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말이 존재하던 시절부터 존재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구비문학(설화, 민요, 민속극 등이 모두 포함)은 이야기하기, 즉 스토리텔링의 최초 형태였다. 새삼스럽게 스토리텔링이 대중문화 산업에서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디지털 미디어가 매체 환경을 바꾸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최혜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문화 콘텐츠, 스토리텔링을 만나다>에서 이야기하는 현재의 상황과 화자-청중의 상호작용을 강조하기 위해 스토리텔링의 개념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기존의 스토리가 텍스트 중심으로 전달됐다면 온라인 게임과 스마트폰 등 상호작용이 가능한 다양한 매체가 등장한 이후 이야기는 역동적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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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고 폭발적인 버즈량과 행동력을 보여주는 곳이다. 이곳의 스토리 산업은 실시간으로 달리는 댓글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반년 전에 요즘 트렌드에 걸맞다며 기획했던 아이템이 세상에 공개될 땐 ‘질린다’는 혹평을 받을 수 있다는 리스크를 떠안고 굴러가고 있다. 더군다나 스토리는 더이상 영화와 드라마, 소설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니다. 웹툰과 웹소설은 다양한 트랜스미디어로 확장될 수 있는 무궁한 가능성을 가진 스토리 IP의 원천이며, 비디오게임은 몰입도 높은 스토리와 시네마틱한 연출을 도입해 매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으며, 신한류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K팝 산업은 앨범은 물론 아티스트의 IP를 활용한 웹툰, 게임 등에 자체적인 세계관을 동시다발적으로 녹여내고 있다. 드라마 업계 역시 글로벌 OTT 플랫폼의 성황과 함께 전세계 시청자의 취향을 전제한 기획과 시즌제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시장이 원하는 스토리가 바뀌고 있다면 만드는 방식 또한 바뀌어야 한다. 콘텐츠 산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이야기는 더이상 한명의 창작자가 고유의 창의성을 발휘해 만들어내는 영역이 아니다. 덱스터픽쳐스와 더그림엔터테인먼트의 공동 IP 프로젝트 <체탐자>의 제작 풍경은 최근 웹툰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체탐자>의 프로듀서를 맡고 있는 해태는 “옛날에는 작가 한명이 스토리와 그림작업을 도맡았다면 <체탐자>만 해도 기획과 스토리를 맡는 사람만 2명이다. 여기에 콘티 작가, 채색 작가, 배경 작가 등이 따로 있다”고 설명한다. 독자들은 더 좋은 퀄리티의 연출과 스토리, 채색을 바라고 이는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주 1회 연재라도 각 파트가 일주일 단위로 돌아가기 때문에 기술적인 퀄리티는 올라간다. <체탐자>의 제작 총괄 겸 스토리를 맡고 있는 병장 작가는 “이야기 면에서나 비주얼 면에서는 처음 기획 단계에서 혼자 그렸던 것 이상의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을 팀 작업의 이점으로 꼽았다. 다만 여러 사람의 의견을 조율하다 보면 작업 기간이 늘어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각기 다른 경험을 가진 팀원들이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면서 현재 트렌드에 맞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해태) 것은 물론 독자들의 댓글에 따라 캐릭터의 분량과 전개 방향도 달라질 수 있다. 한편 웹툰 제작이 시스템화됨에 따라 노동의 대가를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변화다. <체탐자> 배경 작가를 맡고 있는 신귤은 “회사 단위에서 팀 단위로 작업하다 보면 작업자가 한 일이 기록으로 남는다는 확실한 차이가 있다”며 집단창작이 창작자 개개인의 경력을 인정받는 데에는 훨씬 이롭다는 점을 언급했다.
‘스토리텔링’이 문화 콘텐츠 산업의 핵심 키워드로 떠오르기 전부터 게임 산업의 중요한 화두는 ‘세계관’이었다. 백민정 스마일게이트 IP 사업총괄 상무는 “세계관이 오래전부터 게임계에서 중요했던 이유는 게임이 글로벌 콘텐츠라는 점과 관련 있다. 언어 장벽이 없는 콘텐츠기 때문에 이전부터 해외 진출이 용이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MMORPG(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의 경우 탄탄한 서사 구축이 필수적이다. 대부분의 시청자와 독자들이 작품 내 세계관에 관심을 두다보니, 간단한 게임도 캐릭터 설정과 스토리를 잘 갖춘 채 개발에 들어간다.”
