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폐막 당일, 수상자 인터뷰를 기다리며 밀면을 먹던 중이었다. 느닷없이 다음 출장 명령이 떨어졌다. “사우디아라비아 좀 다녀와라!” 본지 디지털콘텐츠본부 김성훈 본부장이 부산, 전주마냥 사우디를 말하니 실감이 날 리가. 냉수로 목을 축이며 거듭 되묻고서야 알아차렸다. <씨네21>이 당장 두달도 채 남지 않은 제3회 레드씨국제영화제(이하 레드씨영화제)의 프레스 초청 명단에 올랐음을. 그 시점부터 엄지는 틈날 때마다 사우디만을 검색했다. ‘여성의 히잡 착용은 필수인가요?’(외국인을 대상으로는 복장 규범이 완화돼 필수라고 할 순 없다.) ‘리얄 환전은 어디서 하나요?’(현지에서 달러를 리얄로 환전할 수는 있으나 대부분의 상점에서 카드 결제가 가능하다.) 8년 전 수능 아랍어를 공부해놓고 모든 걸 포맷해버린 나를 탓하며, 여행 유튜버들의 브이로그부터 각종 영문기사까지 훑었다. 나름의 준비를 갖추고 킹 압둘아지즈 국제공항에 착륙하자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가 부산을 꺾고 2030 엑스포 개최지로 확정됐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문화 강국을 향하여
리야드가 엑스포 유치에 성공한 날 제다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도착했다는 우연. 실은 준비된 우연에 가깝다. 두 이벤트는 2016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심은 ‘비전 2030’의 씨앗이 싹튼 결과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석유 의존도 감축을 핵심 목표 삼아 경제 부흥의 새 엔진을 가동하려는 이 프로젝트의 표층에는 자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재건하겠다는 의지가 자리한다. 네옴(NEOM) 시티 건설, 여성 인권 증진 등의 굵직한 테마들 사이로 관광 및 영화산업을 키워보자는 요구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사우디에 영화관이 다시 들어선 해가 2018년. 종교적 이유로 상업적 목적의 영화 상영을 금지해온 지 35년 만이라고 한다.
스크린이 펼쳐졌다면 그에 걸릴 작품도 필요한 법. 레드씨영화제의 취지도 거기에 있다. 2018년 사우디의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돼 현재까지 재임 중인 바데르 빈 압둘라 빈 파르한 알 사우드 장관은 자국 영화 제작·배급·교육을 뒷받침하고자 비영리 단체 레드씨영화재단(Red Sea Film Foundation)을 설립, 영화제 운영을 재단의 한축으로 삼고 있다. 재단을 이끄는 CEO 무함마드 알 터키는 할리우드에서의프로듀서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제 또한 지휘하고 있다. 재단 CEO가 영화제 집행위원장 역할을 겸한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일례로 그는 개·폐막식을 포함한 여러 행사마다 등장해 세계 영화인의 관심을 독려했다.
한편 영화제 기간 중에는 재단의 또 다른 주요 과제인 레드씨펀드·랩·수크(마켓)의 홍보 및 진행이 이뤄진다. 그중에서도 아랍과 아프리카 영화제작지원을 위해 총 1400만달러, 프로젝트당 최대 50만달러를 투자하는 레드씨펀드의 존재감을 짚고 싶다. 펀드는 제작 단계에 따라 총 네 부문으로 나눠 응모작을 받는다. CEO 알 터키가 개막식에서 자랑했듯, 규모에 걸맞은 성과가 속속 나오는 중이다. 올해 칸에만 <포 도터스> <인샬라 어 보이> 등 일곱편의 펀드 수상작이 진출했고, 이번 영화제에서 매진 세례를 거둔 상업영화 <만둡>도 펀드의 수혜자였다. 레드씨펀드는 중동·북아프리카(MENA) 문화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사우디의 자신감을 대변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영화진흥위원회와 유사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우디영화위원회(Saudi Film Commission)의 파격 전략을 언급해야 한다. 이들은 일명 ‘필름 사우디’ 정책을 내걸어 사우디를 촬영지로 삼거나, 그 역사·문화를 다루거나, 사우디 인력을 고용해 작품을 만드는 제작사에 제작비의 최대 40%를 환급해주고 있다. 사우디의 첫 번째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알룰라를 배경 삼은 작품을 지원하는 에이전시 필름 알룰라처럼, 왕실·정부 산하 기관들이 필름 사우디를 위해 뛰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제다를 찾은 한국 관계자들도 위원회와 만남을 가졌다는 후문. 한국영화에서 광활한 사막을, 아랍 세계의 한 단면을 감상하는 일이 머지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랍영화의 색채를 찾아서
