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특집] 진은영 시인의 '10년 동안'
2024-04-16
글 : 진은영 (시인)
다큐멘터리 <초현실> 스틸컷

10년 동안 / 진은영

 

그녀는 왜 술을 마시지

슬픈 하늘에서

궁전 지붕 모양의 빗방울이 떨어지는 걸 보려고

 

그녀는 왜 눈을 감지

어디엔가 흐릿한 분홍빛 젖은 회랑이 이어진다

그 아래 너와 오래 서 있고 싶어

 

그녀는 왜 달을 보지

달은 망각을 끌어당겼다 놓아준다

파란 바다의 출렁이는 해일 사이에서

 

구조를 기다리듯

솟아오르는 네 얼굴


 
 

시작 노트

세월호 참사 희생자 학생의 엄마 P를 만난 후 쓴 시다. 우리는 두 시간 정도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그녀는 내게 술을 마신다고 말한 적이 없다. 혹여 술을 마시고 싶어도 그럴 짬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 직장에 나가고 저녁에는 희생자 유가족이 모이는 기도회나 모임에 참석하고 남은 시간 틈틈이 집안일을 한다고 했다. 한 희생자 학생의 아빠는 즐기던 담배와 술을 끊었다고 한다. 아이가 생전에 자기 소원은 아빠가 술, 담배를 안 하는 거라고 해서였다.

그런데도 왜 시의 첫줄이 술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슬픈 사람은 술을 찾는다고 오랫동안 믿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장 그르니에는 <일상적인 삶>에서 포도주가 삶에 주는 의미에 대해 말한다. 이 술은 인간이라는 애련한 불운아에게, 지치고 헐벗은 채 앓고 있는 그 존재에게 삶의 진홍빛 기쁨을 되돌려준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상실한 이가 맛볼 수 있는, 그에게 남겨진 삶의 기쁨은 무엇일까. 잃어버린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 속에 다시 잠기는 일일 것이다. P는 아이에 대해 말할 때마다 환하게 웃었다. 아이가 아주 꼬마였을 때 수저통을 쏟은 적이 있는데,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하나하나 다 주워 담고 나서야 울음을 터뜨리는 침착하고 고집 있는 아이였다며 웃었다. 엄마가 새 지갑을 사놓고 마음에 안 들어 하니까 그럼 자기가 쓰겠다며 가져간 착하고 무던하고 알뜰한 아이였다며 좋아했다. 돌아온 물건들 속에 그 촌스러운 지갑이 있어서 예쁜 걸 사줄 걸 하는 후회가 가슴을 쳤다고 했다.

10년 동안 누군가는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며, 다른 누군가는 연극 대본을 외우며, 또는 다큐멘터리 영상 필름을 매만지며 예술의 취기 속에서 아이와 만났다. 신앙심이 깊은 P는 예배를 드리며 기도 속에서 아이와 만난다고, 또 아이와 함께 세상을 바꾸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녀가 무언가 마시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 것은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초기 기독교에서 포도주와 빵을 함께 나누는 성찬식을 뜻했던 아가페(Agape, 애찬愛餐)는 향유(香油)를 몸에 부어 정화하던 구약 시대의 예배 의식이 바뀐 것이었다. 예배는 몸과 마음이 허기진 이들이 식탁에 함께 모여 앉아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누는 사랑의 식사가 되었다. P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 식탁의 이미지가 내 안으로 스며들었나 보다. 그녀는 “언니들(다른 희생자 아이의 엄마들)이 너무 좋아요. 우리 언니들 보러 오세요”라고 여러 번 말했다. 그들은 같이 예배를 보고 합창과 연극을 하고 나무나 필름을 자르고 싸움도 하면서 슬픔의 핏줄로 이어진 자매가 되었다.

정신의학자들에 따르면 가까운 사람을 잃고 비애를 겪는 이들은 ‘파도’ 현상을 경험한다고 한다. 비애가 발작처럼 닥쳐와서 걸을 기운도 없고 눈앞이 깜깜해지고 일상이 지워져버리는 것이 큰 파도에 휩쓸리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파도처럼 계속 되돌아오는 고통 속에서도 아이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P를 가장 가까이서 붙든 것은 같은 슬픔을 가진 언니들의 손이었다고 한다. 언제나 피해자들이 피해자들을 가장 열심히 돕는다.

핏빛의 포도주는 슬픔을 가라앉히는 취기와 삶을 변화시키는 신비를 함께 가져온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 말이다. P는 언니들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하며 고통을 견디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모든 것이 위로로 끝나길 원치 않는다. 그녀는 세월호 가족들의 활동을 통해 공동체의 삶을 새롭게 만드는 신비가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했다. 가족들이 열심히 싸우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중요한 과정의 일부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10년 동안 몸조차 가눌 수 없는 파도에 맞서면서도 세월호 가족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향해야 할지 정확히 배웠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그들이 불행을 겪은 이들이고 우리가 선량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승선한 배의 물 새는 구멍으로 그들이 가장 먼저 달려가, 물이 들어온다고,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