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쇼잉 업>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 흰 종이에 가볍게 스케치된 몇개의 그림들을 카메라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줌인, 줌아웃하며 훑는다. 이내 화면이 바뀌니 벽 위로 아까의 그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공방에서 조각 작업에 몰두 중인 리지(미셸 윌리엄스)가 등장한다. 시작의 그림들은 조각가 리지가 그려놓은 도안이다. 이미 엄연한 예술 작품으로 간주해도 부족함이 없을 이 그림들을, 영화의 제목 그대로 스크린에 가득 ‘드러내며’ 시작한 <쇼잉 업>은 리지의 도안이 어떻게 조각이 되고 불에 구워져 전시장에 들어서는지까지의 경과를 다룬다. 리지는 도자기 조각가로 활동하는 동시에 어머니와 함께 예술대학 행정실에서 일하며 생업을 잇고 있다. 동료 작가인 조(홍차우)의 옆집에 세를 내고 살면서 작업하고, 낮에는 대학에서 일하는 생활을 정적인 듯 무료한 듯 반복 중이다.
그런데 겉보기에 평화로워 보이는 이 일상의 리듬에 자꾸만 몇개의 노이즈가 찾아든다. 조각을 완성하고 전시에 내놓기 위해 리지가 겪는 어려움은 예술가의 사색적인 고뇌나 추상적인 혼란이 아니다. 동료 작가이자 집주인인 조가 집의 온수보일러를 고쳐주지 않는 탓에 샤워하기가 번거로운 것, 아버지가 자꾸만 이상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수상한 노년을 보내고 젊은 여성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 이러한 아버지를 한심하게 여기는 어머니와의 중간에서 가족을 돌봐야 하는 것, 정신질환을 앓는 동생 션의 행방을 계속 신경 써야 한다는 것 등의 실질적 어려움이 리지의 작업을 방해하는 주요인들이다. 이 와중에도 예정된 리지의 신작 전시 일정은 점차 촉박하게 다가오고, 옆에서 자신보다 좋은 커리어를 거두는 조를 보며 리지는 괜스레 더 초조한 감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더군다나 갑자기 아픈 비둘기를 돌봐야 하기도 하고, 애써 만든 도자기가 불에 타버리기도 하면서 큰일인 듯 큰일 아닌 듯한 자잘한 마찰과 외부로부터 오는 스트레스가 늘어난다. 영화는 이러한 변수들을 리지가 공기처럼 흡수하거나 적절히 대처해가며 자기만의 길을 닦아가는 일상을 제시한다. 으레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가 보여주던 유장한 속도감 안에서 <쇼잉 업>은 유독 소박하고 간단한 이야기를 택한 듯하다.
물리적 장막과 그 너머의 관계들
다만 상술한 <쇼잉 업>의 짤막한 오프닝 시퀀스를 켈리 라이카트의 첫 장편인 <초원의 강>(1994) 속 한 대목과 겹쳤을 때 <쇼잉 업>은 라이카트가 영화의 공간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과 답변으로 확장된다. <초원의 강>은 일상의 권태에 빠진 주부 코지(리사 보먼)가 우연히 권총을 주운 한량 리와 만나면서 겪는 일탈을 그린다. 영화는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코지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 벽에 붙은 그 사진들을 <쇼잉 업>의 오프닝 시퀀스처럼 이리저리 훑는다. 요컨대 한 사람의 인생을 평면 위의 지도처럼 엮어가며 축약하고, 이어지는 영화의 이야기를 통해 살을 붙여가면서 코지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완성한 셈이다. <쇼잉 업>의 경우도 비슷하다. 아직 평면의 세계 속에 갇혀 있는 이 도안들을 어떻게 입체화하여 조각의 형태로 완성하는지가 <쇼잉 업>의 커다란 과업이며, 이 과정엔 라이카트가 영화적 공간을 큰 평면으로 인식해왔던 오랜 습관과 고민이 각인되어 있다.
