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인터뷰] “미니멀한 연기 통해 공포 살렸다”, <하얼빈> 배우 박훈
2025-01-09
글 : 이유채
사진 : 오계옥

2024년 3월 배우 박훈에게 좋은 소식이 있었다. 홍콩에서 열린 제17회 아시아필름어워즈(AFA)에서 <서울의 봄>의 문일평 역으로 남우조연상을 받은 것이다. 첫 연기상 트로피를 어디에 두었냐고 묻자 박훈은 “전시할 성격이 못 된다며 어디 안 보이는 곳에 잘 보관했다”라고 말했다. 이 일화가 증명하듯 박훈은 2015년 <오 나의 귀신님>으로 매체 데뷔 뒤 “어제보다 더 나은 나를 바라지 않고 내 기준에 맞춰 충실하게 연기”해왔다. 배우 자신도 인정한 선 굵은 마스크와 오랜 연극과 뮤지컬 생활로 다져진 또렷한 목소리를 가져 선역이든 악역이든 신념 있는 역할에 주로 소환되었다. 지난해 12월24일 개봉한 <하얼빈>에선 이견 없는 악당, 일본군 모리 다쓰오로 분했다. 2025년으로 건너가기 직전, 박훈을 직접 만나 다쓰오가 등장한 장면 하나하나에 관해 물었다. 진지하게 답을 내놓는 그의 눈빛은 <하얼빈> 속 동지들처럼 뜨겁게 빛났다.

- 실물이 궁금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아무도 모른다>, 영화 <공조2: 인터내셔날> <서울의 봄> 등 대표 출연작들을 쭉 놓고 보는데 헤어스타일과 체격이 모두 달라서 실제 모습을 잘 모르겠더라. 외형을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배우라고 짐작했다.

알아주시니 기분 좋고 고맙다. 고착된 이미지가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 역할마다 변주를 준다. 그래서 매번 머리카락과 수염을 길렀다가 잘랐다가, 살을 찌웠다가 뺐다가 한다. 캐릭터가 입는 의상도 스타일리스트와 충분히 상의한다. “박훈이다!” 하고 즉각 알아보는 대중이 없어도 좋다. 배우는 자신이 아닌 연기하는 캐릭터를 보여주는 사람이니까. 체중 조절의 경우 나이가 들수록 힘든데 주어진 시간까지 얼마 없으면 정말 고되다. 그렇다고 타협할라치면 스트레스받는다. 원래 뭐든 잘 인정하고 완벽주의자는 더더욱 아닌데 일할 때만큼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다.

- <하얼빈>에서는 삭발한 게 주목을 받았다.

삭발했다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칭찬을 받고 있는데 창피하다. 그건 노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우가 맡은 역할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은 당연한 거다. 삭발은 다쓰오가 제국주의에 심취한 인물이라는 걸 시각적으로 증명할 일종의 도구였다. 갈수록 더 집착하게 됐다는 걸 보여주려고 일부러 중반 이후 촬영 때 밀었다. 전체적으로 다쓰오는 전형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 이야기에서 일본 군인이 어떻게 전형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배우들은 어떤 역할이든 그 안의 입체성을 발견하려고 하는데 다쓰오는 그런 유형의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냥 악당이고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고 전쟁광인 거다. 그런 식의 접근이 우민호 감독님의 시선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 우민호 감독이 직접 전화해 콕 집어 모리 다쓰오 역을 제안했다고.

통편집됐지만 <남산의 부장들>로 감독님과 연을 맺었다. 그 뒤로 3~4년 뒤 <서울의 봄>을 찍고 있을 때 전화를 주셨다. 작품과 캐릭터 설명을 잠시 듣고 나중에 대본을 읽는데 다쓰오가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인물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내 해석으로 <하얼빈>의 이토 히로부미(릴리 프랭키)는 일본의 정신이고 다쓰오는 그걸 실제 행하는 어떤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이 둘을 합친 게 바로 당시의 제국주의 일본이었다. 이런 생각을 전제로 연기했다.

