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뱀파이어는 왜 부활했나, 로버트 에거스의 <노스페라투>에 얽힌 비화와 리뷰
2025-01-16
글 : 임수연

“그의 얼굴은 억센 독수리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콧날이 날카롭고 콧마루가 오뚝하며, 코끝이 삐죽하게 아래로 숙여져 있다. 이마는 됫박을 얹어놓은 것처럼 불거져 있고, 살쩍에는 털이 버성기지만 머리숱이 많고 곱슬곱슬해 보인다. 눈썹도 숱이 많으며, 콧마루 위쪽에서 거의 맞닿아 있다. 두툼한 콧수염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입매는 딱딱하고 조금 잔인한 느낌을 주었고, 기이하게 날카로운 하얀 이가 입술 위로 비죽 나와 있는데, 그 입술이 유난히 붉어서 그의 나이에 걸맞지 않는 싱싱함을 느끼게 한다. 또, 귓바퀴는 파리하고 끝이 매우 뾰족하다. 턱은 넓고 억세며, 뺨은 여위었으나 단단해 보인다. 그의 얼굴이 주는 전체적인 인상은 대단히 창백해 보인다는 것이다.”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중)

드라큘라의 죽지 않는 몸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사회를 은유한 작품에서 끊임없이 부활했다. 해머 필름의 황금기를 이끈 <드라큘라>(1958)부터 아름다운 흡혈귀의 이미지를 완성한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금욕적인 신부가 금단을 깨는 <박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뱀파이어가 파생되며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줬다. 2024년 북미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한 <노스페라투>는 뱀파이어의 시작점으로 귀환한다. 1922년 독일 표현주의 영화 <노스페라투>에 헌사를 바치는 이 영화는 드라큘라의 원전으로 돌아가 섹스와 죽음의 유대, 전염병에 대한 공포를 재해석한다.

1922년 F. W. 무르나우, 1979년 베르너 헤어초크에 이어 동시대 가장 독창적인 장르영화 감독으로 꼽히는 로버트 에거스가 세 번째 <노스페라투>의 연출을 맡았다. 1630년대 뉴잉글랜드 청교도 정착지에서 추방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더 위치>, 외딴섬에 고립된 두 등대지기의 광기를 그린 <라이트하우스>, 중세시대 바이킹 복수극 <노스맨>을 만든 로버트 에거스는 동시대가 아닌 과거의 마법 같은 시공간에서 공포의 근원을 탐색해온 감독이다. 그의 세계는 은유보다는 기이한 실제 사건이 담겨 있다. 강박적으로 역사를 연구하고 세밀하게 묘사해 몰입형 세계를 창조하는 에거스는 고딕 호러 <노스페라투>의 재해석 프로젝트에 탁월한 적임자다. 실제 감독도 <노스페라투>에 오랫동안 매료되어 있었다. 9살 때 F. W.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를 처음 접하고 올록 백작을 연기한 배우 맥스 슈렉의 이미지에 사로잡혔던 그에게 <노스페라투>는 평생 갈망했던 프로젝트다. 고등학생 시절 친구 애슐리 켈리타타(현 연극 감독)와 함께 <노스페라투>를 각색해 연극무대에 올렸던 순간은 그가 영화감독의 꿈을 키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로버트 에거스는 원작의 뼈대를 존중한다. 어린 엘렌은 자신도 모르게 수세기 동안 잠들어 있던 악을 소환하고, 소녀와 악마는 영원히 한몸이 되겠다고 맹세한다. 몇년 뒤, 1838년 독일 가상의 마을 비스보그에서 관객은 이제 막 신혼여행을 다녀온 엘렌(릴리로즈 뎁)과 토마스 후터(니컬러스 홀트) 부부를 만난다. 크녹 부동산중개회사에 다니는 토마스는 거액의 부동산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트란실바니아 카르파티아산맥에 있는 외딴 성으로 파견된다. 성에 사는 올록 백작(빌 스카르스가르드)은 비스보그에 있는 낡은 집을 사고 싶어 하지만 그가 직접 마을까지 오기엔 몸이 쇠약해서 중개인이 직접 가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백작을 만나기 위해 독일에서 루마니아로 떠난 토마스는 그를 비웃고 경계하는 집시들을 마주치는 등 기이한 일들을 겪기 시작한다. 마침내 마주한 올록 백작은 처음에는 본성을 숨기고 그를 대하지만 토마스가 손가락 부상을 입고 피를 보이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결국 의문의 서명을 강요당하고 백작에게 가슴을 잡아먹힌 토마스는 올록이 엘렌과 관련된 다른 속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남편이 떠난 후 엘렌은 매일 같은 시간 발작과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선박 사업을 하는 자산가 프리드리히(에런 존슨)와 그의 아내 애나(에마 코린)가 엘렌을 대신 돌보게 된다. 일반 의학으로는 호전되지 않는 엘렌의 병을 진단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연금술과 신비주의 철학, 주술에 능통한 폰 프란츠 교수(윌럼 더포)가 거론된다. 프란츠 교수는 엘렌의 증상이 악마의 마법과 연관돼 있고 곧 올록의 혼령이 마을을 덮칠 것이라고 예고한다.

