼란스럽게 펼쳐지는 탓에 스토리의 개연성만 따진다면 지브리의 흑역사라 해도 좋을 <게드 전기>의 조각난 전개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일 정도다. 한마디로 너무 많은 정보가 흘러넘친 끝에 누구의, 어떤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진정 놀라야 할 지점은 감출 수 없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호평 역시 만만치 않게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높은 평가가 단지 스튜디오 지브리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광이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대중적인 결함과 스토리텔링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호소하여 마음을 움직이는 지점이 있다는 것.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본질을 탐색하고 싶다면 이야기 너머에 있는 무언가, 감정을 직접 형상화하는 애니메이션의 근원부터 살펴봐야 한다. 물론 이 또한 많은 에너지와 애정이 필요한 작업이다. 그러므로 대전제가 필요하다.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속으로 다가가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는가. 달리 말해 마음이 흔들리는가. 오프닝 대화재 시퀀스가 증명하듯 이 작품에는 보는 이를 압도하는 정념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이제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좋은 작품이란 영화 바깥의 정보에 기대지 않고 독립된 개별 작품 하나만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실패한 영화다. 정확히는 결연한 마음으로 실패를 향해 돌진하는 영화다. 이 작품은 미완의 질문, 그럼에도 질문을 멈출 수 없는 세월의 무게가 실린 미야자키 하야오의 집대성이다. 각자의 해석과 고찰을 통해 완성되길 기다리는 불완전한 세계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관객이 보고 싶은 것보다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걸 먼저 제시하는 불친절함에 발길을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를 또렷이 마주하고자 하는 장대하고 무모한 야심 앞에서 기꺼이 이 어지러운 결과물에 대한 변명을 대신 할 용의가 있다.
책에서 제목을 빌려와야 했던 이유
제목이 내용을 전부 담진 못한다. 이름은 설명이라기보다는 명명한 자의 소망에 가깝다. 어떤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갔으면 하고 바라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해도 좋겠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10년 만의 복귀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제목과 아무런 상관없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책을 원작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제목은 도리어 힘을 얻는다. 그만큼 강력한 의지와 소망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듯한 이 제목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펼쳐 보인 다소 난해하고 불친절한 미로를 탐색하기 위한 최적의 이정표다. 우리는 마땅히 질문해야 한다. 아무 상관이 없음에도 왜 굳이 이런 거창하고 교조적으로 보일 우려가 있는 제목이 필요했는지에 대한 변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표면적으로 이러한 제목이 붙은 이유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선물받은 책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작품 속에서도 마히토(산토키 소마)가 어머니에게서 받은 이 책을 정리하는 장면이 짧게 등장한다. 소년 미야자키의 가치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요시노 겐자부로의 책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소년 코페르의 성장과 방황을 담은 고전이다. 10개의 꼭지마다 소년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불합리에 대해 질문하고 외삼촌의 댓글 같은 답변이 이어진다. 예컨대 나폴레옹은 영웅인지 독재자인지, 훌륭한 사람과 훌륭해 보이는 사람은 어떻게 다른지 등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탐색하는 질문을 통해 세계의 고통과 모순을 직시하도록 사색의 기회를 부여한다. ‘나’라고 하는 송곳으로 세계에 균열을 내는 법을 일러주는 이 책에는 당대 일본 소년들이 군국주의의 악의로부터 자신을 지키기를 소망했던 작가의 염원이 담겨 있다. 미야자키 역시 그 염원의 씨앗을 받아 자신만의 색으로 세계를 향해 질문을 던져 마침내 피어난 한 봉오리의 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몇 가지 키워드가 있다. 그의 근간에는 전쟁을 반대하고 권력을 혐오하는 아나키스트적인 기질이 있다. 자연을 사랑하는 생태주의, 전설과 민담에 매료된 애니미즘 등의 특색은 이런 자유로운 사상을 근간으로 꽃피운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컨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제목은 인간 미야자키 하야오의 시작점이자 아직도 멈추지 않는 질문이다. 여전히 확신할 수 없기에 다시금 붓을 들어 또 한번 외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몇 가지 단호한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 안에 답이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답이 있는 척 위장하여 쉽게 옳고 그름, 흑과 백을 단언한다. 