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관심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다가 결국 은퇴에 다다른 아이돌 러브앤리즈의 리더 수민. 그는 어려서부터 책임감이란 단어와 가까웠다. 지망생 시절 연예기획사 내 극심한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 자신을 책임졌고, 데뷔한 뒤에는 어떻게든 팀을 이끌기 위해 모든 의무를 다했다. 갈지자로 흩어지는 자유분방한 여행기에서조차 수민만이 원점으로 돌아오는 건 어쩌면 관성 같은 그의 책임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언뜻 외로워 보이는 그의 곁엔 배우 최성은이 있다. 수민의 얼굴이 되어 소리도 질러보고, 이유 없이 웃어도 보고, 오랫동안 응어리진 슬픔도 꺼내보면서 그는 이제 수민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아는 유일한 사람이 됐다.
- <십개월의 미래> 이후 남궁선 감독과 두 번째 작품을 함께한다.
<십개월의 미래>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감독님을 만났을 때 <힘을 낼 시간>을 준비 중이라고 말씀하셨다. 작품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시는데 시나리오가 무척 궁금했다. 그때만 해도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시나리오가 너무 좋은 거다. 술술 읽히고 중간중간 나오는 내레이션에 몰입하게 됐다. 또 어떻게 촬영해나갈 것인지 감독님의 이야기를 듣는 게 무척 재미있었다. 이전과 달리 조금 더 자유로운 방식으로 접근할 거라고 하시더라. 그때 꼭 함께하고 싶다고 피력했다.
- 시나리오를 보면서 수민의 어떤 면모를 강조해야겠다고 판단했나.
수민은 나와 닮은 구석이 많다. 무엇을 원하는지보다 뭘 해야 하는지 무게를 두는 점이나 자신을 일상적으로 채찍질하는 모습이 내게도 무척 익숙하다. 또 평소 마음이나 감정 상태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는 것도. 그래서 수민을 이해하는 게 크게 어렵지 않았다. 또 계속해서 대중의 평가에 노출되는 환경도 공감이 갔다. 내가 수민의 모든 경험을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공통분모가 있다고 느꼈다. 상황마다 수민이 느낄 감정을 내 안에서 더 끄집어내려 했다.
- 영화에서 태희(현우석)와 사랑(하서윤)이 다소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동안 수민은 그들을 진정시키며 여행을 정상화하는 데 힘쓴다. 수민은 끝까지 리더 같다.
수민이는 정말 책임감이 강한 인물이다. 영화에 특정한 전사가 드러나지는 않지만 수민의 타고난 기질이 그럴 거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또 수민이 지금까지 거쳐온 경험들도 그를 그렇게 만들어온 듯하다. 아이돌이 되는 훈련 과정 중에 해야 하는 것과 하면 안되는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왔을 테고 또 한 그룹의 리더로서 쌓아온 습관과 책무가 있을 것이다. 내가 잘하는 만큼 더 잘될 거라는 생각도 얼마나 많이 했을까.
- 수민과 친구들이 뒤늦은 제주도 수학여행을 떠났다면 배우 최성은은 한달여 동안 촬영기를 진행했다.
당시에는 정말 너무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그게 그렇게 힘들었나 싶다. (웃음) 일정이 제한적이라 촬영 스케줄이 무척 빡빡했다. 하지만 촬영이 끝나고 돌아올 때 풍경을 보면서 많은 위로를 얻었다. 아름다운 노을, 바다, 지평선 이런 것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좋았다. 또 다들 숙소에 방이 붙어 있으니까 방방마다 놀러가 수다도 떨고 바다 구경도 가고 술도 많이 마셨다. 다같이 보낸 시간들이 쌓이는 게 좋았다. 진짜 수학여행처럼 자투리 시간을 쓰려고 했다. 근데 좀 많이 힘든 수학여행. (웃음)
- 태희, 사랑, 수민 모두 개성이 뚜렷하다. 수민의 입장에서는 태희와 사랑이에게 각각 어떤 관계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나.
먼저 수민이와 태희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친구 사이였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로서 아이돌이라는 직업적 공통분모를 넘어 애틋한 우정을 지니고 있다. 상대적으로 사랑이보다는 더 가까운 친구일 거라 생각했다. 오랜 친구 특유의 한심해하는 눈빛이 있지 않나. 서로 그런 걸 보여줬다. 으이그 으이그 하면서. (웃음) 그러나 묵묵히 응원한다. 불현듯 태희가 속마음을 꺼냈을 때 수민이도 나름 놀랐을 것이다. ‘얘도 나처럼 상대방에게 짐이 될까봐 솔직하게 말 못했구나’ 싶어서. 또 수민이가 언니인 만큼 사랑이는 그룹 팀원으로서 자신이 돌봐야 할 대상으로 느꼈을 것이다. 자신이 포용해줘야 하고 책임져야 하는 친구.
- 문득 궁금해진다. 모든 것을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수민이도 언젠가 폭발했을까. 영화 바깥을 상상해보자면.
아마도… 어려울 것 같다. 폭발도 용기다. 하지만 쉽게 폭발하지 못했을 것 같다. 오히려 ‘한번만 더 참아보자’, ‘조금만 더 잘하면 할 수 있어’하면서 그 폭발의 불씨가 꺼져갔을 것 같다. 간절한 꿈, 놓지 못하는 기대가 수민에겐 너무 중요하다. 노력한다고 그만큼의 보상이 오는 게 아닌데. 특히 수민의 직군 안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 사실 이 여행은 애초 기대로부터 너무 멀어져버린, 망한 수학여행이 돼버렸다. 그럼에도 세 친구에게 어떤 힘을 낼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하나.
여행이 아니었다면 은퇴한 아이돌이 된 친구들의 생채기는 꺼내질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나는 공간의 힘을 믿는다. 제주가 선사하는 자연은 아늑함과 낯섦을 동시에 준다. 평소 지내는 곳과 다른 분위기와 풍경에 빠지다보면 온몸에 힘을 주며 참아온 것들이 자연스레 드러나고 만다. 그렇게 친구들은 서로에게 목격자가 되어준다. 서로를 들여다본 목격자. 거기서부터 우리는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분명 망한 여행이지만 이 시간을 딛고 세 친구가 진짜 힘을 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힘을 낼 시간>은 그런 점에서 좋다. 묵묵히 등을 토닥여주면서 이 방랑이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어떤 냄새를 맡으면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갈 때가 있다. 내겐 <힘을 낼 시간>이 그렇다. 나를 어떤 시절로 돌아가게 해준다. 그 온기를 많이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