K팝의 경우 아예 대형 소속사에서 오리지널 스토리를 전담하는 팀을 만들기도 한다. ‘화양연화’ 세계관으로 팬덤의 몰입도를 높였던 방탄소년단을 키워낸 하이브(당시는 빅히트뮤직)는 아예 아이돌 그룹 기획 단계부터 팀의 아이덴티티와 방향성을 놓고 오리지널 스토리를 함께 고민한다. 물론 산업의 특성상 곡, 뮤직비디오 등 가수의 활동을 구성하는 요소들과 면밀한 소통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고 싶은 이야기의 큰 줄기를 정해놓고 각 앨범에 따라 반영할 수 있는 메시지나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매칭한다. 그렇지만 특정한 프로세스를 정해놓고 진행하진 않는다. 앨범 활동의 경우 철저하게 총괄 프로듀서의 의사 결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결정에 따라 앨범과 곡 기획을 먼저 하고, 그다음에 아티스트 활동과의 연결성, 컨셉 포토, 뮤직비디오 기획이 이뤄진다. 앨범마다 오리지널 스토리가 전면에 드러나거나 다소 뒤로 빠지기도 한다.” (황보상우 하이브 스토리사업본부 사업대표)
영역을 넘나들며 융합되는 스토리
흥미로운 것은 영화·드라마·웹툰·게임 등이 모두 ‘콘텐츠’라는 카테고리로 묶이는 시대에 이들의 스토리텔링이 영역을 넘나들며 융합되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CJ ENM의 신인 창작자 발굴, 육성 프로그램 오펜 소속 작가들은 이미 웹툰과 웹소설, K팝, 게임 등 다양한 분야와 협업하고 있다. 예진해 CJ ENM 영화드라마사업본부 IP개발센터 오펜사업팀 담당은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웹툰, 게임 제작사에서 파워 IP와 작가들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다. 기존 영화·드라마 작가들과 협업하거나 스토리 작가를 직접 영입하기도 한다. 원래 하던 영역을 고집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스토리텔러로서 직업을 확장해 다양한 집필 기회를 얻어가는 분들도 있다”고 최근 업계의 풍경을 전해줬다. 작가의 범주가 스토리텔러로 확장되면서 아예 채용 단계에서 타 매체로 확장성 있는 크리에이터를 발굴하기도 한다. 안형수 더그림엔터테인먼트 이사는 글 작가를 뽑을 때 웹툰 관련 경력만을 보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웹소설, 시나리오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한 이력도 괜찮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몰입감이나 센스, 기획의 신선함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집단창작도 결국 신선한 아이템을 내기 위한 수단이다. 창의적인 사람들이 의논하는 과정에서 낯선 이야기가 나온다.” 아예 영상화를 목표로 웹툰이나 웹소설을 쓰는 작가들도 있다. <체탐자>의 병장 작가는 “주변 대부분의 작가들이 영상에 어울리는 스토리 구조와 장르를 의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판권이 팔려도 실제 제작되는 비율은 10%가 되지않지만, 그 작품이 잘됐을 때 작가의 네임밸류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만화는 영상을 닮아가고 영상은 게임을 닮아가는 흐름 속에서 서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스토리들이 시장의 선택을 받는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한편 K팝 분야에서는 휴먼 IP에서 시작된 스토리를 놀이공원까지 확장하는 시도도 있었다. 이는 21세기 스토리텔링의 개념이 화자와 청중의 상호작용에 따라 확대됐다는 점을 고려할 때 유의미하다. ‘뱀파이어’라는 소재로 음악과 웹툰을 아우르는 세계관을 구축한 보이 그룹 엔하이픈은 최근 오프라인 행사 <다크 문 위드 엔하이픈 인 롯데월드>를 성공시켰다(글로벌 팬덤이 강한 그룹의 장점에 힘입어 롯데월드 역시 올해 9월, 지난해 동기 대비 세배 이상 해외 입장객이 늘어나는 등 시너지 효과를 보았다). 황보상우 하이브 스토리사업본부 사업대표는 “IP가 단단해지려면 다양한 접점이 필요하다. 온오프라인을 넘어 오리지널 스토리가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팬들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그것을 통해 스토리 경험의 시작을 여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금의 팬덤과 독자, 관객은 핸드폰이나 모니터 앞에서 ‘보는’ 경험만을 원하지 않는다.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온갖 감각적인 경험이 콘텐츠를 즐기는 중요한 방법이다.”
