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 없이 들이닥친 재난 앞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았다. 재난이 휩쓴 자리를 공백으로 남겨두는 대신, 남은 이들은 서로 의지하며 폐허를 복원해간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신작 <파문>은 방사능 유출 사건 이후, 자취를 감춘 남편 대신 가족을 지켜온 요리코의 일상을 바라본다. 사이비종교의 교리에 따라 생명수를 숭배하며 마음을 다스리던 요리코에게 중년에 접어든 남편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달가울 리 없다. 영화 <파문>은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와 제26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선보인 바 있으며 제33회 일본영화비평가대상에서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이 <파문>을 통해 짚어낸 동시대 일본 사회의 문제점, 재난 이후 삶의 재건 방식에 관해 다룬 문주화 평론가의 긴 리뷰를 전한다.
<안경> <카모메 식당>을 비롯해 전작인 <강변의 무코리타>에 이르기까지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을 떠올렸을 때 흔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수평선이나 고즈넉한 언덕이 보이는 목가적인 풍경과 그 풍경 안을 유유자적하며 걸어가는 보통의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감독의 신작 <파문>은 마치 낭만적인 풍경화를 재현한 것 같은 이전의 영화들과는 사뭇 다르다. 영화는 국가적 재난이자 비극이었던 동일본대지진을 관객으로 하여금 목도하도록 하면서, 재난이 초래한 한 가족의 해체와 남겨진 중년 여성의 삶을 조명한다. <씨네21>이 동시대 일본 독립영화계를 범주화하는 키워드 중 첫 번째로 포스트 동일본대지진을 꼽았던 바 있듯(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102917), 일본은 동일본대지진이라는 전례 없는 재난에 잠식당했고, 영화에서 일본의 청년층(사토리세대)은 재난의 잿더미 속에서도 희망을 발굴하려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파문>은 실제적 재난으로부터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 것일까? 영화는 동일본대지진과 함께 말없이 집을 떠났던 남편(미쓰이시 겐)이 암에 걸린 채 10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설정과, 이를 마주해야 하는 중년 여성 요리코(쓰쓰이 마리코)를 통해 오염된 물리적·심리적 영토를 어떻게 다시 정화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적 해법을 제시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슬픈 역설이 자리하는데, 죽음을 상징하는 재난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시간이 지속될수록 인물들의 신체는 죽음과 점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시아버지의 죽음을 홀로 감내해야 했던 요리코는 암을 앓고 있는 남편의 간병인이 되어 유사한 형태의 죽음을 다시 경험하는가 하면,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직장 동료 미즈키(기노 하나)를 보살피며 늙어감을 가까이에서 목격하는 동시에 자신 역시 갱년기 증상으로 고투를 겪고 있다.
페티시즘과 청결
남편이 가정을 버리고 떠나고, 아들 타쿠야(이소무라 하야토)가 직장이 있는 규슈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 요리코가 한 일은 물리적·심리적 영토를 재건하는 일이었다. 재난은 보통의 하루가 안전하다는 믿음을 앗아간다. 요리코는 이 믿음을 복원하기 위해 물을 숭배하는 사이비종교에 경도된다. 그녀는 무결함을 가장한 생명수에 집착하며 왜곡된 믿음으로 마음의 공백을 해갈하며 새로운 일상을 이어 나간다. 그런 그녀에게 암에 걸린 남편이 10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는 가족의 재회가 아닌 요리코가 쌓아올린 안전하다는 믿음, 나의 공간은 청결하며 생의 활력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의지를 깨부수며 불쾌함을 유발하는 또 다른 재난이 된다. 남편이 돌아오고 난 후, 요리코는 고산수(일본 무로마치시대의 정원)를 하염없이 재정비하고 모래로 만든 물결을 정돈하면서 남편이 일으킨 마음의 파문에 대항하며 자신만의 질서를 견고히 하려 한다.
