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 워킹타이틀 [3]
2002-08-24
글 : 김혜리

30대 도시 독신남녀, 그리고 런던의 문화

<노팅 힐>(1999)은 <네번의 결혼식…>의 비공식 속편이라는 뉘앙스를 강렬하게 발산하는 마케팅으로 포문을 열었다. 미량의 환상을 가미해 적당히 윤색된 런던 서부의 아늑한 삶과 할리우드의 여왕 줄리아 로버츠가 거느린 <귀여운 여인> 스타일의 매혹은 박스오피스에서 눈부신 시너지 효과를 냈다. 4천만달러로 만들어져 세계 극장가에서 3억5500만달러를 거둬들인 <노팅 힐>은 베벌리힐스의 은막스타와 노팅 힐에 사는 이혼남의 로맨스라는 달콤한 형식을 빌려 ‘근사한 영국’- 또는 토니 블레어 정권이 표방한 ‘쿨 브리타니아’- 의 이미지를 널리 프로모션함으로써 영국영화의 한 계보인 유산영화(heritage film) 장르의 트렌디한 계승자가 됐다. 또한 노팅 힐에 거주하는 자신과 친구들을 모델로 중산층 매너 코미디로서 손색없는 시나리오를 또 한번 써낸 리처드 커티스는, 장르 공식에 숙련된 시나리오팀이 집단 가동되기 일쑤인 로맨틱코미디 세계에서는 노라 에프런 정도가 누려온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노팅 힐>이 개봉될 무렵 “우리 영화의 문화적 토대는 영국과 유럽, 그리고 미국 동부지역이다. 우리가 <리쎌 웨폰>을 만드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영역을 명시한 워킹 타이틀은, 자연스럽게 30대 도시 독신 남녀의 특정한 라이프 스타일을 영국 대중문화 최고의 히트 상품으로 가공한 닉 혼비와 헬렌 필딩의 베스트셀러를 다음 행보로 택했다. 제인 오스틴의 클래식 <오만과 편견>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헬렌 필딩 원작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의 각색에는 여러 작가가 달라붙었지만 리처드 커티스의 입김이 역시 가장 강하게 느껴진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실제로 노팅 힐 동네에서 어울려 노는 친구들의 동아리가 만들어낸 작품이기도 했다. 필딩과 커티스의 친분은 말할 것도 없고 감독 샤론 맥과이어가 브리짓의 입 험한 친구 샤자의 모델이었고 커티스의 파트너 프로이드도 홍보에 가담했다.

<아메리칸 파이>의 웨이츠 형제 감독이 영국 유학 경험과 사춘기적 유머 감각을 살려 만든 신작 <어바웃 어 보이>(2002)는 워킹 타이틀의 미다스 리처드 커티스의 펜촉이 닿지 않은 영화다. 하지만 휴 그랜트 연작 4호인 동시에 <피버 피치>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를 잇는 닉 혼비 원작의 세 번째 영화인 <어바웃 어 보이>는 태생적으로 워킹 타이틀 로맨틱코미디의 성분을 품고 있다. <피버 피치>의 콜린 퍼스,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의 존 쿠색은 <네번의 결혼식…> 이후 휴 그랜트 극중 캐릭터의 형제들이라 해도 속을 법하다. 이 남자들은 거창한 이상을 멀리하고 책임을 회피하며 축구와 록밴드, TV에 열광한다. 그리고 CD를 알파벳 순서로 정리하며 <에스콰이어>를 뒤적인다. 자살을 기도한 여자를 실은 구급차 뒤를 따라가면서 내심 신나할 만큼 철딱서니가 없지만, 영리한 소년 마커스가 본 대로 윌은 착한 사람이다. 관계에 대한 윌의 알레르기는 적어도 그를 독신모 모임에서 성토당하는 무책임한 아빠가 되어 민폐를 끼치지는 않도록 한다. 인생을 앙상블 드라마가 아닌 원맨쇼라고 믿는 <어바웃 어 보이>의 윌은 교우관계 좋은 워킹 타이틀의 선배 주인공들과 달리 외톨이로 영화에 등장하지만 친구들을 얻어 영화를 빠져나간다. 하지만 친구들이 그의 섬과 육지 사이에 다리를 놓자고 덤벼들면 윌은 분명 다른 고도로 이삿짐을 쌀 위인이다. 언제나처럼 워킹 타이틀 로맨틱코미디는 아무리 위대한 연애를 한들 사람이, 특히 서른 넘은 사람이 크게 변할 수 없다고 가정한다. 만약 <브리짓 존스의 일기> 속편이 제작된다면, 우리는 마크 다아시와 헤어져 다시 보드카잔 수를 헤아리고 있는 브리짓을 만나게 될 것이다.