<쇼잉 업>에서 리지에게 주어진 가장 큰 변수란 집에 갑자기 들어와 반려묘 리키에게 상처 입은 비둘기 한 마리를 책임져야 하는 일이다. 아닌 밤중에 비둘기를 처리해야 했던 리지는 창문 바깥으로 그냥 비둘기를 던져버렸고, 아이러니하게도 다음날 아침 조가 그 비둘기를 주워 리지에게 치료를 맡기게 된 것이다. 리지는 날개에 붕대를 매놓은 비둘기가 숨을 헐떡일 때 동물병원에 데려가고, 따뜻하게 해주려 물주머니를 곁에 놔주고, 임시 거처인 종이 박스가 더럽혀지지 않게 수시로 청소까지 해줘야 한다. 안 그래도 하루하루가 스트레스인 한 예술인이자 생활인의 일상이 이 자그마한 한 마리의 새에게 침범당해버렸다.
외부로부터의 침입, 타자의 갑작스러운 침범은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에서 인물들의 불안이나 주요 사건을 초래하는 주원인이었다. <웬디와 루시>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알래스카까지 차를 타고 이동 중인 웬디(미셸 윌리엄스)는 자동차 안에서 잠을 청하다가 주차를 하면 안된다는 건물 관리인에게 쫓겨난 뒤 험한 방랑기에 진입했다. <어떤 여자들>의 변호사 로라(로라 던)는 불쑥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오는 진상 고객 풀러(재러드 해리스)로 인해 이상한 납치 사건을 마주하게 됐다. 이처럼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에서 한 인물이 가진 물리적 공간은 언제나 바깥 세계의 개입에 취약한 임시방책에 불과하다. 인물들의 공간과 바깥 세계 사이의 물리적인 장막이 유효해지지 않을 때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는 본격적으로 진동하기 시작했다.혹은 물리적 공간의 분리가 인물들 사이의 심리적 긴장감으로 즉각 치환되기도 한다. <어떤 여자들>의 지나(미셸 윌리엄스)는 텐트 안에 있는 남편과 딸이 크게 웃는 소리를 듣고 텐트로 들어간다. 그러나 딸은 여전히 엄마와 어울리길 싫어하고 남편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퍼스트 카우>의 두 남자 쿠키와 킹 루는 남의 집 바깥에 있는 젖소로부터 몰래 우유를 짜기 위해서 계속 소 주인의 집을 살피며 긴장해야 한다. 대개 잔잔한 움직임으로 가득한 <쇼잉 업>에서 유독 카메라가 흔들리며 줌인하는 이질적 순간 역시 건물 외부에서 조의 높은 작업실 내부를 앙각으로 촬영하는 장면이다.
이처럼 켈리 라이카트의 세계는 마치 거대한 평면 위에 아주 얇은 막으로 자기의 공간을 잠시 점유하는 이들의 자그마한 소동극 혹은 커다란 군상극처럼 보였다. 여기서 영화가 하는 역할은 세계의 얇은 막들이 잠시 거둬지고 흐릿해지거나 강조되는 순간들을 포착하며, 결국 입체적으로 관계 맺을 수밖에 없는 사람과 존재들의 무수한 연결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 좌표 찾기의 연결감은 <퍼스트 카우>처럼 서부 시대와 현대 미국이란 시차를 두고 이루어질 수도 있고, <어떤 여자들>의 가벼운 옴니버스식 구성처럼 한 마을 근처 사람들의 순간적인 겹침과 마주침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이는 경찰인 아버지 라이더(딕 러셀)가 잃어버린 총을 주운 리와 함께 살인범으로 쫓기게 된 딸 코지, 그 딸을 쫓는 아버지의 오묘하게 복잡한 추적극을 그렸던 <초원의 강> 때부터 나타난 라이카트 고유의 작법이다.
비둘기의 날갯짓과 시선
<쇼잉 업>에서 켈리 라이카트의 세계가 이르게 된 진일보는 리지가 살피는 비둘기가 리지의 공간을 침범하고 쫓겨난 뒤에 다시 그곳으로 들어선다는 점, 그리고 마침내 그 비둘기가 회복하여 리지의 전시장 바깥으로 비상한다는 결말에 있다. 집이라는 완연한 막을 뚫고 자신을 습격한 생명체를 죄책감이든 책임감이든 동정심이든 간에 다시 제 손으로 돌본다는 일은 리지, 혹은 레이카트가 도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관용으로 전개된다.