시대와 흡혈귀의 상관관계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로 대표되는 기존의 드라큘라 이야기는 식민지 쟁탈과 산업화가 가져온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과 공포를 강조한다. 이를 극복하는 것은 남성·서구 중심적인 계몽이다.

반면 1830년대 독일 해안 마을을 재현하기 위해 발트해 연안과 슬로바키아에서 촬영한 <노스페라투>는 F. W. 무르나우에 의해 회화적 낭만성을 입게 된 작품이었다. 여기서 흡혈귀를 소멸시키는 것은 순수한 여성의 희생이다. 한편 <노스페라투>가 뿌리를 둔 <드라큘라>의 작가 브램 스토커는 원래 성적 욕망과 강간 메타포가 강한 소설들을 많이 썼던 작가다. 특히 그의 대표작 <드라큘라>는 빅토리아시대의 억압된 분위기, 송곳니와 말뚝 등 노골적인 남근 상징, 심지어 동성애 암시 등이 뒤섞이며 다양한 해석을 내놓게 만든 고전이다. 20세기 말부터는 전통적인 여성성과 남성성의 경계를 허물고 쾌락과 성욕을 드러내는 흡혈귀 캐릭터로부터 페미니즘적 이미지를 읽어내는 학자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로버트 에거스의 <노스페라투>는 올록의 그림자와 쥐떼로 표상되는 폭력과 전염병의 이미지를 에로티시즘으로 결합한다. 이로써 강간의 메타포가 불경스러운 혐오감은 주되 자칫 원초적인 쾌락에 빠지지는 않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성공한다. 여기에 에거스 특유의 신화적 요소가 집착적으로 구현되면서 지금 시대의 관객들이 체험하기에 생경한 매혹과 긴장감이 축조된다. 그리고 영화는 엘렌의 어두운 욕망이 역설적이게도 마을공동체의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주술적 상관관계를 펼쳐낸다. 릴리로즈 뎁의 우아한 얼굴은 무력한 여성 희생자의 이미지에서 벗어난 무게감을 주며 여성과 악마가 동등한 위치에서 존재할 수 있는 다크 버전 <미녀와 야수>를 성립시킨다.

<노스맨> <라이트하우스> <더 위치>에서 함께 작업했던 자린 블라슈케 촬영감독은 움직이는 벽과 천장 세트를 동원해 극단적인 원테이크 촬영을 선보였다. <노스페라투>의 패닝은 현실과 비현실, 논리와 초현실을 연결하는 기술이다. 또한 35mm 필름에 새겨진 빛과 그림자의 대비, 특히 흑백에 가까운 달빛은 종종 <노스페라투>가 흑백 무성영화처럼 보이게 만드는 순간을 만든다. 올록의 그림자가 비스보그 마을을, 엘렌의 방을 덮치는 불길한 이미지는 F. W. 무르나우가 무성영화 시절 일궈낸 가장 인상적인 성취들에 바치는 헌사다.

