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한 IP를 제대로 구현하는 노하우와 기본기를 충실하게 쌓았다, 유재명 스튜디오 미르 대표
2024-01-05
글 : 김경수 (객원기자)
사진 : 최성열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을 둘러싼 대중의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다. 한국 애니메이션에는 디즈니나 드림웍스, 지브리 같은 오리지널 IP가 없고, 미국과 일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하청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스튜디오 미르를 설립하고 13년째 운영하는 유재명 대표의 생각은 다르다.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선입견을 부수고 싶다”는 그의 굳건한 선언처럼 그는 한국 시장에 남아 있는 희망을 찾아내기 위해 분투한다. 애니메이션 감독 출신인 유재명 대표는 니켈로디언의 애니메이션 <아바타: 아앙의 전설>로 2007년 미국 최고의 애니메이션상인 애니 어워즈에서 캐릭터 애니메이션 부문 감독상을 수상한 K애니메이션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가 설립한 스튜디오 미르는 <아바타: 아앙의 전설>의 속편 <레전드 오브 코라>를 시작으로 넷플릭스 시리즈 <도타: 용의 피> <위쳐: 늑대의 악몽> 등을 제작하며 많은 해외 팬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 애니메이션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그에게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 전반에 대한 진단과 그 안에서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는 스튜디오 미르의 생존 전략을 들어보았다.

- <아바타: 아앙의 전설> 감독 출신으로 스튜디오 미르를 운영 중이다.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독자적인 제작사를 차리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 사실 원대한 포부를 품고 차린 것은 아니다. 전도유망한 애니메이터에게 기본적인 생존권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회사를 설립할 당시만 해도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 현장이 열악했다. 많은 애니메이션 유망주가 턱없이 적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꿈과 열정 하나만으로 일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들이 열심히 일한 만큼 임금을 받는 인간적인 환경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첫 제작 작품 <레전드 오브 코라> 이후로 넷플릭스, 드림웍스, 워너브러더스, 라이엇게임즈 등 수많은 해외 제작사의 러브콜을 받는 중이다. 문화권도 영향권도 다른 해외의 스튜디오에 피력할 수 있던 스튜디오 미르만의 개성과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유연성이다. 우리는 장르를 가리지 않으며 어떤 작품을 의뢰받든 원하는 작품을 잘 제작한다.

- 스튜디오 미르를 설립할 당시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에 기여하고 싶은 목표는 무엇이었나.

=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에 대한 여러 선입견, 그 가운데에서도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은 곧 하청이라는 부정적인 프레임을 부수고 싶다. 하청 구조는 영화나 드라마 등 다른 콘텐츠에서도 흔하다. 그러나 한국의 애니메이션을 이야기할 때만 하청 구조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이는 경향이 있다. 이 선입견이 한 콘텐츠의 가치를 IP의 소유 여부로 판가름하는 시선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지브리와 같은 메가 IP를 소유하고 있느냐 아니냐에만 초점을 두니까 한국 애니메이션이 독자적인 IP를 생산하지 못하는 하청 산업이라는 부정적인 프레임이 생긴 듯하다. 메가 IP가 있어도 그것이 곧바로 수익으로 직결된다는 보장이 없는데도 말이다.

- 지금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이 겪고 있는 난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동시에 그럼에도 한국 애니메이션이 가능성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인력 누수가 가장 큰 문제다. 육성된 애니메이션 인재 중 절반가량이 해외로 떠나가고, 그나마 남은 인재마저 대부분 게임 업계로 건너갔다.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이 미개척지에 가까우므로 이제 막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제야 넷플릭스나 디즈니+ 등 대형 OTT의 투자로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했고 산업 전반에 활기가 도는 중이다. 재능 있는 아티스트가 편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또한 많은 애니메이션 창작자가 새로운 시도를 할 갈망이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이러한 상황에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서 고유한 개성을 이어가려면 나름대로 생존 전략이 필요할 텐데, 스튜디오 미르만의 생존 전략은 무엇인가.

= 한 IP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노하우와 기본기, 즉 체력이 중요했다. 체력이 탄탄하게 다져지자 자연스레 업계에서도 작품을 믿고 의뢰할 수 있다는 신뢰가 생기기 시작했다. 최근 디즈니+에서 제작한 <스타워즈 비전스> 시즌2는 우리가 시나리오와 기획까지 전담했다. 이런 성공적인 제작 경험이 더해질수록 앞으로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독자적인 IP 개발은 그다음 일이라고 생각한다. 당장은 체력을 기르는 일에 집중하는 중이다.

- 2023년의 극장점유율 해외영화 1, 2, 3위가 모두 애니메이션이다. 반면 한국 애니메이션은 해외 애니메이션과 달리 내수 시장에서 약세를 보인다. 이제 내수 시장을 공략할 의향이 있는가.

= 당연히 있다. 지금까지 다져온 체력을 바탕으로 한국도 애니메이션을 잘 만들 수 있다는 신호탄을 쏘아올리고 싶다. 우리나라에는 웹툰이나 게임 등 애니메이션화할 수 있는 IP가 가득하다. 앞으로 여러 대기업과 협력해 한국 IP로 작품을 제작하고자 한다. 우리도 이제는 극장에 걸 만한 장편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으니 관객에게 봐달라고 말하고 싶다.

-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넥스트 제너레이션이 없다는 전망도 있다. 스튜디오 미르는 미래의 유망주 발굴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가.

= 아카데미를 운영한 적 있다. 1기 당시에는 회사에서 일하는 모든 감독이 3개월 동안 무료로 애니메이터 지망생을 가르쳤다. 아카데미를 수료한 학생 대부분이 애니메이션 산업에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회사 운영에 차질이 생겨서 아쉬움을 안고 아카데미 운영을 포기했다. 도저히 유망주 육성을 포기할 수 없어서 지금은 여러 대학교와 산학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