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칸영화제 특집] 영미권 영화 강세 이어가다, 제77회 칸영화제 결산 - 숀 베이커의 <아노라> 황금종려상 수상
2024-06-01
글 : 임수연

이변 없는 결과였다. 제77회 칸영화제는 <스크린 데일리> 등 유력 매체의 별점 평가와 큰 괴리 없이 영화제 기간 화제작들에 골고루 상이 돌아갔다. 2014년에 제인 캠피언에 이어 칸영화제 역사상 두 번째, 미국 여성감독 중에서는 최초로 심사위원장이 된 그레타 거윅의 영향으로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거나 여성감독이 연출한 작품이 힘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도 대체로 맞아떨어졌다.

<아노라>의 가능성과 안전한 선택들

“이 황금종려상은 세상의 모든 성 노동자를 위한 것이다. 나의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편견을 없애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아노라>가 사람들이 성 노동자를 보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돕기를 바란다.”(숀 베이커의 수상 소감) 황금종려상을 받은 숀 베이커의 <아노라>는 (오드리 헵번이 콜걸 역이었다는 것을 아예 사람들이 까먹은 듯한)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나 (줄리아 로버츠를 단숨에 스타로 만든) <귀여운 여인>이 다루지 않았던 성 노동자의 계급 문제를 현실적으로 파고든다.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아노라(마이키 매디슨)가 계급 사다리를 극복할 수 있다는 신데렐라 판타지를 믿었다가 빠져나오는 낙차를 스크루볼코미디의 문법으로 유쾌하면서 씁쓸하게 풀어냈다. 그레타 거윅은 “에른스트 루비치와 하워드 호크스의 구조를 가진 고전적인 영화”가 “진실되고 예상치 못한” 매력을 보여줬다며 심사의 변을 전했다.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빛으로 상상하는 모든 것>은 카스트제도와 종교 문제가 잔재하는 인도 사회에서의 여성의 삶을 담았고, 각본상을 받은 <더 서브스턴스>는 여성에게 더욱 가혹하게 작용하는 에이지즘의 공포를 심은 보디 호러다. 모하마드 라술로프 감독은 여자배우에게 히잡을 씌우지 않고 영화를 찍었다는 혐의로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극적으로 이란을 탈출하고 칸영화제에 입성했다. 그가 연출한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특별각본상을 받았다. 아버지의 총을 훔치며 그의 권위에 반기를 든 두딸과 어머니가 가부장 권력에 맞서는 이야기다. 감독상은 고유의 영화미학을 개척하는 시네아스트에게 수여한다는 본질에 충실했다. 포르투갈 출신 미겔 고메스 감독이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제작한 <그랜드 투어>는 동남아시아에서 출발해 세계 각국을 돌며 찍은 영상을 흑백과 컬러, 로케이션 헌팅 당시 찍은 영상과 원격 촬영 등을 병행해 20세기 초 대영제국 공무원의 이야기를 완성했다.

올해 칸영화제는 최근 프랑스문화계를 휩쓴 미투(#Metoo) 폭로의 여파에 어떻게든 답을 보여줘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개막 직전에는 “이번 경쟁부문 상영작 제작진 중 가해자가 있으며 최종 라인업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위기관리팀이 이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루머에 대해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해당 팀은 영화에 관한, 미학적 또는 예술적 측면에서의 자격을 따진다”며 “선정위원회를 가이드하는 이데올로기는 없다. 칸영화제에서 정치는 스크린을 통해 행해져야 한다”고 해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칸영화제는 예술을 통해 그들이 젠더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입장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는 여성과 남성, 페미니즘과 반페미니즘을 나누는 이분법적 프리즘에서만 유효하다. 올해 경쟁부문 상영작 22편 중 여성감독의 연출작은 단 4편이며, 아시아 여성은 한명뿐이다. 이같은 구성으로 인종이나 성별 구성 면에서 다양성을 확보했다는 식으로 자부하는 태도는 여전히 서구 중심적인 시각에 머물러 있는 칸의 한계를 보여준다. <에밀리아 페레즈>에서 성전환수술을 받은 멕시코 갱단 두목을 연기한 실제 트랜스젠더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은 올해 여우주연상 유력 후보로 꼽혔지만, 심사위원단은 조이 살다나, 설리나 고메즈 등 할리우드 스타를 포함한 여성배우 모두에게 상을 주며 지극히 안전한 길을 택했다.

한편 배급사 네온이 칸영화제를 시작으로 내년 오스카 레이스까지 홍보 전략을 짜고 있을 <아노라>가 황금종려상의 영광을 차지한 것 역시 최근 영미권 영화가 강세인 칸영화제의 경향을 이어간다. 칸영화제 상영작이 곧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에도 노미네이트되는, 그렇게 화제성을 원하는 칸과 예술적 아우라를 마케팅 요소로 삼는 할리우드의 공생 관계가 올해도 이어진 것이다. 메릴 스트리프와 조지 루카스가 개막식과 폐막식에서 각각 명예황금종려상을 받는 그림도 근래 칸영화제의 친할리우드적 행보를 보여준다. 숀 베이커의 수상 소감대로 “<아노라>는 주류 영화가 아니지만 황금종려상 덕분에 이런 영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일반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영화와 비교할 때 <아노라>는 주류가 될 수 있다. 다른 작품이 칸영화제가 가진 권위를 이용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실현되지 못한 여러 선택지를 상상하게 된다.

스크린 바깥의 스캔들

안전한 선택에 산업의 이해관계까지 얽히면 또 다른 소외를 낳는다. 이같은 한계 속에서 영화산업의 불평등·불공정 문제가 가시화되면 정치는 스크린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영화제의 주장이 더더욱 궤변으로 들린다. 이번 영화제 기간에 칸영화제 프리랜서 노동자들은 더 나은 노동조건을 요구하는 시위에 들어갔다. 파얄 카파디아 감독이 심사위원대상 수상 소감으로 영화제 노동자들을 ‘샤라웃’한 것 외에는 영화제쪽은 물론 외신 기자들도 그들의 목소리에 크게 귀 기울이지 않았다. 최근 칸영화제가 가장 공들이는 섭외 리스트로 보이는 ‘할리우드 노장’을 대표하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메갈로폴리스> 현장에서 자신의 무릎 위에 여성들을 앉게 한다거나 나이트클럽 촬영 중 여성 엑스트라들에게 키스를 시도했다는 증언이 터지면서 구설에 오른 바 있다(참고로 <메갈로폴리스>에는 폭행 및 정신 학대 혐의로 전 여자 친구에게 고소당한 샤이아 러버프가 출연하며, 그 역시 칸영화제 레드카펫에 섰다). 원래 칸영화제는 영화인의 도덕성보다 예술이 중요하다는 영화 지상주의를 고수하는 쪽에 가까웠다지만 이를 할리우드의 스타 파워를 빌리는 행보와 나란히 놓고 보면 칸의 모순성이 읽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단지 켄 로치 감독의 영화를 꼬박꼬박 초청하고 페미니즘 주제를 담은 혹은 여성감독의 영화가 수상하는 것 이상의 변화가 칸영화제에 필요한 시기다.

사진제공 칸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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