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인터뷰] 자신과 대면하는 예술가,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 정형석 감독
2025-01-16
글 : 김현승 (객원기자)
사진 : 백종헌

예술인의 삶은 종종 칙칙한 무채색으로 그려지지만 그 안에 언제나 빛이 깃들어 있다. 월세, 예산, 아르바이트 등 물질과 돈에 얽매인 세상이 가뜩이나 예민한 사람들의 속을 긁어댈 때 이들을 위로하는 것은 언제나 술과 담배, 그리고 다시 예술이다. 여기 주어진 삶을 꿋꿋하게 살아나가는 예술가의 모습을 조명해온 감독이 있다. 오랜 세월 연극과 영화를 오가며 작업해온 정형석 감독이다. 다양한 경험 덕분일까. 그가 위로를 건네는 대상은 매체의 경계를 넘나든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말을 아낀다는 그의 신념에서 우리는 작품에 배어 있는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 정형석 감독의 신작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는 작은 연극 극단에 서울대 출신 신입 단원이 들어오며 벌어지는 소란을 다룬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오가던 이야기는 이내 한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초청작이기도 한 이번 작품에 대해 정형석 감독과 나눈 대화를 전한다.

- 대학로 작은 극단을 배경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어느새 점점 모호해지는 흐름이 인상적이다.

극단의 한 배우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멍하니 먼 곳을 쳐다보고 있더라. 문득 저 친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이번 영화의 첫 장면이 바로 그 장면이다. 밀레의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는 혜리(전혜연)의 실루엣. 그 이미지에서 꼬리를 물어가며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했다. 사실 영화의 내용과는 별개로 더 큰 이유가 있기도 하다. 요즘은 소위 ‘독립영화’를 보아도 지나치게 직관적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연극계도 마찬가지이다. 사유의 시간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는 느낌. 그래서 이번 작품은 영화가 가질 수 있는 모호함을 강조해보고 싶었다. 관객들이 작품을 안줏거리 삼아 이리저리 물고 뜯으며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다.

- 혜리는 영화에서 단연 돋보이는 캐릭터다. 명쾌하게 밝혀지는 것이 없다는 게 역설적으로 캐릭터의 정수처럼 느껴진다.

전혜연 배우가 스스로 자신을 순수하다고 말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그런 점이 내가 혜리 캐릭터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이기도 하다. 모호하게 보이지만 사실 혜리야말로 가장 직관적이고 단순한 인물이다. 사회성이 떨어져 보일 정도로 속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서울대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 혜리의 말과 행동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다. 외적인 것에 가려져 인간 자체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셈이다.

- <칼리굴라> <이방인> 등 카뮈의 작품들이 직접 언급된다. 이 밖에도 대사나 상황 속에 카뮈가 연상되는 지점이 많다.

카뮈에서 가장 먼저 연상되는 ‘부조리’라는 상징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여러 번 언급되기는 하지만 카뮈의 사유가 작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내가 질문을 받는 것처럼 관객한테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카뮈의 이름이 반복해서 등장하면 자연스레 “대체 그놈의 부조리가 뭐냐”는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이 메타포를 흩뿌려놓으면 누군가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카뮈를 찾아보지 않을까 싶다.

- 예술인을 둘러싼 현실의 문제를 그려내면서도 예술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멈추지 않는다.

예술가에게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너무나 중요하다. 누가 옳다 그르다를 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자신만의 생각과 신념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예술은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물은 사회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사명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기가 하는 일의 당위성 정도는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 초반에 “예술은 혼술(혼자 마시는 술)”이라는 대사가 있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한 사유를 위해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 비슷한 맥락에서 이번 작품에 유독 흡연하는 장면이 많다.

담배는 숨을 마시고 내뱉는 일종의 호흡이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다른 호흡을 내뱉는다. 함께 있는 사람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숨을 뱉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또한 예술인들에게 담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예술을 통해 일상에서 쌓인 감정과 긴장을 해소한다. 그럼 예술인들은 무엇으로 해소하나? 안타깝지만 대개 술과 담배더라. 숨을 한번 크게 내뱉는 시간이다. 대화다운 대화로 풀어내면 좋을 텐데, 시시껄렁한 말만 많아진 것이 현실이다.

- 카메라 패닝을 통해 인물을 프레임 내부로 끌고 들어오는 연출이 두드러진다.

이 부분도 호흡과 연관된다. 롱테이크는 연출가의 개입을 최소화하여 극의 호흡을 끊지 않는다. 대화의 진정성과 자연스러움을 온전히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오랜 기간 연극계에 몸담은 영향이기도 하다. 연극무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긴 롱테이크와 같다. 소위 ‘마가 뜬다’고 하는데, 어색한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손발을 맞추는 배우들의 역량이 중요하다. 롱테이크와 패닝이 흑백 화면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툭툭 끊기는 컷 편집은 흑백이 가진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

- 배경음악이 삽입되는 지점이 독특하다. 돌연 새로운 분위기를 끌어내고, 심지어 인물에게 딴지를 거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음악감독 모그에게 일부러 상세한 주문을 하지 않았다. 신뢰가 있었으니까. 보내온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계속 듣다 보니 인물들을 비꼬고 놀리는 음악이 영화의 컨셉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음악만으로 하나의 레이어를 쌓아 작품 전체를 업그레이드한 셈이다. 그걸 느끼고 음악감독한테 “너 정말 천재 맞구나”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 영화의 대사를 빌리자면 참으로 부조리한 세상이다. 연극과 영화계 모두 힘든 게 현실인데.

영화계든 공연예술계든 모두가 같은 말을 한다. 힘들다고. 나는 이런 상황일수록, 이런 상황이니까 예술이 더욱 빛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힘든 시기는 늘 있었지만, 예술은 어떻게든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왔다. 천만 영화가 적어졌다고 한국영화가 망하는 것이 아니듯 이럴 때일수록 예술의 본질을 되묻는 질문이 많아져야 한다. 어쨌든 나는 내가 추구하는 것을 계속해서 작품으로 표현해나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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