다만 영화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구현된 <노스페라투>의 공포가 현시대에 얼마나 효과적인가에 대해서는 평가를 유보하고 싶다. 1922년 F. W.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는 스페인독감, 1992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드라큐라>는 에이즈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던 시기에 관객을 만났다. 지금은 예측 불가능의 재난보다 인재(人災)가 더 큰 절망을 안겨주는 시대다. 뱀파이어라는 타자보다 이들을 배척하는 공동체의 이기심이 유발하는 공포가 어쩌면 신자유주의를 설명하는 정서에 가까울지 모른다. 여성의 취약성과 성적 욕망의 탐구가 결국 순수한 희생에서 주체성을 읽는 결론에 귀결되기에는 훨씬 복잡한 주제임을 알고 있다. <노스페라투>가 명성에 비해 그리 무섭지 않다고 느끼는 젊은 관객이 있다면 이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고전은 시대를 투영해 다시 해석되고 평가될 수 있기에 그 위치에 있다. 전설적인 호러영화의 걸작인 <노스페라투>가 다시 부활할 만한 가치는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흡혈귀 이야기의 역사

F. W.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

흡혈귀 이야기는 발칸지역 슬라브 사람들의 민간신앙에서 시작됐다. 이후 트란실바니아(지금의 루마니아에 해당) 왈라키아의 호전적인 공작 블라드 체페슈를 드라큘라 백작 이미지의 모티브로 삼은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나왔다. 이 소설은 영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매체에서 100번 이상 각색되며 지금의 흡혈귀 장르를 완성시켰다. 대표적인 작품이 1922년 F. W. 무르나우가 연출한 <노스페라투>다. 정작 이 작품은 <드라큘라>의 영화 제작권을 얻어내지 못해 제목을 바꾼 후 무단으로 원작을 차용했다가 소송에 휘말린 비화가 유명하다. 영국의 <드라큘라>가 독일의 <노스페라투>로 변장하는 과정에서 소설의 등장인물의 이름 역시 독일식으로 바뀌었다. 드라큘라 백작은 올록 백작/노스페라투로, 조너선 하커와 미나 부부는 토마스와 엘렌으로, 반 헬싱은 불베어 교수로 바뀌었다. 조너선 하커의 상사와 렌필드는 부동산 중개인 크녹으로 합쳐졌다. 소설 <드라큘라>에서 드라큘라 백작은 십자군에 의해 소멸되지만 <노스페라투>는 엘렌의 희생으로 악을 물리친다. 이후 <드라큘라>와 <노스페라투>의 캐릭터는 흡혈귀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어왔다. 한편 로버트 에거스의 <노스페라투>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 <노스페라투>의 제작 과정을 다룬 시대극 <뱀파이어의 그림자>에서 올록 백작으로 분한 배우 맥스 슈렉을 윌럼 더포가 연기했고, 니컬러스 홀트는 <렌필드>에서 렌필드(<노스페라투>의 크녹에 해당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빌 스카르스가르드가 올록 백작이 되기까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드라큐라>

F. W.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와 이 작품이 근간을 둔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드라큐라>는 현대에 자리 잡은 흡혈귀 묘사와는 거리가 있다. 깃을 세운 긴 망토나 턱시도는 1931년 토드 브라우닝의 <드라큘라>에서 파생된 이미지였고, 1958년 해머 필름의 <드라큘라>는 괴물로 변신하기 전 멀끔한 신사의 이미지로 사람들을 현혹한다. 로버트 에거스는 전자로부터 올록 백작의 비주얼을 출발시켰다. 특수효과 메이크업 아티스트 데이비드 화이트와 함께 의학 및 역사 연구 논문과 책을 통해 살과 뼈의 부패를 철저히 조사하고, 당시 귀족들의 헤어스타일과 수염 등에 대한 이미지를 공유했다. 특히 드라큘라 백작의 모티브가 된 블라드 체페슈의 콧수염을 올록 백작에게 반영했다. 빌 스카르스가르드는 그의 얼굴과 체형에 맞춘 실리콘 보철물을 쓰고 촬영 때마다 3시간 반에서 4시간 정도 특수분장을 받았다. 의상은 16세기 후반 실제 트란실바니아 귀족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목소리. 로버트 에거스는 올록 백작의 목소리가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낮은 톤이기를 요구했다. 수석 음향 편집자 데미안 볼프는 초음파 마이크를 사용해 으르렁거리거나 신음하는 소리를 녹음해 올록이 지닌 괴물성을 부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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