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영화’라는 단어는 마치 ‘프랑스 바게트’나 ‘이탈리아 파스타’처럼 너무도 익숙해서 평소엔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말처럼 느껴진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 개봉한 두개의 미국영화 <쇼잉 업>과 <페라리> 역시 사실 하나의 범주에 함께 넣기엔 꽤 달라 보이지만 통상적인 합의에서 미국영화로 묶이는 두편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 느슨해 보이는 연결고리를 들춰보면 두개의 익숙한 이름이 나와 흥미로움과 동시에 묘한 궁금증을 일으킨다. 그 이름들은 바로 <쇼잉 업>의 제작사이자 2012년 이후 전세계 영화 문화계를 주름잡고 있는 제작배급사 A24와 <페라리>의 배급사이자 <기생충> <슬픔의 삼각형> <추락의 해부> <아노라>로 근래 칸영화제의 황금종려상 수상작을 연이어 택하며 이름을 뽐내고 있는 제작배급사 네온(NEON)이다. 90년대부터 활동한 인디 영화계의 거장 켈리 라이카트, 그리고 약 40년간 할리우드 작가주의의 자부심을 지켜온 마이클 만의 영화가 두 영화사의 이름을 걸고 나온 일은 2020년대 이후의 미국영화가 직면한 변화를 바라보는 일로 이어질 법하다.
‘미국영화’를 떠올릴 때 느껴지는 당연함의 감각은 미국의 영화산업이 견지해온 거대한 전략과 규모 위로 ‘아메리칸 시네마’라는 일련의 미국영화가 장르와 스타일 면에서 ‘미국’이란 정체성을 철저히 지켜왔기 때문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20세기를 포괄하는 고릿적 이야기로 들어서기보단 미국영화가 새로운 분기를 마주했던 2008년경으로 시계를 돌리는 쪽이 좋을 듯하다. 2008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에 9·11 테러사건 이후 미국이란 국가의 불안감을 본격적으로 극화한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등이 선정되며 90년대 미국으로부터 태동한 작가주의 감독들(스티븐 소더버그의 1990년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황금종려상 수상, 1994년 쿠엔틴 타란티노 <펄프 픽션>의 황금종려상 수상 등)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던 때다.
동시에 샘 레이미, 브라이언 싱어 등 비주류에서 출발했던 감독들이 메이저 스튜디오의 간택을 받으며 상업성과 작품성을 두루 챙기기도 했고, 이즈음 20세기의 영웅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는 <우주전쟁> <아바타> 등으로 미국의 신화를 해체하거나 CGI 기술의 새로운 발전을 도모하기도 했다. 한편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는 10년간의 군림을 시작하며 할리우드 상업 프랜차이즈의 제국주의를 공고화하고 극장 ‘테마파크’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렇게 대규모 할리우드영화의 튼튼한 기반 위로 ‘미국영화’의 비주류와 주류적 정체성은 조화로이 혼합되어 그 위용을 떨치는 듯했다.
포용력의 길
하지만 지금 미국영화의 이름은 다소간의 혼란에 빠져 있다. 주류와 비주류, 상업과 인디 영화의 방향성 차이가 심해지고 ‘미국영화’의 정체성이 변모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을 비롯한 멀티버스 서사의 한계에 직면한 MCU가 <데드풀과 울버린> 정도를 제외하곤 2020년 이후 10억달러 이상의 수익을 내는 영화를 만들지 못하며 주춤한 상태다. 리더의 몰락에 따라 전반적으로 침체한 산업 구도 속에서 미국영화는 두 갈래의 길을 택했다. 하나는 포용력, 하나는 향수다.
포용력을 택한 쪽은 당연히도 서두에 언급한 신진 제작배급사 A24와 네온 등이다. 2012년 이후 본격적으로 움직이며 조너선 글레이저의 <언더 더 스킨>,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랍스터>, 아리 애스터의 <유전>, 로버트 에거스의 <더 위치> 등 유럽의 작가주의와 미국의 장르영화를 적절히 융합한 A24의 포용 전략은 일견 탁월했다. 2018년경 기성세대의 아트하우스 영화사인 폭스 서치라이트(현 서치라이트 픽처스), 안나푸르나 픽처스의 시장 점유율을 제친 A24의 만개는 역시 다양성이란 화두로 세계적 열풍을 일으켰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 이하 <에에올>)일 것이다. 1400만달러의 제작비로 월드 와이드 1억4천만달러 수익을 거뒀고,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작품상을 포함해 6관왕에 올랐다.
