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이 세상에 해결 못할 더빙은 없어, 2000년 KBS <명탐정 코난> 1기 더빙 연출했던 이원희 토콤 이사
2024-07-23
글 : 김소미
사진 : 최성열

일본 <YTV>에서 1996년 첫 방영을 시작한 <명탐정 코난> 시즌1이 2000년 1월10일 한국 방송국에 상륙한 것은 아동 타깃의 공중파 애니메이션 업계에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지금 돌아보기에 우울하고 어두운 추리극이자 잔인한 묘사가 동원된 초창기 <명탐정 코난>을 KBS가 택했다는 점에서 제작단의 전말이 궁금해진다. <명탐정 코난>은 우려대로 시청자위원회와 학부모의 항의에 몸살을 앓았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지난밤이 궁금’해지는 많은 어린이들의 가슴에 열정을 심어넣었다. 작품이 겪은 다사다난한 운명 뒤편에는 심의실에서 그보다 더 큰 파란을 견뎌야 했던 이원희 더빙 전문 PD가 있었다. 공영방송의 심의 통과라는 높은 장벽을 뛰어넘으면서 10개월 만에 종영하기까지 총 101화, 76개 에피소드의 현지화를 지휘한 그다(한마디로 무려 25개 이상의 에피소드가 방송조차 되지 못했다). <천사소녀 네티> <요리왕 비룡> 그리고 <명탐정 코난>을 거쳐 애니메이션 더빙의 맷집을 단단히 기른 그는 이후 <원피스>와 <디지몬> 시리즈 등을 거치며 애니메이션 더빙계의 손꼽히는 베테랑으로 자리 잡았다. 1989년 정보문화센터(현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에서 다큐멘터리 더빙 작업으로 커리어를 연 지 35년차. 지난해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한국어 더빙을 연출해 2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더빙판으로 불러들이기도 한 이원희 토콤 이사의 전성기는 현재진행형이다.

- KBS 미디어 공채 1기로 입사해 더빙 연출 전문 프로듀서로 자리 잡았다. 특히 애니메이션 더빙 연출에 대한 인식이 희미했을 때인데 지금껏 평생 헌신하게 된 커리어의 계기점이 있었을까.

= 당시 하인성 KBS 미디어 국장이 KBS 영화 더빙 프로듀서의 더빙은 달라야 한다는 강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심어줬다. KBS의 <토요명화, 명화극장>, MBC의 <주말에 명화>를 보면서 분석하는 회의를 주말마다 쉬지 않고 매주 월요일에 분석 회의를 했다. 끊임없는 모니터링을 3년간 하면서 배운 게 크다. 그런 와중에도 실사와 달리 애니메이션 더빙은 약간 아래급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장편, 그다음이 지금 미드로 더 많이 불리는 미국 TV 미니시리즈, 그다음이 애니메이션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애니메이션 더빙이야말로 더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라고 봤다. 세계화와 함께 사람들은 점점 더 자막에 익숙해질 테지만 애니메이션은 필연적으로 그림에 소리를 입히는 장르니까 30~40년 뒤에도 거뜬할 거란 생각에서 나는 애니메이션에 더욱 집중하기로 했다. 남들이 볼 때는 어리석어 보였을 수도 있지만 다행히 경쟁 상대에서 배제되면서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주어진 것 같다. (웃음)

- <명탐정 코난> 1기는 지금 봐도 어두운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살인사건의 묘사가 더욱 잔인한 것은 물론이고 <도서관 살인사건> 에피소드는 지금 봐도 무섭다. 대중의 선호도나 심의를 고려했을 때 <명탐정 코난>의 방영 결정 자체가 매우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 작품성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 확실한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동애니메이션이지만 단순 퀴즈식의 범인 찾기에서 그치지 않고 추리물다운 깊이를 갖췄다는 데 주목했다. 매회 다루는 소재의 디테일과 핍진성이 꽤나 철저히 그려져 있다는 점도 교육적이리라 판단했다. 가령 <초밥의 장인>이라는 애니메이션도 에피소드마다 초밥에 관해 무언가 하나쯤은 배울 수 있는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이전까지 추리물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심의가 까다로울 게 뻔하니 회사 내부에서 잘 책임져보라고 일을 덜컥 맡긴 경우였다. 그때부터 자르고 지우고 수정하는 험난한 여정이 시작됐다.

- 당대 공중파 심의 기준에 부합하는 과정에서 겪은 고충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나.

