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녀가 몇년에 걸쳐 같은 공간을 거닐다 헤어지는 조각들을 담은 <미망>은 심심하게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엔 많은 차이들이 숨겨져 있다. 날씨, 건물, 의상, 대화 등 미세한 차이는 일상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닌 매일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생동의 시간임을 증명한다. 첫 장편 데뷔작 <미망>이 한국경쟁에 올라 전주영화제를 찾은 김태양 감독은 거리의 영화를 찍은 연출자답게 이미 전주 곳곳을 부지런히 산책하며 일상의 신비를 수집하고 있었다.
김태양 감독에 따르면 그림 배우러 다니는 남자(하성국)가 여름 한낮의 종로 한복판에서 아는 여자(이명하)와 우연히 만나 잠시 길을 걷는 <미망>의 1막은 그와 이명하 배우의 실제 경험담이다. 몇년 뒤 여자가 극장 관계자인 남자(박봉준)와 함께 그림 배우던 남자와 거닐었던 그길을 다시 걷는 2막, 어느새 화가가 된 남자가 지인의 장례식에서 여자와 재회한 뒤 서울의 밤거리를 배회하는 3막까지 찍는 데 4년이 걸렸다. 김태양 감독이 제작비 문제에 코로나까지 터져 촬영이 길어지는 어려운 상황을 잘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시작한 건 반드시 완성하겠다는 원칙”을 흔들림 없이 고수해서다. 주 공간인 종로에서의 거리 촬영에서 즉흥이란 없었다. “비가 올 경우와 안 올 경우에 대비해 시나리오를 여러 버전으로 준비했고 정확한 앵글까지 생각해서 콘티 작업을 했다. 배우들과 동선 대로 걸어보는 리허설도 다 해본 뒤” 순서대로 찍었고, “출연 허가를 받기 위해 카메라에 잡히는 가게 주인들에게 일일이 양해를 구하고 행인들에게 매번 촬영 공지를 하는” 지난한 시간도 거쳤다. 구체적이고 생생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그만큼 밑그림을 세세하게 그렸다. 사랑의 결실이란 결정적 사건이 아닌 그저 만났다가 헤어지는 소소한 순간에 주목한 까닭은 김태양 감독이 “사소하고 별것 아닌 것에 끌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라질 리 없는 함께 했던 시간, 나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의 어느한 부분에 내가 묻어 있다고 생각하면 애틋해지는 마음”이 그에겐 소중하고 특별하다. 서울의 오래된 동네를 영화에 붙들어놓은 결과물을 봤을 땐 서울 토박이인가 싶지만 김태양 감독은 지리산 출신이다. “<비열한 거리>에서의 영화감독(남궁민)이 근사해 보여” 서울로 가 영화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경복궁으로 서울스러움”을 배운 그에게 서울은 “정감 있고 다채로운 공간이자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많은 역사가 혼재된” 언제나 흥미로운 주제다. 그래서 내년 촬영이 목표인 장편 차기작 역시 서울이 테마다. “이혼한 <미망>의 두 남녀가 주요하게 등장한다. 이들의 이혼을 말리려고 시골에서 올라온 할머니의 서울 탐험기가 될 것 같다. 올해에는 <나만 아는 춤>이라는 단편 작업을 할 예정이다. 현대무용을 오래 배우고 춤공연장에서 조감독을 할 만큼 춤을 좋아해서이 경험들과 동경의 마음을 작품에 녹여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