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인터뷰] 절망은 더불어 희망도 품고 있기에, <섬.망(望)> 박순리 감독, 배우 이은
2024-12-19
글 : 이우빈
사진 : 백종헌

한 고시원에서 살던 여성이 사망하기 직전 병원에 실려갔다. 여자는 마지막으로 카스테라를 먹고 싶다고 말했으며 먹고 난 뒤 생을 다했다. 타국에 있던 언니는 늦게나마 동생의 유해를 찾으려 한다. 이처럼 실제 일어났던 한 고독사 사건을 신문 사회면에서 접한 박순리 감독은 꾸준히 천착해온 고독과 죽음의 주제를 <섬.망(望)>이란 이미지에 녹여냈다. 영화는 특정 사건을 배경으로 했음에도 꿈결 같은 시공간을 넘나든다. 고속촬영을 활용한 슬로모션과 각종 형식미는 영화의 의미를 확장할 시간과 여지를 확보한다. 이 여정의 한복판에 있는 인물 은애는 첫 영화 촬영에 임했던 이은 배우의 속도감 있는 연기로 완성됐다. 2022년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된 후 먼 길을 돌아 극장을 찾아온 <섬.망(望)>의 박순리 감독, 이은 배우를 만났다.

- 현실의 한 고독사 사건으로부터 영화가 시작됐다. 장편영화로 만들기까지의 과정은 어땠나.

박순리 고독사 사건을 다룬 기사는 짧게 끝났지만, 그 이야기가 가슴 깊은 곳까지 와닿았다. 전작부터 계속 고독과 죽음을 다루고 있었던 터라 우선 단편으로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은 배우와 리허설을 거치고 본격적으로 촬영하다 보니 영화가 점차 길어져 장편으로 완성됐다.

- 영화가 더 길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박순리 고속촬영으로 찍은 장면들을 구상하고 완성하면서 이 영화의 리듬이 30분 내로 끝나긴 어렵겠다고 느꼈다. 영화의 시간대가 계속 늦은 오후다. 그 가을만의 노을빛을 화면에 똑같이 담고 싶었다. 그래서 후반작업을 하면서 1년 뒤에 같은 장소에서 추가 촬영까지 진행했다. 내레이션 작업까지 끝내니 제작 기간도 늘어나고 영화도 길어졌다. 시나리오가 늘어난 부분은 딱히 없었다.

- 이은 배우는 주로 연극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영화 연기에 도전한 계기는.

이은 무대에서나 일상에선 유쾌한 이미지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런데 감독님은 내 사진만 보고도 나의 다른 면을 봐주시고 캐스팅을 제안해주셨다. 그렇게 작품의 기획 의도를 듣고 나니 너무 아픈 이야기이긴 하지만 누군가에겐 분명 위로를 줄 수 있을 듯했다.

박순리 감독의 욕심일 순 있지만 영화를 만들 땐 언제나 새롭고 숨겨져 있던 얼굴을 찾으려 한다. 현실에서 너무 자주 접한 얼굴이 영화에 등장한다면 과연 관객이 영화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을지란 우려가 있다. 딱 ‘이 영화에서만 존재하는 얼굴’을 늘 찾아다니고 있다.

- 영화의 유장한 속도감이 배우의 속도감과 딱 맞아떨어진다는 인상이다. 촬영 과정은 어땠나.

박순리 은애가 혼자 방 안에 있는 장면의 연기 리허설을 할 때였는데 이은 배우가 연기를 멈추지 않고 1시간을 이어가더라. 배우는 감독의 신호를 기다리고 오히려 난 배우가 끝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웃음) 그 경험을 토대로 은애의 첫 번째 컷과 고속촬영을 통한 영화의 기조를 만들게 됐다. <섬.망(望)>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꿈인 동시에 은애에겐 꿈속의 현실이니만큼 그 사이의 이질감을 표현하는 게 중요했는데, 마침 잘 결합된 것 같다.

이은 연극은 보통 한달 반 정도 연습하면서 연기가 서서히 발전하는 과정을 동료들과 나누게 된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촬영 전의 긴 시간 동안 은애라는 인물을 내가 혼자 숙성시키고 연습하여 촬영날 딱 보여줘야 하는 경우였다. 그런 혼자만의 시간이 처음엔 무척 길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갈수록 즐거웠다.

- 특정 사건을 모티프로 했지만, 앞서 말한 롱테이크 등의 신비로운 장면으로 영화의 추상성을 강조한 이유도 궁금하다.

박순리 고독사라고 하면 보통 우리의 삶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고독하고, 죽는다. 누구나 은애처럼 방 안에 혼자 앉아 있던 적이 있었고 저런 꿈을 꾼 적이 있었고 누군가에게 용서받거나 용서를 구해야 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모두가 향해가고 있는 그 죽음에의 삶을 각자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질문하고 싶었다. 여기서 은애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사건을 겪었는지 소상히 내러티브화한다면 이 질문이 좁은 설정에 갇힐 것 같았다. 그보단 관객들이 영화에 저마다의 삶을 투영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은 모호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설정과 장면들이 있어 어렵기도 했지만, 만약 내가 은애를 완벽한 한 사람으로 확정하고 연기했다면 영화의 전반적인 무드에 맞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어느 순간부턴 이게 ‘은애의 몇 번째 꿈이지?’란 생각을 잘 하진 않고 매 순간이 은애의 솔직한 현실이자 소망이란 태도로 임하게 됐다.

- 영화의 첫 시퀀스는 은애가 홀로 극장에 앉아 가수 나미의 공연 영상을 보는 기묘한 장면이다.

박순리 그 무대에서 나미의 눈빛은 너무 반짝반짝하고 행복해 보이는데 그 이후의 무대를 보면 신나는 노래를 부르면서도 왠지 서글퍼 보이는 구석이 있다. 그래서인지 더욱더 저 무대에서의 나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은애의 삶에도 언젠간 아름다운 빛이 들었겠지만, 살다보니 그 아름다움이 점차 흐려질 때도 있었을 테니까. 이처럼 절망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관객들의 현실에 희망을 던지고도 싶었다. <섬.망(望)>을 보고 난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선대도 여전히 햇빛은 비치고 있다. 이러한 마음을 오프닝 시퀀스에 담고자 했다.

이은 세 번째로 <섬.망(望)>을 보고 나왔을 땐 은애가 혼자 있다는 감상이 들지 않았다. 특히 은애의 마지막 장면은 리허설 때의 촬영본을 썼고, 실제 그 공간엔 아무도 없었는데도 은애가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왠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섬.망(望)>이란 제목의 의미는.

박순리 항상 스스로 섬이라고 인식하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희망과 절망은 같은 망(望)을 쓴다. 은애라는 인물이 영화에서 겪는 일도 희망과 절망의 반복,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마치기 전에 본인의 일생과 꿈을 돌아보는 섬망 증세의 일종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로 남기고 싶은 것은 소망이니까, 한 섬의 희망과 절망을 넘는 소망을 담고자 하는 의미에서 제목을 짓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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