그러나 <에에올>로 대표되는 A24의 실질적 영향력이나 네온의 파급력 등이 90년대 선댄스 세대와 과거 미라맥스가 거뒀던 성취 정도냐고 묻는다면 의문부호가 따른다. 상술한 <에에올>의 최대 흥행은 사실 90년대에 <펄프 픽션>이 거뒀던 제작비 850만달러, 월드 와이드 수익 2억1천만달러의 기록이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바톤 핑크> 등의 영화적 쇄신에 비하면(물론 극장업의 규모 차이, 수익 외 영향력의 측면에서 절대적인 정량 평가는 불가능하겠지만) 다소 조용해진다. 90년대 인디 감독에서 출발해 1억7천만달러를 벌어들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같은 작품이 이어져 나오던 2010년대 전후와도 여실히 다른 상황이다. 네온의 라인업 역시 황금종려상은 가득하나 <기생충>이 제작비 1100만달러로 월드 와이드 2억6천만달러, <슬픔의 삼각형>이 1400만달러로 2억5천만달러 수익을 기록한 정도를 포함해도 규모 면에서 중형 제작배급사의 형태를 넘어서긴 어려운 실황이며, 사실상 그 유명세는 미국영화의 제작보단 외화의 북미 배급으로 떨친 쪽에 가깝다.
90년대에 시작해 2010년대까지 아메리칸 시네마의 주류로 자리 잡았던 스타 감독(흥행과 비평 양측에서 성공한)과 제작자들은 스티븐 소더버그를 위시한 선댄스 세대로 일컬어졌던 일련의 ‘미국영화’ 동지들 혹은 짐 자무시 같은 미국적 토양의 인디 작가들이었다. 반면에 유럽, 아시아의 영화적 자산을 양껏 흡수하며 깊이보단 넓이를 택한 A24(<미나리> <성난 사람들> <패스트 라이브즈> <존 오브 인터레스트> 등)와 네온(<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기생충> <추락의 해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등)의 성취는 좋게 말하면 포용력, 다르게 말하면 미국의 고전적 정체성을 흐릿하게 만드는 쪽에 가까웠다. 물론 오바마 시대 이후 미국이란 국가의 정치적 다양성이 대중문화에 전이되었다는 시각도 유의하며 A24의 성장에 함께한 미국 감독으로 아리 애스터, 새프디 형제, 데이비드 라워리, 숀 베이커, 대니얼스 형제 등의 이름이 거론되긴 한다. 다만 이들 역시 앞서 말한 선댄스 세대와 같은 특정한 스타일적 경향이나 하나의 세대로 뭉쳐질 법한 동시대적 일관성, 또는 디지털영화로 만들어진 거스 밴 샌트의 <엘리펀트>(2004)나 데이비드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2006) 같은 매체적 혁신을 불렀다고까지 보기는 어렵다.
미국 보존의 법칙
다만 한편으론 미국 보존의 법칙이라도 있는 것인지, 대규모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입을 모아 우리가 알던 ‘미국’이란 과거를 파먹고 살고 있다. 2020년 이후 월드 와이드 10억달러를 돌파한 대개의 미국영화는 <탑건: 매버릭> <아바타: 물의 길> <바비> <인사이드 아웃2> 등 기존 대형 스튜디오가 지닌 IP나 과거 작품을 활용한 ‘향수’ 자극형의 작품들이었다. 미국영화의 80~90년을 지탱했던 이름들이 슬금슬금 재등장하여 할리우드의 유산을 나눠 먹는 모양새는 미국영화의 미래를 걱정하게 만든다. 2024년 부활한 <비틀쥬스 비틀쥬스> <에이리언: 로물루스> <글래디에이터2>, 혹은 2025년에도 이어질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등의 라인업을 보노라면 할리우드가 지난 20년을 삭제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미국영화란 제국을 일구었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를 비롯해 폴 토머스 앤더슨의 <리코리쉬 피자>, 제임스 그레이의 <아마겟돈 타임>, 알렉산더 페인의 <바튼 아카데미> 등 2010년대까지 동시대의 미국을 첨예하게 해체했던 주류 작가들은 이상할 정도로 과거의 미국을 회고하고, 미국영화의 살아 있는 박물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사실상 유작이 될 <배심원 #2>는 제작비도 제대로 회수하지 못한 채 워너브러더스의 미움을 받고 있음이 공공연해졌다.
요컨대 지금의 미국영화란 한쪽에선 기존의 미국다움을 최대한 지우려 하고, 한쪽에선 최대한 기존의 미국다움을 지키며 기억하려 하는 양자택일의 긴장감 속에 놓여 있다. 이것이 오바마 시대에서 트럼프 시대로 넘어가며 전환된 미국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패러다임을 투영한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사회의 양극화가 곧 영화의 양극화를 부르고, 산업의 흥행과 비평적 성과 측면에서 조화를 지키는 신진 작품이나 감독이 드문 실정을 만들었다. 그레타 거윅이 <바비>로 14억달러를 벌긴 했지만 <바비>가 그레타 거윅의 기존의 색채를 온전히 유지했단 의견을 내기에도 무리가 있다. 이처럼 지금 감지되는 ‘미국답지 않은 포용력의 영화들’이 새로운 아메리칸 시네마의 물결로 정합적인 평가를 받을까, 혹은 ‘미국을 회고하는 향수의 영화’들을 끝으로 우리가 알던 미국영화의 흐름은 끊기고 말까. 산업과 매체의 격변 속에서 100년 넘게 버텨왔던 아메리칸 시네마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