= 히라가나, 가타카나로 된 추리의 중요한 파트를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고치되 여전히 추리의 맥을 살리는 게 관건이었다. 담당 작가와 며칠씩 고민해서 원본의 흐름에 맞게 재창조하는 과정이었다고 보면 된다. 지금 돌아보면 살인 장면의 묘사에 있어 너무 과하게 잘라낸 부분들이 참 아쉽다. 얼음칼로 살인하는 설정인데 중간 과정을 전부 들어내고 살인 현장에 물만 남은 모습을 남겨야 했다. <명탐정 코난>만 그랬던 건 아니고 <원피스>를 할 때도 칼을 쓰는 장면을 기어이 몽둥이로 바꿔놓는 식이었다. 하여간 중간 묘사 없이 갑자기 사람이 죽어 있는 모습 같은 걸 내보내고 나면 늘 마음에 걸렸다. 1초만 더 넣어보려고 심의실에서 매일 실랑이하기 일쑤였다. 1초가 안되면 몇 프레임이라도 더 욱여넣고. (웃음) 도저히 절충 방안이 없을 때는 중간에 장면이 많이 날아갔으니 앞뒤 대사를 고쳐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1년 남짓 방영하고 <명탐정 코난>을 지속할 수 없었던 이유도 내가 코난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명탐정 코난>을 그만하기로 결정하면서 상대적으로 공중파보다는 심의가 느슨한 케이블TV가 살짝 부러웠던 적도 있다.

- 인물 작명 과정도 궁금하다. 매회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는 에피소드식 구성인 만큼 일본인 이름을 한국 이름으로 새롭게 작명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을 듯싶다.

= 추리소설의 대가는 코난 도일 아닌가. 그런데 코씨나 난씨는 우리나라에 없으니 비슷한 남씨로 해서 남도일이라 지었다. 유명한 탐정은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아는 코믹한 캐릭터니까 그 성정을 그대로 반영해서 유명한이라 이름 붙였다. 회마다 등장하는 새로운 캐릭터에 한국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나중엔 너무 버거워서 실제 내 친구들 이름을 쓴 적도 있다. 살인자, 목격자, 피해자 등의 이름에 친한 친구들 이름을 써버린 거다. 만화 속에서 살인자가 된 친구가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우리 아들이 <명탐정 코난>을 좋아해서 만화를 보는데 아빠가 살인자여서 상처받았다”고…. 사죄했지만 그 이후로 우리는 멀어졌다. 지금도 그 친구에게는 너무나 미안하다. 방송하는 사람의 책임감, 윤리의식에 대해서 크게 배운 내 인생의 실수였다. 이후에는 좋은 캐릭터일 경우에만 실제 이름을 종종 썼다. 대체로 코난 친구들의 이름에 우리 아들 친구들의 이름을 쓰는 식이다. 사춘기가 일찍 와서 조금 엇나가던 친구가 있었는데, 만화 속에서 자신과 이름이 같은 캐릭터가 멋지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로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분이 참 좋았다.

- 코난 역에 최덕희, 남도일 역에 강수진 등 캐스팅이 쟁쟁하다. 한 성우가 두 정체성을 번갈아가며 연기한 일본과 달리 더블 캐스팅을 추진한 까닭은.

= 보통 더빙 캐스팅을 할 땐 원작의 오리지널 목소리에 너무 얽매이지 않는 게 관건이다. 일단 대본과 비디오 이미지에 맞춰서 3배수 정도로 성우를 뽑고 그다음에 오리지널을 들으면서 추려나간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똑같은 얼굴이라도 일본 사람들이 생각하는 잘 어울리는 목소리와 한국 사람들이 떠올리는 목소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오리지널에 몰두하면 끌려가는 수가 있다. <명탐정 코난>에서 코난 목소리를 맡은 최덕희 성우는 당시 신인급이지만 너무나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기에 믿고 캐스팅했다. 코난은 어리지만 사건을 해결할 땐 소리에 강단이 있어야 하는데 최덕희씨가 울림통이 좋아서 그 부분을 눈여겨봤다. 남도일 목소리의 강수진 성우는 원래 노역 전문이었다가 그만두고 비디오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현 애드원 스튜디오 사장이기도 한 박원빈 감독이 당시에 영화 <알라딘>의 알라딘 더빙 목소리 역으로 그를 추천했고 오디션에 합격했다. 그러고는 완전히 스타가 된 거다. 일본에선 여자 성우 한 사람이 코난과 남도일 연기를 모두 했는데, 나는 그게 성우에게 꽤나 무리가 가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장기간 지속하면 성대결절이 올 수도 있다. 유명한 목소리의 고 장정진 성우는 <달려라 하니>의 홍두깨 선생님 같은 희극적 톤과 사건 수사할 때 나오는 무겁고 깊은 소리를 동시에 잘 구현할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골롬보 역의 조동희 성우는 외모를 믿었다. (웃음) 두툼한 볼과 입가가 실제 캐릭터의 이미지와 맞아서였다. 실제로 <명화극장>같이 실사 더빙을 준비할 때 성우 수첩을 펼쳐 성우들의 얼굴을 보기도 한다. 구강구조가 흡사하면 확실히 소리도 비슷하게 나온다. 배한성 성우가 <대부>를 녹음할 때 말런 브랜도 느낌을 내기 위해 양 볼에 사탕을 물고 녹음한 것도 그래서다. 사탕이 녹아서 침이 줄줄 흐르는 것을 계속 닦아가는 불편을 감수하고 연기한 것이다.