공동대표 팀 비반 & 에릭 펠너

2001년 3월 현재 세계 박스오피스 누적 수입 16억달러를 기록한 워킹 타이틀의 두 대표 팀 비반(44)과 에릭 펠너(42)는 “영국영화의 두 탑”으로 불린다. 대학도 도 거치지 않은 두 사람은 공격적인 비즈니스와 실적 위주의 사고를 고무하던 1980년대 대처 시대의 붐 속에서 뮤직비디오를 만들며 영화제작의 모든 분야에 대한 노하우를 습득했고 1991년부터 사무실 동료가 됐다. 손발이 맞는 안정된 투자와 배급, 마케팅 파트너를 확보하고 할리우드급의 지원 속에서 영화제작과 직결된 모든 업무는 내부적으로 소화하는 ‘유사 스튜디오’ 체제를 지향한 두 사람은 1991년 폴리그램과 손잡고 그 연대의 파트너를 1999년 유니버설로 그대로 옮기면서 야심을 실현해 워킹 타이틀을 독보적인 영국영화사로 키웠다. 흔히 ‘굿 캅, 배드 캅’으로 불리는 비반과 펠너의 분업은 어디까지나 상호보완적이다. <엘리자베스>에 ‘미남’이라는 크레딧으로 카메오 출연하기도 한 팀 비반은 정중하면서도 냉정한 성격으로 상업적 감각에서 앞선다는 평을 듣는다. 사람을 모으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데 재능이 있는 에릭 펠너는 코언 형제와 같은 작가들과의 관계 유지를 맡고 있다.

그러나 워킹 타이틀 브랜드 인지도와 가치를 높이는 데 혈안이 된 철저한 사업가라는 점에서 둘은 한 사람이다. 런던에 본부를 둔 것이 할리우드 레벨의 제작환경과 유럽 프로덕션의 자유를 원하는 영화인을 끌어들이기엔 장점임을 인정하면서도 8시간의 시차로 말미암아 많은 기회를 놓치고 있음을 못내 안타까워하는 두 사람은 한달에도 여러 번 옥스퍼드 스트리트의 런던 사무실과 LA지사를 왕복한다. WT2를 저예산영화 전문 자사로 설립한 이들의 새로운 사업 개척지는 호주. 우수한 인력조건을 바탕으로 영국에서 이룬 성공을 재현해볼 욕심으로 <캘리 갱>을 현지 제작했다. 10년이 넘은 워킹 타이틀 경영을 통해 그들이 제일 아쉬워하는 점은 폴리그램의 반대로 <펄프 픽션>을 거절한 일. “우리는 비틀스를 퇴짜놓은 인간들”이라고 에릭 펠너는 씁쓸하게 돌아본다. 하지만 두 대표가 쌓은 워킹 타이틀의 공적을 폄하하는 영화인도 있다. <샬럿 그레이>를 제작하며 영국 메이저로 성장할 욕심을 보였던 영화사 에코스의 대표 더글러스 레이는 “워킹 타이틀이 훌륭한 성적을 유지해온 건 사실이지만 알고보면 그것은 순전히 리처드 커티스라는 한 작가의 공적”이라고 촌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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