전작들에서 꾸준히 목격되었듯이 오기가미 나오코에게 프레임이란, 심리적 영토가 가시화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변방의 인물들을 화면의 중심으로 한데 모아 일시적인 유대 관계를 형성하곤 했고, 이때 프레임은 안전함을 제공하는 임시적인 거처로 작용하곤 했다. <카모메 식당>으로 모인 일본 여성들, <안경>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체조를 하던 정체불명의 군중들, <강변의 무코리타>와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에서 형성되었던 대안적 가족의 형태 등. 오기가미 나오코의 프레이밍 방식에서 발현되었던 것은 무언가 결여된 인물들도 영화에 종종 등장하던 뜨개질의 날실과 씨실처럼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유대감이었다. <파문>은 이와 반대되는 프레이밍 방식을 고수하는데, 영화의 프레임은 배타적인 동시에 고립적이다. 요리코의 생명수를 향한 페티시즘은 그와 무관한 것들, 이를테면 남편의 질병과 정돈되지 않은 생활방식, 아들이 데려온 장애인 여자 친구, 이웃집의 고양이 등을 배척한다. 그녀는 전작의 온화한 인물들과 달리 이런 이질적인 것들이 프레임 안에 침입할 때 마치 불온한 것을 마주한 것처럼 행동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아무렇지 않게 가족들의 빨랫감을 널던 그녀는 남편이 입었던 옷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독약을 뿌리는가 하면, 현관에 놓인 더러워진 신발을 용납하지 못한다. 자신의 칫솔은 청결함을 유지시켜주는 도구이지만, 남편의 칫솔은 더럽고 불결한 혐오의 대상이다. 이러한 행동은 타쿠야가 데려온 여자 친구 타마미에게도 적용된다. 예고 없이 집에 찾아온 타마미와 그녀의 신발, 칫솔, 장애가 있는 신체는 요리코에게 불청객이자 자신이 사이비종교에 의지하면서까지 재건한 물리적·심리적 영토에 불필요한 파문을 일으키는 불순물일 뿐이다. 그렇게 요리코는 그 대상이 가족일지라도 일상의 사사로운 재난으로부터 자신이 정화시켜온, 그녀가 유일하게 소유한 보통의 날들을 지켜내고자 한다. 그렇기에 쓰러진 남편을 발견하고 그녀가 당혹감에 빠진 이유는, 비단 남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만이 아닌, 잘 정돈되어 있던 고산수가 망가졌다는 낭패감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정정하는 힘
오기가미 나오코는 이런 요리코의 욕망과 비이성적인 행동을 블랙코미디의 요소로 활용하며 극의 재미를 더한다. 일본의 오타쿠 문화와 서브컬처를 파헤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쓴 아즈마 히로키는 <정정하는 힘>을 통해 동시대 일본 사회를 재검토한다. 실제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대하는 태도로 다크투어리즘을 제시하며 과거의 비극을 마주할 때 새로운 시간을 맞이할 수 있음을 시사했던 그는 일본에 팽배한 ‘리셋 욕망’을 지적하며 과거를 진정으로 톺아볼 때 미래를 향한 역동성이 발생한다는 ‘정정하는 힘’을 역설한다. 요리코가 사이비종교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것 역시, 그녀의 삶을 새롭게 리셋하려는 욕망과 다를 바 없었다. 재난을 송출하던 TV는 요리코의 집에서는 자취를 감추지만, 그녀가 가까이했던 종교시설에서는 맑고 청아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물소리와 잔잔한 물결만을 보여주는 가짜 화면으로 둔갑한다. 요리코는 더이상 진실을 드러내지 못하는 TV 속 생명수를 진짜(삶)보다 더 숭배하지만, 엉성하게 만들어진 생명수는 마지막 장면에서 요리코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빗방울을 대체하지 못한다. 요리코가 자신의 편향된 시선을 정정하게 되는 계기는 쓰러진 미즈키를 대신해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다. 대지진 후에도 여전히 회복되지 못한 삶에 머물러 있는 어질러진 미즈키의 집에서 요리코는 눈물을 쏟아낸다. 그녀가 본 것은 정돈되지 못한 삶과 그 속에서도 삶을 연명하고 있는 거북이, 그리고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자신의 내면이다. 티끌 하나 허락되지 않는 그녀의 집과 대비되는 미즈키의 집에서, 요리코는 진정으로 치유되지 못한 자신과 마주하고 여기저기 널브러진 쓰레기와 함께 지난 시간을 정정할 준비를 한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남편의 죽음과 아들의 복귀로 또다시 혼자가 되는 요리코를 비춘다. 타쿠야는 집을 나서며 요리코에게 예전에 하던 플라멩코를 다시 해보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한다. 요리코는 즉각 대답하지 않고 망설이다가 타쿠야가 프레임을 빠져나가자, 과거의 몸짓을 복기하며 우산을 내던지고 빗속에서 플라멩코를 추기 시작한다. 침대에 거꾸로 누운 채 남편의 발바닥을 바라보며 눈을 떴던 요리코는 이제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가득 찬 두발로 땅을 힘차게 내딛으며, 종교 단체의 부자연스러운 몸동작이 아닌 플라멩코의 역동적인 춤동작을 재현한다. 요리코가 외화면을 향해 미소 지을 때, 이는 감독의 전작에서 주인공들이 지었던 미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산수를 힘차게 흐트러트린 후 대문 밖으로 나가 열정적으로 춤을 추는 요리코와 동일본대지진을 경유하는 새로운 경로를 탐색한 오기가미 나오코를 응원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올레!
재난을 경유하는 오기가미 나오코의 새로운 경로 탐색
재난이 남긴 흔적과 어떻게 부대끼며 함께 살아갈 것인가. <안경> <카모메 식당>으로 일찌감치 국내에 알려진 오기가미 나오코는 신작 <파문>에서 헤이세이 시대를 흔든 전례 없는 재난이었던 2011년 동일본대지진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영화는 재난과 함께 가족을 버렸던 남자가 10년 만에 암에 걸린 채 돌아오면서 그와 불편한 동거를 해야 하는 중년 여성 요리코(쓰쓰이 마리코)의 마음에 일어나는 불편한 파동을 담고 있다. 국가적 재난이 초래한 황폐화된 물리적·심리적 영토를 재건하기 위해 요리코가 기댄 것은 물을 숭배하는 사이비종교이다. 왜곡된 믿음에 빠진 요리코에게 병과 함께 다시 돌아온 남편은 홀로 남겨진 이후 단단하게 쌓아올린 평온한 일상을 침범하는 불편할 존재일 뿐이다. 목가적인 풍경과 유대를 강조해온 전작들과 달리, 영화는 배타적인 프레이밍을 통해 중년 여성 요리코가 재난의 상흔을 정화시키고 페티시즘과 가족 등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은 주체적인 삶으로 나아가는 회복과 정정의 과정을 제시한다. 엔딩 시퀀스를 장식하는 요리코의 미소는 재난이 남긴 죽음의 흔적을 역동하는 삶의 순간으로 교체하는 역량을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