- 다쓰오가 첫 등장하는 신아산 전투 신의 비하인드가 궁금하다. 눈과 진흙을 뒤집어쓴 상황에서 배우들의 추위로 새빨개진 귀와 하얀 입김이 눈에 들어오더라. 얼마나 혹독한 현장이었나. 실내 세트 촬영이었던 <노량: 죽음의 바다> <서울의 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을 것 같다.

스태프, 배우 할 것 없이 정말 고됐지만 어떻게 보면 참 행운이 따른 현장이었다. 그날 광주에 몇십년 만에 폭설이 내려서 리얼한 촬영이 가능했으니까. 눈 때문에 세트가 무너졌는데 그게 그대로 너무 현실감이 넘쳤다. 전투 시작 전 안중근과 동지들이 언덕 밑에서 얘기를 할 때 확 불던 눈바람도 강풍기를 쓴 게 아니라 그 순간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무척 추워서 모두가 대사를 힘겹게 잇고 사방이 흙탕인지라 액션도 탁탁탁 맞춰서 못했는데 그게 전쟁의 실감을 만들어냈다. 원래 신아산 신은 밤 신이었는데 그 펄밭 같은 난장을 살리기 위해 낮 신으로 바뀌었다.

- 거사 3일 전, 러시아 대동공보사에서 다쓰오 일당은 안중근과 동지들을 습격한다. 혼자 총을 든 채 공부인과 안중근이 탄 마차를 쫓던 다쓰오의 모습이 영화에 인상적으로 담겼다. 라트비아에서 이 신을 찍을 땐 어땠나.

라트비아의 시가지를 막아놓고 찍었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했던 기억이 난다. 달리다가 도중에 자빠져야 해서 아대를 찼어야 했는데 내가 그냥 가자고 했다. 그 정도로 시간이 없었다. 한번밖에 없는 기회에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넘어졌을 때 아프지도 않았다.

- 여기서 다쓰오는 이창섭(이동욱)을 잡는 데 성공한다. 이창섭에게서 “안중근은 네 놈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고결한 인간”이라고 비교당하고 “바보 새끼”란 말까지 듣고 나서야 마지막에 방아쇠를 당기는 결정을 내린다.

우선 이 신을 찍을 때 이동욱씨의 새로운 얼굴을 보고 놀란 나머지 엔지를 냈다. (웃음) 상대가 말을 하는 와중에 총을 쏴서 관객을 놀라게 하는 연기 방식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식의 상업적인 접근을 철저히 배제하고 싶었다. 이 신에서는 이창섭의 말을 대충 들으려고 했다. 조선말을 가볍게 여기는 것에서 다쓰오가 조선인을 하등하게 보는 태도가 드러나니까. 대신 이창섭의 호흡에 집중했다. 숨소리를 통해서도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창섭의 말을 듣는 동안 다쓰오는 그가 고문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거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끝을 본 거고.

- 김상현(조우진)과의 일대일 식사 신에선 모멸감을 느꼈다. 마치 짐승에게 먹이를 던져주듯이 김상현의 접시에 스테이크를 올려놓더라. 그가 조선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장면에서 내가 미니멀한 연기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정적인 공포가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 스테이크를 썰 때, 그리고 그걸 내던질 때 움직임을 많이 주지 않으려고 했다. 방독면을 쓴 채 김상현을 고문하는 앞선 장면에서도 그랬다. 여기서 김상현과 손이 살짝 닿는데 호들갑 떠는 기색 없이 천천히 움직이다가 싹 뺐다.

- 채가구역에서 우덕순(박정민)을 쏘고 김상현을 구타하는 신은 좁은 공간에서 찍어서인지 압박감이 상당했다.

실제로 공간이 굉장히 좁아서 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 좁은 데서도 가능한 각을 만들어내는 홍경표 촬영감독님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 신은 우덕순과 김상현의 가슴 뜨거운 이야기로 형성된 따뜻한 분위기가 다쓰오의 등장으로 긴장감 있게 바뀌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임했다. 여기서 박정민 배우를 칭찬하고 싶다. 박정민 배우는 좋은 변수 같은 친구다. 컷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가도 괜찮으세요?”라고 물을 때마다 “너무 좋지, 정민아!”라고 응수했다. 그의 달라지는 연기에 따라 나도 다른 연기를 보여줄 수 있으니까.

