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인 할머니는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했다. 몇 세대 후 미국인 손자들은 불안장애와 우울증을 달고 산다. 역사적 고통의 거대함 앞에서 현재의 개인적 고통은 한없이 작아 보인다. 하지만 감독 겸 배우 제시 아이젠버스는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을 쓰고 찍으면서 그것이 덜 중요하거나 정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격이 딴판인 사촌 형제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와 벤지(키어런 컬킨)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고향 폴란드를 방문한다. 홀로코스트 역사를 되짚어보는 이 여정엔 배우 윌 샤프와 <더티 댄싱>(1987)의 스타 제니퍼 그레이가 함께한다. 제40회 선댄스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고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첫 상영을 가진 영화 <리얼 페인>의 네 배우가 고통의 여러 교차점에 선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스스로 검열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제시 아이젠버그 감독 겸 배우, 배우 키어런 컬킨
- 제목 <리얼 페인>(A Real Pain)을 여러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제시 아이젠버그 다소 모호하게 들릴지라도 여러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제목을 원했다. 타이틀이 처음 벤지의 얼굴 위로 나타나도록 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제목이 그의 성격을 가리킨다고 생각할 것이다. 짜증나지만 사랑스럽기도 한 사람으로, 무엇보다 그는 고통받고 있다. 이윽고 투어 그룹의 참여자들이 2차 세계대전과 르완다 집단학살의 트라우마를 경유한 슬픔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제목에 더 깊은 의미가 생겨난다.
- 감독의 가족사를 바탕으로 직접 쓰고 찍은 영화다. 사적인 감정이 픽션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해 쓰려던 내용을 삭제한 적이 있나.
제시 아이젠버그 1939년까지 조부모님이 살았던 폴란드의 집과 마을에서 촬영했기에 개인사에 기반을 둔 영화가 맞다. 하지만 작품의 가장 개인적인 부분은 배경보다 인간관계, 특히 내가 부러워하면서도 피하고 싶고,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사람(극 중 벤지)과의 관계를 담은 데 있다. 글을 쓸 때만큼은 아무도 읽지 않을 거라고 가정하기 때문에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을 쓸 수 있었다. 스스로 검열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 할머니의 죽음과 뒤이은 자살 시도 등 벤지가 겪어온 일을 연기하는 것은 어떤 경험이었나.
키어런 컬킨 사전 준비를 최소화하고 현장에서 느끼는 대로 표현했다. 벤지는 병적일 정도의 심한 감정 기복을 겪으며 당면한 상황마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매우 자유로운 경험이었다.
- 뉴욕 공항을 출발한 데이비드와 벤지는 폴란드의 여러 지역을 관광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로드무비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참고한 영화가 있다면.
제시 아이젠버그 특정 로드무비를 참고하진 않았지만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사이드웨이>(2004)와 존 휴스 감독의 <자동차 대소동>(1987)을 좋아한다. 프로듀서 에마 스톤도 <자동차 대소동>의 엄청난 팬이기에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장르나 형식에 집중하기보다는 현세대를 둘러싼 개인적인 감정을 탐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 여정의 끝에서 할머니 댁을 방문한다. 돌아가신 분을 기리기 위한 제스처를 취하던 두 사람이 현지인과 갈등을 겪는 에피소드로 그려지는데, 이 장면은 현대사회에서 홀로코스트를 거치며 완전히 새롭게 형성된 유대인 정체성에 대한 오해나 오용 가능성에 대한 논평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제시 아이젠버그 대본에서 가장 코믹하면서도 반전이 있는 부분이다. 인물이 가진 큰 기대나 이상이 현실 세계와 만나면서 약간 무너지기를 바라는 내 취향과 맞닿아 있다. 이 장면에서 슬픔, 존경심, 그리고 경외심의 한계를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는 조상들과 그들의 고난에 대해 큰 슬픔과 경외심을 가질 수 있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것을 기리려는 시도는 거의 불가능하다. 마치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영화를 찍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타인의 슬픔과 경외심에 관심이 없는 현대사회에서 무언가를 기리려는 것은 항상 어렵고 어색하게 느껴진다.
‘아름답고, 열려 있고, 취약하며… 새로운‘ 배우 윌 샤프, 제니퍼 그레이
- 비유대인으로서 동유럽사, 그중 유대 역사를 전공한 제임스는 명석하고 친절한 가이드다. 관객은 그의 안내를 따라 바르샤바, 루블린 곳곳의 홀로코스트 유적을 방문하던 중 격렬하게 반기를 드는 벤지를 마주하게 된다. 연구와 통계에 입각한 사실 전달에만 치중한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벤지의 비난은 제임스에게 감정적, 지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윌 샤프 제임스의 의도는 순수했다. 유대인 문화와 역사에 열정을 갖고 있고 이를 전하고 싶어 한다. 벤지의 방식이 과격하긴 했지만, 비로소 제임스는 작은 위기 속에서 자기 성찰을 할 수 있었다. ‘아마도 난 그냥 자동조종 모드로 가고 있었을지도 몰라’ 하면서. 궁극적으로 벤지의 피드백에 감사하고 그와 감정적인 연결을 느끼게 된다. 존재를 뒤흔들 만큼의 엄청난 비난을 가한 그를 결국은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사촌 데이비드가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하고 싶어 하는 벤지의 매력이다.
제니퍼 그레이 이 장면에서 제임스는 정신에서 깨어나서 마음과 몸, 그리고 인간성으로 돌아오는 것 같다. 제임스의 자아는 부서지고 부드러워진다. 그 이후에 탄생하는 것은 아름답고, 열려 있고, 취약한 당신의 새로운 모습이다. 모든 학문과 공부를 여행에 담아내려는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는 영화가 그리는 홀로코스트 투어의 정점에 있다. 촬영을 위해 이곳을 방문한 경험을 회상한다면.
제니퍼 그레이 어머니와 아버지쪽 모두 라트비아와 우크라이나에서 홀로코스트를 피해 도망친 역사가 있다. 유대인으로서 강제수용소가 자극해올 감정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그곳에서 수천 켤레의 어린이 신발을 보고, 아이들이 정말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마주하면서 그때의 고통이 진짜였다는 것을(real pain) 뼈저리게 느꼈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준 고통의 에너지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충격적이었다.
윌 샤프 영화가 펼쳐낸 유머와 코미디가 많이 있지만, 강제수용소 촬영을 준비하는 과정만큼은 묘하게 긴장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첫 번째 수용소 방문이었고, 대부분의 크루들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제시는 수용소 장면에서 어떤 대사도 넣지 않고, 인물들이 그저 말없이 공간을 지나가는 식으로 연출했다. 그 장소에서 경험한 충격과 겸손 같은 것들이 제시의 영화적 방식으로 잘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 타민족이 겪고 있는 압도적인 고통에 우리가 연대할 수 있을까.
제니퍼 그레이 <리얼 페인>은 고통의 보편성에 관한 이야기다. 어떤 고통은 보이지만 어떤 고통은 보이지 않듯이, 유대인 고유의 고통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이 겪은 고통을 다룬다. 그리고 인간이 고통에서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 결국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윌 샤프 제시는 구체적인 상황을 통해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특정 사건과 특정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결국 인간관계, 연결, 정체성, 가족, 뿌리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역사를 잊지 말자’는 메시지를 넘어서, 역사에서 배운 교훈이 현재와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가 현재의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