다만 스토리 산업의 지각변동이 상업적 성공의 의미를 넘어 내적 텍스트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는 좀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체탐자>의 병장 작가는 “작품에 대한 피드백이 즉각적이다 보니 오히려 비슷한 장르, 즉 양산형 작품이 쏟아지기도 한다”는 점을 언급했다. 예상을 벗어나는 전개에 거부감을 드러내고 독자들의 취향에 맞춰 이미 검증된 공식을 따르다 보면 오히려 신선한 작품이 나오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회의를 할 때 가장 많이 나누는 대화가 이거다. ‘회귀를 시켜야 하나?’ (웃음) 양산형이 생기는 이유는 누가 뭐라 해도 사람들이 많이 보기 때문이다. 양산형이라며 부정적인 댓글을 다는 사람 외에 아는 맛을 찾겠다며 조용히 찾아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다. 상업적으로 높은 수익을 내는 게 목표다 보니 익숙한 트렌드를 배제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지겹다고 느껴지는 결과물을 내놓아서는 안된다. 현재 대중이 어느 정도까지 와 있는지 타이밍을 재서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동시에 산업이 커짐에 따라 필연적으로 구축된 시스템은 창작의 결과물이 가진 리스크나 자칫 간과할 수 있는 가치를 검토할 수 있는 제동 장치가 되기도 한다. 백민정 스마일게이트 IP 사업총괄 상무는 지난해 CDIO(Chief Diversity Inclusion Officer, 다양성·포용 최고 책임자)로 임명된 뒤 다양성 가치를 게임 기획 단계부터 실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고민하고 있다. “긴 다리와 잘록한 허리, 풍성한 금발 머리 특징을 가진 바비 인형은 많은 비판을 받은 바 있다. 2016년 마텔은 학계와 대중의 비판을 받아들여 다양성을 반영한 바비 인형을 제작했고 인종, 장애, 퀴어 불문하고 다양한 모습을 한 캐릭터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후 2022년 마텔은 바비 브랜드로만 14억9천만달러의 매출을 기록했고, 이는 2017년 대비 56% 늘어난 수치다. 스마일게이트는 연 1회 부서별 D&I 챔피언을 지정한다. 다양한 의견을 청취해 게임은 물론 조직 문화 개선에 반영하려고 한다.”
공동 창작자들의 크레딧을 보장한다는 것
그리고 영화가 있다. 디지털 혁명 이후 트랜스미디어가 기본값이 되는 동안 한국영화계가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시나리오작가가 제대로 된 크레딧을 보장받지 못하는 오래된 실정이 이제야 수면 위에 드러나는 상황에서 한국영화계는 새로운 스토리텔러의 유입보다는 유출을 우려하고 있다. 예진해 CJ ENM 오펜사업팀 담당은 감독과 작가의 역할과 경계를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언급했다. “감독이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기존 관행이 있다. 동시에 시나리오작가도 필요하다. 자기가 한 만큼 크레딧을 보장받을 수 있는 구조가 아직 한국에는 미비하다. 영화계가 좀더 근본적인 고민을 해야 할 시기가 아닐까.” 추석 연휴 개봉 영화가 OTT 신작과 화제성을 놓고 경쟁하고 틱톡이나 인스타그램 릴스, 유튜브 쇼츠가 트렌드의 중심이 된 지금, 영화는 영화여야만 하는 이유를 놓지 않으면서 소비자와 달라진 상호작용을 고려한 스토리텔링을 고민해야 한다. 집단창작과 크로스오버, IP 비즈니스 등 현재 다른 업계에서 떠오른 화두가 반드시 영화계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최근 한국영화의 위기가 스토리의 그것과 분리될 수 없는 상황에서 영화계가 지금과 다른 길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