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산 위에 올라 멀리 내다본다. 그의 뒷모습에서 고독함과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극복할 대상으로서 광활한 자연과 미약한 인간을 대비시킨 독일 낭만주의 화가인 카스파어 다피트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마이클 만의 남성주인공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히트>(1995)에서 대저택에 홀로 유리창 밖을 바라보는 닐(로버트 드니로)의 뒷모습이 이에 해당한다. 차이점이라면 만의 주인공들이 대적할 풍경은 바로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도시였다는 점이다. 그 삭막한 도시 속에서 표류하는 만의 주인공들이 겪는 고통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다. 이번 신작도 예외는 아니다. <블랙코드>(2015) 이후 8년 만에 돌아온 마이클 만의 <페라리>는 1957년 이탈리아의 소도시 ‘모데나’로 우리를 초대한다.
평온하고 목가적인 분위기의 모데나 인근 카스텔베트로 지역에 한 가족이 살고 있다. 잠에서 깬 엔초 페라리(애덤 드라이버)는 부인 리나(셰일린 우들리)와 아들 피에로를 뒤로하고 급하게 집을 나선다. 사실 이들은 부부가 아니다. 엔초는 아내 라우라(페넬로페 크루스) 몰래 두집 살림을 하는 중이다. 모데나로 돌아온 엔초를 기다리는 건 혹독한 현실뿐이다. 자동차 제조업체 ‘페라리’의 창업자인 엔초는 파산 위기에 직면해 있다. 투자를 위한 협상 시 전권이 필요한데 공동 창업자 라우라는 경영권을 내주지 않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오직 경주에서 승리하는 것뿐이다. 이탈리아 전역 공도를 가로지르는 1천 마일 레이스인 ‘밀레 밀리아’에 엔초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페라리>는 자신의 이름을 딴 전설의 자동차 제조업체의 창립자 엔초 페라리의 전기영화다. 실존 인물의 생애 전체를 조망하는 통상적인 방식의 전기영화는 아니다. 마이클 만이 주목하는 것은 1957년이라는 특정 시기다. 이 시기는 엔초의 일생에 있어 절체절명의 순간으로, 위기와 기회가 한몸처럼 붙어 들어오던 때다. 엔초란 인물을 재현한 또 다른 영화가 떠오른다. 실제 만이 제작에도 참여했던 제임스 맨골드가 연출한 <포드 V 페라리>(2019)에서 짧지만 강렬하게 엔초가 등장한다. 마피아 보스처럼 등장한 엔초는 비록 파산 위기에 몰려 있지만 경주에 대한 전권을 요구하며 레이싱에 집착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페라리>는 1960년대를 그리는 <포드 V 페라리>보다 앞선 시기로 엔초와 페라리사가 위기로 접어드는 초입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위험한 시기이지만 매력적인 이유를 <포드 V 페라리>에서 포드사가 페라리를 분석하며 브리핑할 때 말한 바 있다. 그것은 바로 ‘승리’다.
<페라리>는 <포드 V 페라리>처럼 승리를 위해 엔지니어, 디자이너 그리고 레이서가 협업하여 전문가성을 드러내는 영화는 아니다. 또한 레이싱 경기를 통해 속도의 쾌감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도 아니다. 이 영화는 레이싱 게임의 왕좌를 지키려 애쓰는 한 인물의 고초를 그리는 데 집중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의 전기영화 <알리>(2001)의 접근방식과 유사하다. 만은 <알리>에서 알리가 처음 챔피언 벨트를 딴 날로부터 다시 반등하는 조지 포먼과의 경기까지 10년간의 시간을 그린다. 만이 주목하는 것은 추락을 경험하는 한 인물이 일말의 희망을 품고 다시 비상할 때 밀어붙이는 에너지다. 알리는 만의 주인공의 특징인 고독한 독단자에 적격인 실존 인물이다. 엔초 역시 이에 부합한다. 만이 <알리>에서 알리가 겪는 군중 속의 고독을 사각의 링 안팎의 공간을 대비해 표현했다면, <페라리>에선 회사와 본가가 있는 모데나와 아내 몰래 불륜이 벌어지는 카스텔베트로란 두 지역을 대비한다. 크게 보면 북적거리는 도시와 한적한 시골의 대비라 할 수 있다. 영화 초반 엔초가 급하게 본가로 향할 때 카메라는 엔초가 기어변속하는 장면을 클로즈업해 보여준다. 이 행위는 엔초의 특성과 영화를 대표하는 하나의 이미지라 볼 수 있다. 안정을 취하는 장소로서 카스텔베트로와 변명과 수습을 해야 하는 장소로서 모데나라는 두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영화는 엔초가 이 두 장소를 왕복하며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면서 드러나는 고독감에 주목한다. 엔초가 자신의 모드를 바꿔가며 두 장소를 유지하며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가족이다. 불륜을 저지른 엔초가 가족을 지키겠다는 것은 완벽한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만이 <페라리>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엔초의 모습은 아마도 이러한 모습일 것이다. 엔초 페라리의 영웅적인 면모보다는 그의 모순된 지점을 포착해 보다 현실적인 인물로 그린 것은 마이클 만의 리얼리즘적인 연출 방식이 투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마이클 만의 가족극
