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특수효과의 메카 ILM을 가다 [4] - 미국 특수효과업계의 현황
2002-06-14
글 : 김경덕 (특수효과 감독)
패왕은 없다, CG의 춘추전국시대

미국의 특수효과업계는 생존경쟁의 시대로 돌입했다. 현재 미국 내에서 단기적으로 일자리를 잃은 3D 인력은 수천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1500∼2천여명의 인력을 거느린 매머드급 3D 제작사들이 1차, 2차에 나누어 많은 인력을 방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외로 많은 대형 작품들이 빠져 나가고 있는 추세라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다. 실제 <반지의 제왕>의 경우 제작이 대부분 뉴질랜드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로 디즈니에서 일하던 실력있는 3D 제작진들이 비행기를 탔으며, 그 밖에도 많은 인재들이 자리를 털고 새 일터로 향하고 있다. ILM의 경우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600명의 인력들을 1차 방출한 뒤 얼마 전 또 700명을 방출했고, 조지 루카스도 자리를 옮겨 독립적인 R&D(Research&Development)회사를 구상중이라는 설이 있어 여러모로 변화를 겪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여러 가지 현상을 동반하는데, 한 가지는 실력있는 소수의 정예들이 뭉쳐 영화제작의 현장으로 뛰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디즈니의 시크리트랩(The Secret Lab)에서 활약하던 제작진들 중 일부가 회사를 나오면서 약 2천만달러 규모의 예산으로 독자적인 회사를 설립했다. 아직 장비세팅 단계라지만 이미 큰 협력업체를 뒤에 업고 모 영화의 특수효과 작업을 따낸 이들은 모든 과정을 자체 제작할 거란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오래 전 미국 특수효과 산업 초창기에 있었던 현상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의 배후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많은 3D 인력들이 동일하게 느끼는 한 가지는 불안하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일하는 것도 선호하지만, 어딘가 적을 두지 못하고 떠돌아야 하는 것이 만족스러울 리 없다. 다수의 3D 인력들은 1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동안 특수효과업체에 고용됐다가 작품이 끝나고 다른 작품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방출되는 형편이다. 작업에 따라 많은 인력을 끌어들였다가 그 뒷감당을 하지 못해 재정상태가 악화되는 회사들도 늘고 있다. <다이 하드> <에이리언3> <스피시즈> 등의 특수효과를 담당했던 보스 스튜디오를 비롯한 몇몇 회사들이 그같은 과정을 거치며 문을 닫다시피 했다. 따라서 좀더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자리를 잡아가기 위한 몸부림으로 소수의 정예로 이루어진 회사들이 생겨나고 있다.

더구나 대규모의 장비를 싸게 빌려주는 회사들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편리한 소프트웨어를 갖추고 이같은 고객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실제 많은 장비와 공간을 보유하지 않아도 대규모의 작업을 소화해낼 수 있는 조건이 맞아떨어지고 있다. 이제는 세계 어디에 있든지 작업에는 별 상관이 없다. 어디서나 랩톱 하나만 있으면 고객들에게 자신의 작업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또 수정하면서 바로 다시 렌더팜(renderpalm)이란 장비를 이용해 그림을 만들어 그 자리에서 결론에 이르는 회전이 바로바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처럼 인력을 마음대로 내보내고 다시 쓰고 하는 추세가 지속된다면 이른 시간 내에 더 좋은 작업 환경을 만들어주는 제3국으로 할리우드의 인력과 기술이 빠져나가는 현상이 가속화될 것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도 높다. 캐나다나 뉴질랜드, 또는 유럽의 특수효과 회사들은 이러한 빈 틈을 잘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상대적으로 단가가 싸기 때문에 해외에서 제작되는 영화가 늘어난 데다가, 특수효과 인력에 대한 대우가 할리우드보다 안정적이기 때문에 작품과 함께 고급 인력이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기술도 이전되고 있는 실정이다. 어느 한 회사가 기술을 독점하고 있다거나 유지하는 것도 이제 더이상 효력이 없는 얘기다.

결론적으로 미국 내 컴퓨터그래픽 회사들은 이제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고 있고, 기술적인 측면도 많이 분산되고 방출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단 한 가지 독보적인 기술이 있다면 연출의 탁월함뿐이다. 얼마 전 개봉했던 3D애니메이션 <아이스 에이지>는 그것을 잘 보여준 영화였다. 3D애니메이션은 보통 애니메이션이 지니고 있는 유연함이나 과장 그리고 부드러운 연출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런 문제점을 잘 간파한 블루 스카이에서는 비교적 그 모든 단점들을 잘 보완한 영화를 선보인 셈이다.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인정받고 있는 픽사나 PDI 역시 단편을 통해 연출력과 기술의 문무를 겸비한 회사다. 기계가 만드는 식상함을 잘 보완해줄 수 있는 연출력. 그것은 이 시장이 오래 보존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며 또 한 회사의 독창성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기술 자체만으로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일반인들도 알고 있다. 그 사실을 빨리 깨닫는 회사만이 앞으로의 경쟁에서 깃발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