- 하얼빈역에서 다쓰오가 공부인의 칼에 찔려 죽은 줄 알았다.

내가 너무 세게 맞았나. (웃음) 이 신을 찍을 때 내가 (전)여빈이에게 이 신은 공부인이 다쓰오를 공격하는 장면이 아닌 막아서는 장면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공부인, 이창섭, 우덕순으로 대표되는 동지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막아선 덕분에 안중근이 거사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게 보였으면 했다. 그랬을 때 <하얼빈>이 감독님이 말한 안중근과 그 동지들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 다쓰오의 마지막 신을 찍을 땐 어땠나.

그 신 역시 김상현이 결자해지하는 신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래서 그 신을 찍을 때 다쓰오의 죽음보다 김상현의 행동, 그의 다음 스텝에 대해 더 많이 생각했다. 한 가지 에피소드라면 여기서 다쓰오가 “김구는 어디 있나?”라고 묻는데, 예전에 <녹두꽃>이라는 드라마에서 김구 역할을 했던 게 떠올라 재밌었다.

- 배우 박훈에 관해 질문하고 싶다. 배우가 된 계기를 묻는 질문에 탄광촌에서 TV를 보던 어릴 적 이야기가 꼭 나오더라.

극장이 없는 시골에서 자랐다. 그때 유행하던 할리우드영화, 홍콩영화를 비디오로 주야장천 봤다. 20살이 넘어서야 극장에 처음 갔고 그때 본 영화가 <쉬리>였다. 내용적인 면에서도 놀랐지만 압도적으로 큰 화면과 너도나도 “끝내주지 않냐”라고 말하면서 우르르 나오는 관객들의 모습이 경이로웠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서 ‘저 화면에 나와야겠다’라고 마음먹었다. 사실 영화배우에 대한 꿈은 10대 때부터 있었다. 다만 방법을 몰랐고 재수는 하지 말라는 부모님의 뜻에 맞춰 뮤지컬학과를 갔다. 그 뒤로 다른 배우들처럼 대학로 연극으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드라마 출연 제안이 들어올 때면 감사한 마음으로 응했다. 그런데 드라마 스케줄이 많아지니 정작 영화를 못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이러다가는 평생 영화를 제대로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악물고 4~5년은 영화에만 전념하자고 결심하고 계속하다 보니 <서울의 봄> 같은 메가 히트작도 만나고 시간이 더 흐른 뒤에 보아도 근사할 <하얼빈> 같은 작품에도 출연했다. 언젠가는 영화배우가 될 때가 올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때가 온 것이다.

-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던 “낙관주의자가 아니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마지막 답변이다.

희망이 없으면 어떻게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내세울 게 전혀 없는 내겐 그거라도 있어야 했다. 어떻게 보면 낙관주의는 내게 위로였다. 잘될 거고 좋아질 거라고 자신에게 말해주면서 나를 보호해왔다. 연극할 때부터 그랬다. 무대를 나가는 마지막 커튼을 열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주문을 걸곤 했다. 이제 나를 보호하는 또 다른 방법은 촬영이 끝날 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고 그다음엔 나를 놔주는 거다. 작품의 성패가 곧 나의 성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배우로서 오래갈 수 있다.

“안중근은 어디 있나?”

“<하얼빈>을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관객들이 이 말을 계속 들으면서 실수하고 실패하면서도 대의를 향해 걸어갔던 안중근에 대해 생각해주길 바랐다. 좀더 나아가서는 이 질문이 잊고 살았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가 가진 안중근의 정신, 그러니까 작은 한 걸음을 내디딜 용기를 끄집어내는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그래서 그렇지 않은 대사도 ‘안중근은 어디 있나?’로 바꿔 달라고 요청했었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