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우리는 삐거덕거리는 우리를 응원해, <힘을 낼 시간> 남궁선 감독
2024-12-19
글 : 이자연
사진 : 백종헌

국가인권위원회의 15번째 인권영화 프로젝트인 <힘을 낼 시간>은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은퇴한 아이돌 출신의 세 친구가 뒤늦게 제주도 수학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운 이들은 뒤늦게 평범함 속에 녹아들려 하지만, 마음속에 응어리진 비애가 여행 도중 불쑥불쑥 얼굴을 내민다. 어쩌다 귤 농장에서 아르바이트비를 지급받는 순간, 지금까지 아이돌 활동으로 정산을 한번도 받아본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식으로. <힘을 낼 시간>은 아이돌 산업의 민낯이나 그림자를 직접 고발하지는 않지만 세 친구가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던 결핍과 상처를 천천히 고백하면서 우리가 직면해야 할 현실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가리킨다. 제주에서 이어진 소동 같은 수학여행은 분명 생의 의지를 촉발할 튼튼한 디딤돌이 되어가고 있다. 인간은 무엇으로 회복하는가. 영화는 천천히 그 답을 꺼내준다.

- <힘을 낼 시간>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진행하는 ‘인권영화 20주년 프로젝트’로 제작됐다. 중심 소재로 아이돌을 선택한 이유는.

평소에도 20대 청년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다니며 조사를 하는데 다들 너무 열심히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많이, 심하게. 이렇게 공력을 들이는 데도 많은 이들이 여전히 자신의 길을 못 찾고 있었다. 그때 이 현상이 아이돌 연습생과 사뭇 닮아 보여서 바로 취재를 시작했다. 많은 취재원이 공통적으로 학창 시절 동안 학교와 집, 소속사만 오간 기억뿐이라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학교 행사에 참여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기 보다 매니저가 정해준 데로 다닌다는 이야기에 거기서 벗어난 여행기를 구상해보고 싶었다. 20대 청춘들이 이제야 처음으로 스스로 떠나는 여행 이다.

- 아이돌 인권 문제를 탐색하고 취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공통된 문제 경향이 있다면.

소속사와 아이돌의 계약 관계가 생각보다 훨씬 더 부자유했다. 이 지점이 가장 눈에 띄었다. 보편적으로 이뤄지는 7년짜리 계약서는 아이돌로서 성공하지 못하면 회사를 나갈 수도, 다른 일을 병행할 수 없는 채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묶여 있는 게 무척 괴로운데 더구나 이 이야기를 어디에도 쉽게 꺼낼 수가 없다. 그게 가장 큰 문제다.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 이 사실을 알리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보통 계약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20대가 법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것이 대다수다. 계약근로자 대부분이 10대에서 20대인데 이 어린 친구들을 잘 보호해준다는 인상을 받지는 않았다.

- 수민(최성은), 태희(현우석), 사랑(하서윤)은 아이돌을 은퇴한 뒤에 자기 고백적인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한다. 한창 활동할 때가 아닌, 모든 게 끝난 뒤의 시점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내 시야에서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고 있는 게 아니면 영화도 메시지도 모두 애매해진다. 이번 취재는 아이돌 산업을 떠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 시점에 충실하고자 했다. 또한 과거에 어떤 사건을 복기하기보다 현재 상황에 집중하고 싶었다. 이번 영화는 염두에 두어야 할 지점이 많았다. 아직도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트라우마나 상처를 건드리지 않도록 신중해야 했고, 구체적인 인물로 특정되지 않도록 보편성을 키워야 했다. 그래서 힘든 시간을 거친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 <힘을 낼 시간>을 작업하는 동안 배우들이 현장에서 자유롭게 연기하도록 했다고. 원래 연기의 자율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인지.

보통 그런 편은 아니다. 다만 이런 지점이 독립영화에서 누릴 수 있는 장점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단편에서는 되도록 자율성과 즉흥성을 많이 활용하고 가미하려고 한다. 이번에는 장편임에도 즉흥성을 많이 따랐다. <힘을 낼 시간>의 프로덕션 자체가 소규모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유동적으로 작업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능했던 것 같다.

- 제주에는 이방인이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일이 무척 많다. 관광 중심 지역이기 때문에 식당이나 게스트하우스 등 다양한 일거리가 있다. 그런데 왜 귤 따기를 선택했나.

우선 세 친구가 급하게 돈이 필요한데도 여행지에서 일자리를 알아본 이유는 이들이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상상했다. 나는 그들이 문제를 혼자 끌어안고 해결하려 노력하는 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귤 따는 일은 육체노동적인 면모에서 선택한 거다. 물론 제주스러움이 담겨 있기도 하고. 몸을 쓸 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날들이 있지 않나. 기계적이고 반복적으로 일하면서 고민으로부터 벗어나는 시간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돌은 삶 전체가 고강도로 감정노동적이기 때문에 더더욱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 영화는 세 친구에게 소윤(강채윤)을 선물한다. 세 친구가 현실에 기반한 인물이라면 소윤은 판타지적인 느낌이 강하다. 갑자기 제주에서 만난 인물, 그런데 이들이 진솔한 마음을 터놓을 수 있게 독려하는 인물이다.

소윤은 팬의 규칙에서 벗어나는 인물로 설정하고 싶었다. 보통 아티스트와 팬 사이에는 조심스러운 벽을 세우고 그 선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다. 그런데 소윤이는 와일드카드다. 조금 눈치 없는 태도와 말을 건네면서 모두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하지만 이 선이 무너질 때 생기는 교감이 있다. 소윤에게 그 역할을 맡기고 싶었다. 서로 눈치 보느라 하지 못했던 질문을 하게 만들고 상처를 계속 건드리면서 회복하게 돕는다. 조금 기묘하고 독특한 친구를 일부러 한가운데에 배치한 이유다. 실제로 관계를 통해 회복되는 상처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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