- 사건 해결 과정에서 흐르는 코난 내면의 목소리를 코난이 아니라 남도일 목소리로 처리한 것이 한국판의 가장 큰 변화라 할 수 있고, 이 선택을 직접 내린 연출자다. 어떤 이유가 있었나.

= 이 친구의 본체는 고등학생인데 생각까지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처리할 필요가 있을까. 나로서는 개연성을 고려할 때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고등학생 모습의 남도일이 나오니까 강수진이라는 좋은 성우를 캐스팅해보자고 나름대로 과감하게 결정했다. 이런 결정과 실행이 가능했던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면,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애니메이션을 덜 간섭하던 방송국 분위기상 담당 PD의 결정에 별 간섭을 안 했다는 것일 터다. (웃음)

- 1기 오프닝 주제곡 <빛이 될 거야>를 담당 PD가 직접 작사했다는 사실도 이례적이다.

= 역사가 길다. 과거에 지금은 없어진 KBS 문화사업단과 예당엔터테인먼트가 계약해서 만화영화 주제가를 일괄적으로 만들었고 PD들은 그걸 받아서 쓰면 됐다. 그런데 어느 날 덜컥 그 계약이 끊겼고, 직접 만들어야 하는데 방송 제작비 지급 규정에 타이틀 주제가에 책정된 예산 자체가 없는 거다. 그런데 늘 예당에서 가요 만드는 작사가들에게 일본 원곡을 번안한 형태로 가사를 부탁했는데 방송하기 전에 3, 4화까지 미리 본 상태에서 이 가사를 읽어보니 내용이 하나도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더라. <명탐정 코난>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생각으로 한번 고쳐보자 싶어서 가사에 손을 댔다. 제대로 해보려 한국에 진출한 일본 음반회사 포니캐년코리아가 가수 유리를 키워보려던 상황과 맞물려 유리에게 주제곡을 맡기면 제작비를 대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나는 친구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뮤지션 고 김광석씨와 무척 친했고, 그래서 1985년부터 동물원 멤버들과도 자주 보는 사이였는데 거기에 작곡을 부탁해서 녹음까지 할 수 있었다. 사실 작사까지 맡겼다가 유준열씨가 다시 전화 와서 도저히 쑥쓰러워서 애니메이션 가사는 못 쓰겠다고 해서 내가 썼다. <명탐정 코난> 주제가를 시작으로 <원피스> <극장판 파워 디지몬 더 비기닝>의 작사, 한국어 개사를 더 본격적으로 하게 됐다. 내가 열심히 쓰면 그나마 고생하는 팀원들과 회식할 수 있어 기뻤다.

- 첫 작사곡 <빛이 될 거야>의 가사 중 유독 마음이 가는 한 대목이 있다면.

= “그래 이 세상에 해결 못할 것은 없어. 끝까지 포기하고 않고 풀면 되잖아.” 코난은 어떤 친구일까, 성격을 오래 고민하면서 쓴 가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에 막 결혼하고 집 없이 생활고를 겪으면서 의기소침해져 있을 때 나 스스로에게 던진 다짐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내가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명탐정 코난>도 그렇고 <원피스> 주제곡을 가끔 결혼식에 쓰는 분들이 있던데 놀라우면서도 이해가 간다. (웃음)

- <명탐정 코난>이라는 전설의 시작과 함께한 것이 인생에 남긴 흔적이나 영향이 있을까.

= 더빙 연출가로서 애니메이션을 바라보는 시선의 안개가 확 걷힌, 내게는 와이퍼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명탐정 코난> 이후로 도전적인 애니메이션 작품을 맡아서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없어졌다. 그러니까 종종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명탐정 코난>도 했는데 뭘 못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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