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발코네트>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주연배우 노에미 메를랑의 두 번째 장편영화 연출작이자 셀린 시아마가 함께 시나리오를 쓴 호러 코미디다. 주인공은 TV영화에서 마릴린 먼로 역을 연기 중인 배우 엘리스(노에미 메를랑), 캠걸로 활동 중인 루비(수헤일라 야쿠브), 잘생긴 남자를 훔쳐보며 로맨틱코미디 소설을 구상하는 작가 지망생 니콜(산다 코드레아누) 등 세 여자친구다. 영화는 이들이 강간 가해자 남성의 시체를 은폐하느라 벌어지는 요란한 소동을 담는다. 전반적으로 남성적 시선(male gaze)이 아닌 평등한 관계를 담은 카메라를 보여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연장선상에서 읽어낼 거리가 많다. 카메라 앞에서 가슴이나 음부를 보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 엘리스지만 그도 부부 강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여성의 자기 신체 긍정과 젠더 기반 폭력이 어떻게 구분되어야 하는지 다시 고민하게 만든다.
- <더 발코네트>는 어떻게 시작된 작품인가.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이후, 미투(#Metoo) 운동 이후 내가 그동안 연기한 것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나는 여자친구들이 있는 아파트로 도피했다. 여자들끼리 몇달 동안 같이 살아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겪었던 트라우마와 억압에 대해 얘기했다. 유머를 잃지 않고 가해자들을 놀렸고, 같은 여성에게 결코 보여주지 않던 음란함을 공유하며 우리의 신체에 대해 자유롭고 솔직할 수 있었다. (웃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이후 셀린 시아마와 좋은 친구가 됐다. 내가 <더 발코네트>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셀린이 영화의 방향에 공감하면서 함께 작업하게 됐다. 셀린은 공동 각본 작업을 하면서도 원래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색깔을 바꾸지 않으려고 했다. 정말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 영화에는 작가 지망생 니콜이 기존의 시나리오 작법 룰을 거부하겠다고 하는 대사가 나온다. 이러한 태도가 셀린 시아마와 시나리오를 쓸 때도 반영됐나.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준비하던 당시 우리는 내레이션의 역학에 대해 얘기했다. 갈등을 다루는 작법 공식은 어떤 면에서 가부장적이다. 어쩌면 이를 놀랍고 풍성하고 화려하지만 동시에 존경스럽고 모두에게 온건한 방향으로 바꾸는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 뭔가 다른 것을 만들어내고 싶은 니콜 캐릭터에 이를 적용하면 그와 그의 친구들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 가해자의 직업이 사진작가인 것은 우연의 일치인가.
= 아니다. 나는 17살 때 처음 카메라 앞에 섰고 영화에서와 같은 일을 겪었다. 이는 단지 메타포일 뿐 아니라 항상 대상화되어온 여성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여성의 몸은 우리가 드러내고자 했던 영혼을 보여준다. 아니, 몸은 몸일 뿐이고 오랫동안 나 자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 <더 발코네트>는 일상 속의 자연스러운 노출 신이 여러 번 등장한다.
= 남성에 비해 여성의 상반신 노출은 금기시되어 있다. 상반신 노출을 한 남자를 보면 좋아하지만 정작 자신의 몸은 감추려고 한다. 아기가 생기면 모유를 먹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게 당연한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노출 신이 점점 줄어듦에 따라 친밀한 정사 장면도 줄어들고 있다. 나는 내 가슴이 완벽하지 않는 것을 인정한다. 다만 우리가 억압에서 벗어날 때 다른 곳을 볼 수 있는 시야가 열린다. 몸은 그저 몸일 뿐이다. 때문에 여성의 노출을 정상적인 일로 만들어야 한다. 엘리스가 산부인과에서 다리를 벌리고 있는 신 역시 성적인 뉘앙스 없이 자연스럽게 찍었다.
- 자신의 신체와 보다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 것 같나.
= 14~15살 때쯤이었다. 주변에서는 여성의 가슴은 무척 중요한 문제라고 했다. 나는 자연 그대로의, 완벽하지 않은 가슴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사람들의 눈에 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만난 의사는 이런 심리는 삶의 의지를 잃는 큰 트라우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파리에서 모델 일을 시작했다. 당시 체중이 47kg였는데도 불구하고 포토그래퍼로부터 충분히 마르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업계가 요구하는 기준을 맞추기 위해 무려 4년 동안 거식증을 앓았다. 사회에서 나에게 다른 길이 있다고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마른 몸을 유지하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목표가 됐다. 포토그래퍼 같은 업계 어른들이 당시 내겐 너무 커 보였고 그들은 “너는 17살이고 카메라 앞에서는 그저 고깃덩어리일 뿐”이라고 했다. 그것이 나의 신체에 대한 투쟁의 시작이었다. 당시 업계는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성관계를 맺어야 하고 미모를 유지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그래서 나는 셀린 시아마 같은 여성과 함께 예술가가 되는 길을 택했다. 지금도 자신과의 싸움이, 신체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지만 바뀌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스플래터, 호러, 코미디,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가 녹아 있다. 이들간의 긴장감을 만드는 일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 우리가 삶에서 표현하지 못하는 분노와 폭력을 영화에서 표현하려면 다양한 장르를 섞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폭력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온건하게 만들기 위해 유머가 필요했다. 영화는 인간이 즐기고 경험하는 것을 탐험하는 것을 다루며, 여성들은 자기 자신과 다시 연결되고 자유를 얻고 스스로가 누구인지 다양한 것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더이상 여성에게 한계가 없는 시대가 왔기 때문에 장르 혼합이 필수적이었다.
- 영화는 루비가 강간당하는 신을 보여주지 않지만 엘리스가 남편에게 강간당하는 신은 롱테이크로 비춘다. 이유가 무엇인가.
= 루비의 강간은 이미 우리가 영화에서 100번 이상 보았던 장면이다. 그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반면 우리는 부부 강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때문에 관객을 속이지 않기 위해 이를 직접 촬영할 필요가 있었다.
- 프랑스에서 뒤늦게 미투 운동이 활기를 띠고 있다. 세상이 바뀔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나.
= 나는 영화를 찍는 일이 무서웠지만 두려움은 곧 흥미로움을 의미한다. 여성들이 만든 영화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 행복하다. 우리는 말하고 싶은 것도 경험하고 싶은 것도 다양하고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원한다. 또한 새로운 역동성을 가진 남성들의 영화를 만나는 것도 기쁘다. 어떤 남성들은 그들이 가부장적 방식과 맞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를 표현해내지 못한다고 자책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런 이들이 만드는 영화 또한 좋다. 많은 남자들이 내 영화를 싫어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과 <더 발코네트>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싶다. 몇몇 남자들에게 <더 발코네트>를 처음 보여줬을 때 그들은 부부 강간 신이 무척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이게 종종 벌어지는 일이라고 설명하고 이에 대해 함께 얘기해보자고 제안했다. 이같은 대화를 통해 내가 더 성장하고 여성들의 목소리 역시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나를 정말 감동시키는 순간은 같은 여성과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눌 때다. 변화를 원한다면 타인과 대화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