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한장 한장이 영화의 장면으로 다시 태어난 듯하다. 들판을 뒤덮은 안개와 창문에 낀 성에, 가녀린 눈발과 모닥불의 열기가 스민 얼굴로 빚어진 영화만의 기후는 카메라 렌즈 너머에서 넘실대며 이쪽으로 전해져 온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사랑스러운 패트릭> <빌>을 연출한 팀 밀란츠가 감독을 맡고, <오펜하이머>의 킬리언 머피가 제작과 주연을 맡아 1985년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을 둘러싼 비밀은 물론 자신의 유년 시절의 실체를 들여다보게 되는 인물을 연기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인 팀 밀란츠와 킬리언 머피를 줌 인터뷰로 만났다.
- 원작인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향한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소설의 어떤 면에 끌렸고 어떻게 영화화하게 되었나.
- 킬리언 머피 클레어 키건의 글을 예전부터 좋아했다. 팀과 나는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를 같이했다. 그 후로 팀이 더블린에 있는 우리 집에 놀러 와 함께 작업할 만한 소재로 대화를 나눴는데 아내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제안했다. 당시 소설이 막 발간되었던 참이라 읽어보았는데 너무 좋았다. 키건의 소설은 언뜻 보면 단순하지만 사실 굉장히 복잡하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을 팀과 각본가인 엔다 월시에게 보여주었다. 불가능할 줄 알았던 판권 구매도 가능했다.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 팀 밀란츠 이 이야기는 내가 개인적 차원에서 지극히 공감할 수 있는 비탄에 관한 것이고 어떻게 슬픔에서 빠져나오는지에 관한 소설이었다. 읽자마자 이 고통을 어떻게 구조화할지에 흥미가 생겼다.
- 영상미가 돋보인다. 또 하나 주요한 것은 빌(킬리언 머피)의 시점에서 보는 마을과 주민들이다. 촬영 방식은 어떻게 구상했나.
- 팀 밀란츠 이 작품은 소설을 의식하지 않고 영화를 연출할 수는 없었다. 키건의 글이 가진 힘은 간결함에 있고 바로 그 간결함을 내 영화에서 표현하고 싶었다. 관객이 빌의 눈동자 뒤에 숨은 괴로움과 번민을 포착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연출자이기보다 조용한 관찰자가 되려 했다. <동경 이야기>나 <동경의 황혼>에서 오즈 야스지로가 그랬던 것처럼.
- 빌은 평범한 가장이지만 여전히 소년 같은 주저함과 부끄러움을 지녔다. 이번 영화에서 주연과 제작자 역할을 맡았는데 인물을 만듦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긴 부분은.
- 킬리언 머피 각본을 쓴 엔다 월시와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그의 관건은 내 역할에게 대사를 얼마나 할애할 것인지였다. 나는 대사를 최대한 줄여 달라고 했다. 알다시피 아일랜드 남자들은 과묵하다. 특히 80년대와 그 이전의 남성들은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데 고충이 많았을 것이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마을에서도 벌어지는 일을 함구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으니 더욱 그래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빌을 연기할 때 대사에 기대지 않으려 애썼다. 극을 구성하는 단계에서는 빌의 행동이 영웅적 행위로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빌은 신경쇠약을 겪는 한 남성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행동의 결과는 그의 감정과 내면의 변화를 따를 뿐이다. 팀이 말한 대로 빌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일원이자 아버지, 남편으로서 슬픔과 고통을 겪는 인물이다. 우리에게 빌은 결코 영웅이 아니다.
- 아일랜드의 풍경에 더해진 유러피언 멜랑콜리가 이 영화의 전체 무드를 조성한다. 한 계절 안에서 잔잔하게 변하는 날씨와 풍경은 이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 같다.
- 팀 밀란츠 다닥다닥 붙은 창문이나 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기 같은 것들로 이 영화에 ‘아일랜드의 겨울’ 하면 떠올릴 법한 모습을 담았다. 컷마다 아일랜드의 겨울을 복사해서 붙인 듯한 장면으로 찍고 싶었고 결과적으로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 킬리언 머피 눈 내리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인공눈을 준비했었다. 그런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갑자기 눈이 오기 시작했다. 영화에 사용된 장면은 실제 눈이 내렸던 순간이다. 소년 시절의 빌 펄롱이 들판을 달리는 장면도 팀이 계절에 맞도록 고안한 아이디어다. 눈 오는 날 트럭을 모는 장면도 그렇고. 아무튼 우리는 눈에 관해서 정말 운이 좋았다.
- 소설을 각색하면서 바꾸거나 혹은 끝까지 고집하고 싶었던 부분이 있다면.
- 팀 밀란츠 어느 스토리에서든 나는 내 이야기를 찾으려 한다. 키건의 소설에서 가장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영화로 끌어온 것이 이번 작업의 성취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의 간극이 흐릿한데 이 점이 마음에 들어 영화에도 그대로 가져왔다. 빌이 손을 씻으며 모든 일을 흘려보내려는 상징적인 행동도 소설의 장면 그대로다.
- 노련한 아일랜드 배우들이 함께 출연했다. 배우이자 메인 프로듀서, 감독으로서 어떻게 상호작용했나.
- 팀 밀란츠 배우들은 영화에 자기 일부를 쏟아냈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고 특히 원작에 없는 내용을 상상하며 수다도 많이 떨었다. 인물들의 첫 만남이나 첫 데이트는 어땠을지 따위의 질문들을 서로에게 던지고 답했다. 특히 아일린 월시가 연기한 아일린 역할에 배우의 일부가 녹아 있다는 점이 아주 근사하게 여겨진다.
- 킬리언 머피 원장 수녀 역의 에밀리 왓슨은 말할 것도 없이 굉장했다. 내 아내 역할인 아일린 월시와는 알고 지낸 지 30년 가까이 된 오랜 친구다. 아일린과 첫 촬영날 남편과 아내로 서 있었을 때 그간 함께한 시간과 역사, 자유로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팀이 자유분방한 환경을 조성했기 때문에 다섯 딸 역할의 배우들은 촬영 중이라는 걸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카메라 앞에서 그들은 배우가 아니라 본래 모습 그 자체였다.
- 촬영지는 웩스퍼드의 뉴 로스로 소설의 배경과 동일하다. 머무는 동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
- 팀 밀란츠 처음 방문한 그 마을에 비가 우라지게도 퍼부어댔는데(일동 웃음) 소설의 배경인 실제 장소에서 촬영했다는 게 좋은 면에서 자극이 되었다. 소설 속에서 막 빠져나온 것처럼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다. 우연히라도 다시 만날 수 없을 만치 아름다운 풍경을 눈앞에 두고 작업할 수 있었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 킬리언 머피 동감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실제 소설 속, 영화 속 인물이 된 듯했다. 아름다운 장소이고 그래서 카메라에도 아름답게 담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