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나애진)는 낮엔 계약직 디자이너로 일하고 밤엔 뱀파이어가 나오는 웹툰을 그리며 바쁘게 산다. 그 와중에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면서 연인 경현(강봉성)과 계약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결국 정서는 따로 가족을 꾸려 지내고 있는 아버지 영주(안석환)에게 어머니의 빚을 받으러 떠난다. 목적지는 동해시의 ‘벌교횟집’, 그곳엔 아버지와 함께 이복동생인 정해(김진영)네가 살고 있다. <은빛살구>의 장만민 감독은 돈과 차용증으로 얽히고설킨 가족구성원들의 모습을 ‘뱀파이어’로 묘사하며 새로운 가족상을 그린다. 영화와 관객 사이에 주어진 적당한 거리감은 서로를 물고 뜯으면서도 가족이란 이름과 예전의 기억으로 자꾸만 엮이게 되는 이 서글픈 관계를 계속 관찰하게 만든다.
- 물질주의에 지배된 가족의 풍경을 비판하는 듯하지만, 한편으론 인물들을 무조건 나쁘게만 바라보지 않으려는 연출자의 시선이 느껴진다.
영화 속 인물 중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 각자의 욕망을 좇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또 자기가 상처받기도 하는 과정들이 모두 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관객이 기본적으론 정서의 관점으로 인물들을 바라보면서도 영화 전반에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고 이 상황을 천천히 살필 수 있길 바랐다. 영화를 만든 나조차 그들의 욕망에 공감하다가 비판하기도 하는 혼재된 기분을 느꼈으니까.
- 그런 측면에서 가장 복합적으로 보게 되는 인물은 아버지 영주인 것 같다. 표면적으론 악인의 위치에 있는 인물인데 특유의 살가움 때문에 마냥 미워할 수 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게 더 무서운 것 같다. 겉보기엔 따스해 보이고 어렸을 때를 돌이켜봐도 아버지와의 좋은 기억이 있긴 한데, 정작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자식을 착취하려고 하는 거니까. 다만 이런 착취의 양상이 가족이란 관계의 자연스러운 흐름이고, 그래서 인물들을 선과 악으로 분별해서 판단하기가 더욱더 어려운 것 같다.
- 여타 영화의 가족 서사와 차별점을 두고 싶었던 부분은. 가족간 착취의 역학 관계가 두드러지는 편이다.
한명 한명의 가족구성원이 물론 서로간의 관계망을 토대로 하긴 하지만, 결국엔 각각의 지향을 지닌 개별자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건 가족이란 관계보다 횟집이라는 일터라고 느꼈다. 그 속에서 여러 경제적 주체가 서로 착취하고 얽히면서 만들어지는 흐름이 기존의 가족영화와는 조금 다른 지점인 것 같다.
- 실제 횟집에서 일한 경험, 동해시로 여행을 떠났던 일, 단편 시나리오로 썼던 차용증 소재 등을 결합하여 만든 이야기다. 이 요소들을 하나의 영화로 만들어준 축은 무엇이었나.
정서라는 인물로 모두 묶였던 것 같다. 정서가 동해시의 벌교횟집이란 특정 장소와 부딪히며 일어나는 스파크가 중심이 됐다. <은빛살구>가 완전히 실제 있었던 이야기처럼 느껴지길 바라진 않았다. 그래서 영화 속에도 어느 정도의 가상과 인공적인 면모, 투박한 지점들이 생겨난 것 같다. 이번 작업에서의 원칙은 나에게 떠오르는 것들을 존중하자, 나에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좇아보자는 것이었다. 내가 이 시대를 사는 젊은 사람이고, 취향이 그렇게 독특하지도 않은 사람이니 내가 끌리는 것들에 관객들도 이끌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영화 제작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감독의 생각대로만 이야기를 꾸려나가기 어려울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좀 잘 우기는 편이다. (웃음) 교수님들께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나 주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혹은 인물들이 돈만을 좇지 않고 왜 이렇게 돌아다니는지 등을 물어보셨다. 그런 과정에서 나도 왜 내가 어떤 장면에 특별히 끌리는지, 어떤 장소를 꼭 찍고 싶어 하는지 고심하게 됐다. 그렇게 고민하며 열심히 설득하고 읍소해가면서 각본을 썼다. 예를 들면 정해가 정서를 데리고 예전에 일했던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가는 장면 같은 건 사실 이야기상으론 없어도 무관한 부분이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동해시에 갔을 때 그곳에서 좋은 인상을 받기도 했고, 동해시의 분위기와 정해의 세계를 한눈에 보여주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라고 생각해서 끝내 넣게 된 장면이었다.
- 아버지 영주의 주도로 가족이 다 함께 산으로 나들이를 가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한창 갈등하는 와중에 이런 과정은 왜 필요했나.
순수하게 가족으로서 가지는 환상이었던 것 같다. 물론 영주의 속셈이 있는 여행이기도 했지만, 첫째 딸 정서가 오랜만에 온 덕에 어쩌면 마지막으로 다 함께 갈 수 있는 여행이라고 생각했을 듯하다. 돈으로 너무 깊이 얽힌 탓에 예전처럼 완전히 신뢰가 있는 가족이 될 순 없지만, 한번쯤은 가족의 소망을 실현하고 싶었을 거다.
- 나들이 시퀀스 등에서 캠코더로 찍은 푸티지가 쓰인다. 설정상 정해의 캠코더인데, 이러한 촬영 방식을 택한 이유는.
처음 떠올린 이유는 정서가 자기의 얼굴을 낯설게 보길 바라서였다. 아버지의 어두운 비밀을 점차 알게 되고 그냥 가족들을 떠나버릴지 고민하면서도 가족들과 있는 시간에 어느새 편히 어울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거다. 그래서 캠코더 촬영본은 배우들에게도 더 편하고 자연스러운 연기 톤을 주문했다. 이 기억들이 정서와 정해에게 모두 소중하게 여겨지고 서로를 연민하며 공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 영화의 중간중간 인물들이 뱀파이어로 변해 진행되는 장면들이 삽입된다. 정서가 그리는 뱀파이어 웹툰의 이미지와 연관돼 있는 것 같은데, 특별히 이 장면에 대해 규정되는 바는 없다.
뱀파이어 시퀀스와 이후 정서가 마주하는 일상의 장면들이 관객의 상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겹치길 원했다. 관객의 머릿속에서 뒤섞이는 관계의 이면들, 그런 복합적인 작용이 이루어지면 좋을 정도에서 뱀파이어 장면들을 정리하게 됐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를 뱀파이어 장면으로 택한 것도 관객들이 <은빛살구>를 온전한 드라마 장르로 동일시하며 보기보다 계속 일정 정도의 거리감을 두고 봐주길 원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