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이 사람을 죽이는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일까. 잘 알려져 있듯이, 미국에서 총기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전자를, 반대로 총기 사용의 자유를 옹호하는 이들은 후자를 택한다. 총이 사람을 죽인다는 주장은 총 자체가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용도로 사용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말에서 총은 단순한 도구로 간주되어 칼이나 다른 흉기로 대체 가능한 것이 된다. 양쪽 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나로서는 총구가 사람을 향해 겨누어지고 총알이 발사되는 것 외에 총이 다르게 사용될 일이 있을까 싶어 전자에 마음이 갔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기술학자인 브뤼노 라투르는 이 문제를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총과 사람 중 어떤 쪽도 사람을 죽이는 본질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문제는 총과 사람이 어떻게 결합하는가에 달려 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사람’ 혹은 ‘사람이 방아쇠를 당긴 총’이지 서랍 속의 총이나 맨손으로 서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 이 설명을 들었을 때 감탄이 절로 나왔다. 결정론이나 본질주의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문제가 총과 사람의 결합이라고 해도 달라지는 게 별반 없었기 때문이다. 총과 사람이 만나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총을 쏘고 총에 맞는 것 외에 또 뭐가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일까, 벌써 지난해가 되어버린 12월3일 계엄군이 든 총을 움켜쥐던 안귀령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의 모습은 이중으로 충격적이었다. 첫 번째 충격은 적군에게 겨눠야 할 군인의 총구가 국민을 향했다는 사실이었고, 두 번째 충격은 그 ‘총과 사람의 결합’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맞선 사람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당시 안 대변인이 광택이 나는 까만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던 덕분에 총에 부착된 조명 장치에서 나오는 빛이 하얗게 반사되어 더 극적으로 보였다. 그는 두려움에 울먹이기는커녕 총을 든 군인에게 ‘부끄럽지도 않냐’고 호통을 쳤다. 기억에 남는 ‘총과 사람의 결합’은 또 있다. 2024년 파리올림픽 사격 종목에서 은메달을 딴 김예지 선수이다. 메달도 메달이지만 사격용 안경을 착용한 채 한손을 주머니에 넣고 당당한 표정과 포즈로 총을 쏘는 김 선수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과녁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여자가 그렇게 멋있을 줄 몰랐다. 12월의 추운 밤, 안귀령 대변인의 사진을 보자마자 뜨거웠던 8월의 김예지 선수가 떠올랐다. 2024년 이전에는 상상해보지 못한 총과 사람의 결합이었기 때문이다.
2024년 이전에 상상하지 못한 결합이 총과 여자뿐이랴. 응원 봉과 사람의 결합이 국가를 구하고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다는 것도 응원 봉을 들고 거리로 나간 여자들을 보며 배웠다. 2025년에는 또 어떤 새로운 사물이 여자들과 결합할까. 일단, 의사봉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