훌륭함이란 자신의 입으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되돌아오는 메아리와도 같다. 그런 의미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필연적으로 모호해야만 한다. 질문을 던지되 답을 내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작품은 질문을 던지지도 않는다. 질문 자체가 답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 영화 속의 유일한 질문은 오직 제목에만 허락된다. 정작 본편에 들어가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와는 전혀 거리가 먼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본편의 장대한 이야기는 어쩌면 질문을 탄생시키기 위한 과정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소년 마히토의 모험을 함께 겪은 관객만이 끝에서 이렇게 자문할 수 있다. (현실)세계로 돌아온 나는 어떻게,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
하야오와 지브리의 연대기 위에 놓인 현실과 이세계
어느 날 사람의 말을 하는 왜가리가 나타나 마히토에게 말을 건다. 왜가리 남자(스다 마사키)는 마히토의 엄마가 아직 살아 있다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한다. 마히토는 처음엔 거부하는 듯하지만 마치 왜가리에게 매혹된 듯 대응한다. 왜가리의 깃털로 화살을 만들고 왜가리가 찾아오길 기다리는 마히토는 왜가리가 안내해줄 세계를 기다린 것처럼 보인다. 이윽고 임신 중인 나츠코가 사라지자 왜가리는 자신이 어디로 갔는지 알려주겠다며 저택 뒤에 있는 오래된 탑으로 향한다. 마히토와 왜가리는 우여곡절 끝에 탑을 통해 이세계로 함께 떨어진다. 마히토가 속한 현실 세계와는 전혀 다른 법칙으로 돌아가는 이세계에선 이해하기 힘든 일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소년 마히토는 마치 예정된 일인 양 크게 놀라는 일 없이 담담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난해하고 불친절하다고 느껴진다면 상당 부분은 마히토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소년 마히토는 펠리컨과 앵무새들이 자신을 공격하고 잡아먹으려 해도 딱히 리액션을 하지 않는다. 마히토는 마치 관찰자(혹은 관객)처럼 세계를 유람한다.
이세계를 여행했다가 돌아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류의 서사는 로드 무비와 성장 서사, 그리고 판타지적인 상상력이 합쳐진 결과물이다. 여기서 판타지는 은유와 상징으로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다시 말해 이세계가 무엇을 은유하고 있는지가 핵심 포인트라는 말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현실 세계와 탑 속 세계가 명확히 구분된다. 현실 세계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린 시절이 기억의 편린처럼 녹아들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삼촌은 항공기 회사 사장이었고 아버지는 공장장이었다. 그런 미야자키의 손에 요시노 겐자부로의 책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어머니의 손을 거쳐 쥐어진 것도 의미심장한 일이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살짝 비켜난 미야자키는 역설적으로 전쟁의 그림자를 누구보다 세밀하게 또는 뒤틀린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인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속 마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어린 학생들만 있는데 이는 지극히 현실 반영적인 묘사 중 하나다.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운 비정상적인 세계의 모순을 어린 미야자키는 온몸으로 체험하며 창작의 자양분으로 삼은 것이다. 어린 미야자키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속 마히토처럼 그걸 제대로 분출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해하는 등 뒤틀린 방식으로 표출했다.
현실을 견디기 힘들었던 마히토는 탑이라는 이세계에서 돌파구를 찾는다. 어쩌면 마히토가 탑으로 향하는 건 새어머니 나츠코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의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택한 도피일지도 모르겠다. 탑이 상징하는 바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직관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스튜디오 지브리로 상징되는 애니메이션 업계가 아닐까 싶다.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는 인터뷰를 통해 마히토가 미야자키 하야오, 왜가리 남자가 자기 자신, 탑의 큰할아버지가 하야오의 친구이자 스승이기도 했던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을 모델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게 대입하면 은유는 명료해진다. 탑은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온 운석을 둘러싸기 위해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다. 오늘날의 스튜디오 지브리가 있기까지 여러 스탭들이 몸을 던졌고 크고 작은 부침이 있었다. 잔혹하고 냉정한 해석을 한다면 수많은 펠리컨들은 꿈을 좇아왔지만 끝내 안식처를 찾지 못한 창작자들처럼 보인다. 이 잔혹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한 큰할아버지는 완벽하게 보이는 세계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지만 결국 허물어져가는 걸 돌이키기 불가능한 일임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를 이어받길 바랐던 소년에게 말한다. 너는 나가서 너의 세계를 펼치라고.