홍해 일대가 국가 차원의 공격적 투자 계획을 발표하는 쇼케이스 같다는 인상을 받을 무렵, 77개국 126편의 영화를 제다에 불러들인 프로그래머들과의 대화가 주의를 환기했다. 레드씨영화제 프로그램팀은 아랍팀과 국제팀 둘로 나뉜다. 아랍 프로그램 디렉터 앙트완 칼리프는 “사우디 산업을 돕는 것뿐 아니라 배급사들을 도와 세계영화를 확보하고, 이들이 사우디 관객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 것”에도 의미를 두고 있다며 내 눈을 맞췄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아랍영화의 색채는 무엇인지 물었다. “코로나19 이후 가족, 부모와의 관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영화인들을 많이 발견했다. 영화 선정에 있어 프로그래머들의 최우선 기준은 작품의 창의성이고, 우리가 선택한 모든 영화는 검열 없이 상영된다. 매우 자랑스러운 점이다.” 국제팀에서 아시아영화를 검토해온 김영우 프로그래머가 덧붙였다. “지난해 초청작인 <조이랜드> <아줌마> 같은 작품만 봐도 퀴어 소재를 품고 있다. 영화제가 사우디에서 볼 수 있는 영화의 폭을 넓히고 있다.” 그는 고전영화 섹션 ‘레드씨 트레저’, 할리우드부터 앞선 영화제의 화제작을 포괄하는 경향 등을 들어 “아랍영화사를 복원하는 작업과 영화계의 메인 스테이지가 되려는 움직임”을 동시에 펼치는 방향성 또한 부각했다.
프로그래머들이 강조한 레드씨영화제의 ‘다양성’은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작품을 적극적으로 아우르는 태도에서도 수긍할 수 있었다. 제다행 비행기를 타기 전 경쟁부문 후보작 17편의 면면을 살피다 놀란 기억이 떠올랐다. ‘명예살인’ 비극을 극화한 <디어 제시>, 생리를 시작한 10대를 비춘 <호랑이 소녀>, 아랍 여성 인권의 현실을 역설하는 <달마> <불꽃 속으로> <인샬라 어 보이> 등이 또렷이 빛났다. 개막식에서 여성 영화인들을 가리켜 당신들이 세상을 바꾼다며 “유 고 걸”(You go girl!)을 외친 사회자, 세계 여성 영화인을 한데 모은 한밤의 파티 등이 레드씨영화제의 모토를 재확인시킨 것은 물론이다.
괄목할 만한 흐름을 타고 영화제를 항해하는 동안 젊은 사우디 영화인들을 목도한 것도 즐거웠다. “영화인은 있었지만 영화산업이 없었다”라는 사우디영화위원회 관계자의 말처럼, 유튜브에서 활동하던 감독, TV드라마에 집중하던 배우, 혹은 영화를 꿈으로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이들이 “팬데믹 이후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영화산업”이라는 비현실적 문구를 실현하고 있었다. 포럼에 패널로 참석한 서우식 바른손C&C 대표, 김유진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콘텐트 담당의 발언에 귀 기울이면서 세계 시장에서 영향력을 높여온 한국을 롤모델로 삼고 있다며 질문하던 이들의 눈빛도 각인되었다. 그들과 마주한 시간을 다음 장부터 기록해뒀다. 이 파도를 함께 타본 한국 영화인들의 현장감 넘치는 코멘트도 같이 봐주길 바란다.
가자지구 향한 염려… 비판 에두른 레드씨영화제의 행보는
영화제를 향한 비판 여론, 존재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축제를 지속하느냐고 묻는 대중의 목소리를 온라인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레드씨영화재단은 그들이 정치적 이슈에서 한발 떨어져 ‘비영리’로 예술가들을 돕고 있다는 입장을 관철했다. 그래도 팔레스타인영화 <더 티처>를 초청, 출연배우인 팔레스타인 출신 배우 무함마드 아베드 엘 라만을 ‘내일의 아랍 스타’ 4인 중 1인으로 지목한 곳이 레드씨영화제이기도 하다. <더 티처>는 심사위원상, 남자배우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