<페라리>는 관객의 기대에 어긋난 영화다. 이 영화에서 <포드 V 페라리>의 모습을 기대한다면 실망이 클 것이다. 그렇다고 레이싱영화의 면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페라리의 레이싱카를 완벽하게 구현한 점, 로마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산을 넘나드는 레이싱의 스펙터클과 쾌감, 1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최악의 경주 사고의 사실적인 접근 등 영화에 마이클 만의 정성스러운 터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페라리>를 단순히 레이싱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오히려 가족극에 가깝다. 그렇기에 왕좌를 두고 암투가 벌어지는 사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엔초의 대적자는 외부에 있지 않다. 엔초의 상대는 미국의 포드도, 피아트의 아녤리도 아니다. 그의 대적자는 아내 라우라다. <페라리>에서 가장 빛나는 캐릭터는 페넬로페 크루스가 연기한 라우라다. 초췌한 얼굴을 한 라우라는 남편의 불륜을 의심하며 본가에서 자신의 위용을 드러낸다. 그녀는 이내 총을 꺼내 엔초를 향해 쏘며 자신의 배짱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들이 이렇게 갈등하는 이유엔 아들 디노의 죽음이 자리하고 있다. 부부의 일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 아들의 묘지를 방문하는 것이다. 아들의 묘비를 보고 두 사람의 반응은 극명하게 나뉜다. 묘비 앞에서 아들에게 푸념하듯이 엔초는 온갖 이야기를 하소연하며 울기까지 한다. 이는 밖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초라한 맨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다. 묘지는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는 장소인 동시에 자신의 초라함을 내보일 수 있는 해우소의 역할을 한다. 반면에 라우라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죽은 아들의 사진을 바라본다. 카메라는 롱테이크로 라우라의 얼굴을 담으며, 결국 그녀도 남편처럼 울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눈물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분명한 것은 라우라를 연기한 페넬로페 크루스의 얼굴에 관객은 압도될 것이라는 점이다.
레이싱에서 승리하여 파산을 극복하고 회사를 구하려는 엔초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가족이란 내실이 중요하게 그려진다. 내실이라고 단정 짓기보다는 엔초에게 가족은 또 하나의 이상으로 등장하는 것이 <페라리>의 포인트다. 이미 장병원 평론가가 지적한 대로 마이클 만의 초기작(<도둑>(1981), <맨헌터>(1986))부터 가족에 대한 열망은 주인공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강력한 모티브로 작용했다. 그는 만의 남성주인공들이 겪는 갈등은 “그들의 개인주의가 가족 또는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과 충돌할 때”(<씨네21> 961호, ‘이미지 헌터 마이클 만을 다시 만나라’) 빚어진다고 분석했다. 주로 범죄영화를 만든 만의 영화에서 남성주인공들에게 가족이란 지켜야 할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성장에 발목을 잡는 존재로 등장한다. 엔초 역시 이 딜레마에 빠진 인물로 그려진다. <페라리>의 특징은 가족기업이라는 점이다. 아내 라우라와 공동명의로 설립한 회사이기에 가족은 내부이자 외부이다. 엔초의 대적자로서 라우라는 힘의 균형을 잃지 않고 제 몫을 다하는 여성 캐릭터로 등장한다. 테이블을 두고 대 화(혹은 협상)하는 부부의 모습에서 <히트>의 닐과 빈센트가 대적하며 보여줬던 아우라를 느낄 수 있다.
이외에도 마이클 만의 관록을 느낄 수 있는 두개의 교차편집과 여러 사운드의 배합은 인상 깊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공통점은 음악을 매개로 장면들이 교차편집된다는 점이다. 하나는 미사가 진행 중인 성당과 레이싱 기록을 위한 테스트가 한창인 경주장의 교차편집이다. 미사에서 울려 퍼지는 합창과 자동차 배기음이 섞이면서 엔초와 페라리사가 몰두하는 레이싱이 하나의 성스러운 임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에 시계 초침 소리가 기록 향상을 위한 이들의 세속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장치로 감각적으로 더해진다. 다른 하나는 오페라극장에서 보여준 교차편집이다. 이때의 음악은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의 대표 오페라인 <라 트라비아타> 3막에 나오는 <Parigi, O Cara>다. 하나가 되지 못한 두 남녀의 좌절을 그린 이곡과 <페라리>의 내용은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영화는 오페라 공연을 보며 각각의 인물들이 반추하는 기억의 이미지를 엮어 하나의 비극적인 몽타주를 만들어낸다. 돌아갈 수 없는 그리움의 진원지를 인물들의 비통한 얼굴과 교차편집한다. 동시에 이 몽타주의 끝에 트랙 위를 질주하는 페라리 레이싱카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페라리’라는 회사의 성장 뒤엔 파편화된 가족의 과거사가 있었음을 영화적으로 시사한다. 과거 속 가족의 모습은 이상화되어 있고 회사의 불투명한 미래에 도박을 걸어야 하는 현재의 엔초. 오랜만에 복귀한 마이클 만은 <페라리>를 통해 사면초가에 빠진 단독자로서 남성주인공의 고독함을 다시금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