이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에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라는 문구가 쓰인 문이 있다. 이는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미야자키의 경고처럼 보인다. 탑 안에는 죽음을 기다리며 떠도는 왜가리들이 있고, 식욕에 먹혀 포화 상태에 시달리는 앵무잉꼬들이 있다. 이것이 자신의 길을 제대로 찾아 걷지 못한 창작자들의 말로다. 포기하고 좌절하거나 적당히 다른 것을 흉내내어 그럴싸해 보이는 작품을 양산해 배만 불리거나. 미야자키는 다음 세대에게 자신을 그대로 배우고 모방하지 말고 넘어서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탑 안의 세계는 시간이 정지한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이다. 불의 소녀 히미는 히미코의 과거가 탑 안의 세계에 남겨진 모습이다. 히미는 자신이 언젠가 불에 타버릴 운명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불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아들이 될 마히토를 축복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스튜디오 지브리라는 자신의 과거이자 소년 마히토의 미래를 탐방하고 돌아온다. 큰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세계를 창조하는 대신 원래 세계로 돌아가 왜가리 같은 친구들과 함께 살겠다는 미야자키의 바람은 이뤄졌을까. 아니면 이건 지금 자신에게 건네는 각오일까.
알 수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자는 현실 세계의 마히토는 물론 탑 세계의 큰할아버지와도 겹쳐 보인다. 시간이 뒤섞인 탑 안은 미야자키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이기도 하다. 두 세계를 넘어 확실히 전달되는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한 애틋한 마음이다. 증오와 악의가 넘쳐나는 세계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자신을 확인하고 지키는 것 정도다. 세계를 의심하며 자신의 길을 가는 것. 그런 의미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의심하는 행위를 통해 자아를 지켜온 한 인간이 마침내 되돌아간 근본이자 도착점이다. 한 사람은 하나의 세계다. 하나의 세계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외부로부터의 충격과 고통, 이른바 부조리에 저항하다 보면 저절로 껍질이 단단해진다. 그러므로 세계란 언제나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 존재한다. 만약 완성된 세계가 있다면 그건 죽은 세계, 멈춘 세계일 것이다. <그대들은어떻게 살 것인가>가 완성된 세계관에 대한 완벽한 묘사가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간절한 질문이자 당부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필요한 건 완벽한 세계가 아니다. 불완전하기에 서로 상처주고 상처받으며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완벽에 다다르지 못해 더 간절한 미완의 아름다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스튜디오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과거를 은유한다면 이 영화의 서사는 필연적으로 불친절하고 헐거울 수밖에 없다. 지브리의 작품은 완벽하다는 찬사를 받아왔지만 그 완벽에 다다르는 과정은 언제나 불완전한 모험과 실패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환상과 상상으로 은유한다는 건 애초에 차분한 설명이나 설득과는 거리가 멀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담긴 건 여전히 격렬히 불타고 있는 마음, 전해야 할 말이 넘쳐 자신의 근본으로 되돌아간 한 창작자의 근심이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근심의 형태는 서사가 아닌 그림으로 표출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글보다 그림, 시나리오보다 콘티로 먼저 상상하는 창작자이다. 말과 이야기로 내용을 설명하기 이전에 작화와 이미지가 먼저 당도하는 종류의 사람, 시각적 언어인이라 해도 좋겠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압도적인 작화는 때때로 감정의 형태를 그대로 담아 전한다.
오프닝에서 소년의 모든 것이었던 어머니를 불사르는 불은 위험하면서도 아름답다. 이후 어머니의 과거이자 불을 사랑하는 탑의 소녀 히미까지 연결하면 예술에 대한 꺼지지 않는 열정과 슬픔마저 승화시킨 진심을 반영한다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과 서사가 없더라도 그 장면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아름답고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벅찬 감정에 휩싸이게 하는 마력이 있다. 손으로 그린 작화이기에 가능한 감정이라고 단언하진 않겠다. 분명한 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이야기나 상징, 의미보다 감정이 먼저 형상화되는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감정과 정서를 응축한 그림의 연쇄. 애초에 애니메이션의 본질은 거기에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두고 ‘미술관의 영화’라는 극찬이 쏟아진 건 우연이 아니다. 물, 불, 바람을 아우르는 지브리의 곡선의 공통점은 모두 ‘흘러넘친다’는 데 있다. 심지어 빵에 바르는 잼, 물고기의 내장 묘사까지도 부드럽게 흘러넘치는 세계. 미야자키 하야오가 바라보는 세계는 그러하다. 세계가 아무리 나를 위협해도 마땅히 부드럽게 받아넘길 수 있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시선.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애니메이션을 향한 애정이, 다음 세대를 향한 응원과 걱정이, 아직도 할 말이 흘러넘쳐 자신이 지나온 길을 되짚어보며 근본으로 돌아간 거장의 현재다. 설사 이 불친절하고 고집스런 방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보는 이를 압도하는 부드러운 곡선의 미학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