리지의 동생 션은 “예술은 대지가 말하는 거야”라며 집 마당을 삽으로 파 커다란 구멍을 만든다. 리지는 션의 다소 기이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리지, 그리고 라이카트에게 평면의 세계에 일어난 수직적 층위의 형상은 무척이나 이상한 것으로 여겨진다. 높이의 차이로 인한 낙차의 이미지는 그간 라이카트의 영화에서 분명한 이질감으로 다가오는 편이었다. <초원의 강>의 초반부에서 라이더가 쫓던 범인은 프레임의 왼쪽 끝에 있는 담벼락 아래로 불쑥 사라지고, 라이더 역시 이어서 그 아래로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화면의 콘티뉴이티가 끊겨 마치 점프 시퀀스와도 같은 해변가의 도주 장면으로 영화가 급격히 전환되는 식이었다.
<쇼잉 업>에서도 인물들 사이의 물리적인 낙폭은 그들의 이격감을 야기한다. 영화 초반의 리지는 2층 발코니에서 조에게 온수보일러를 고쳐달라고 하지만 그것은 이뤄지지 않고, 중반부에서도 리지는 집 계단 위로 올라가는 조에게 다시금 보일러 얘기를 하지만 둘은 결국 다투게 된다. 이 다툼의 장면 이후 <쇼잉 업>은 다소 의문스러운 숏 하나를 남긴다. 정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자그마한 나무 오두막 안에 두 여성이 나란히 마주 앉아 살갑게 대화하는 짧은 인서트숏을 삽입한 것이다. 이는 라이카트의 평면적 세계에선 개인의 공간적 장막들뿐 아니라 물리적 높이의 차이 역시 심리적 거리감의 주된 원인이 된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이 높이의 차이는 응당 리지와 비둘기라는, 땅의 생물과 하늘의 생물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괴리감이다.
그러니 끝내 하늘로 날아간 비둘기의 비행, 수평과 수직을 넘나드는 이 자유로운 움직임은 라이카트가 인지해온 평면적 세계의 불편한 강박관념과 침입의 불안감을 멋지게 깨부수는 동작으로 다가온다. 새의 날갯짓은 벽에 붙은 사진과 도안으로 인물과 세계의 평면을 바라보던 라이카트의 카메라가 도저히 쫓을 수 없는 무한함의 좌표 이동이며, 결국 영화가 받아들여야 할 너른 자유의 감각이다. 보호라는 명목으로 한 공간(자그마한 박스)에 구속했던 비행체를 하늘로 날려보내는 순간의 상쾌함이야말로 리지와 라이카트가 진정으로 목표하게 된(될) 창작의 새로운 영역인 것이다. 리지가 만든 조각의 반죽은 불가마에 누운 채로 들어간다. 그리고 전시장에선 곧추세워져 수직의 형태로 관객에게 제시된다. 수평과 수직의 차이, 혹은 평면과 입체의 차이. 이 간극의 유의함을 수긍하는 태도 변화의 과정이 리지의 조각과 <쇼잉 업>의 이야기를 완성한다. <쇼잉 업>은 이 유연한 관용의 태도가 여하간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예술의 결과물을 가장 유의하게 완결지을 수 있는 비결이라 말한다.
리지의 도자기를 반쯤 태운 동료는 되레 “불완전한 맛도 있고, 난 오히려 이쪽이 취향이야”라는 의견을 내놓지만 리지는 쉽게 동의하지 못한다. 하지만 전시장에 온 관객과 가족들, 조는 리지의 작품에 깊이 감응하고, 다 함께 비둘기의 비상을 목격한다. 이후 리지는 가벼운 마음으로 조와 비둘기를 찾는 산책을 나서 비로소 저 높이 있는 하늘을 길게 바라본다.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카메라는 라이카트의 영화에서 보기 드문 상승의 움직임을 취하고, 영화는 비둘기의 자그마한 울음소리를 들려준다. 주로 동물과 함께했던 그간의 영화적 습관을 넘어 (어쩌면) 새의 시선 자체로 동화된 이 카메라의 움직임은 이미 거장의 반열에 들어선 라이카트의 더 입체적인 세계를 흥분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