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 워킹타이틀 [2]
2002-08-24
글 : 김혜리

워킹타이틀의 일등공신! 시나리오작가 리처드 커티스

‘휴 그랜트 4부작’으로도 불리는 이 차별화된 로맨틱코미디 브랜드 뒤에는 팀 비반(44)과 에릭 펠너(42) 두 제작자가 이끄는 영화사 워킹 타이틀이 있다. 런던 지하철 엠블렘을 연상시키는 로고를 가진 영화사 워킹 타이틀에 네편의 런던발 로맨틱코미디는 그들을 유럽영화계에서 가장 힘있는 제작 주체로 발돋움하게 한 브랜드 파워이자 그들이 추구하는 ‘고급스런 상업성’을 실물로 옮긴 간판 수출품이다. 워킹 타이틀식 로맨틱코미디의 프로토콜은 전적으로 <네번의 결혼식…>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 리처드 커티스의 손끝에서 나왔다. 미국 스타를 초빙해 자국 배우와 짝지우고 일상 묘사와 영국과 미국의 문화 차이에 대한 조크를 재치있게 배색하는 워킹 타이틀 로맨틱코미디의 요체는, 당시 무명이던 에마 톰슨과 제프 골드블럼을 커플로 맺은 커티스의 초기작 <톨 가이>에서 일찌감치 ‘베타 버전’을 보여준다.

1984년부터 사라 래드클리프와 워킹 타이틀을 공동설립해 운영하던 팀 비반은 1991년 폴리그램의 외부 자본을 끌어들이면서 좀더 전통적인 인디 개념을 고수한 래드클리프- 뒤에 린 램지의 <쥐잡이>를 제작했다- 와 헤어지고 <시드와 낸시>를 데뷔작으로 제출한 신예 제작자 에릭 펠너와 손잡았다. 이들은 저예산 범위에 머물지 않는 한, 영화는 대형 비즈니스라는 현실을 냉정히 수긍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현실을 100% 이해한, 영국에서는 희귀한 제작자였다. 그들은 경험을 통해 워킹 타이틀이라는 브랜드의 색깔을 이해하는 고정된 배급, 마케팅 파트너를 잡고 그들로부터 직접 직원의 보수가 나오지 않는 한, 인디 프로듀서는 돈 구하고 배우 잡다 탈진해 영화제작 본론의 주도권과 즐거움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터득하고 있었다. 영화 제작에서 워킹 타이틀의 창립작품인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의 감독 스티븐 프리어즈가 말하듯, 오로지 진정하게 영국적인 영화가 무엇일까를 고심했던 데이비드 퍼트냄이나 리처드 아텐보로 같은 거물 선배 영국 프로듀서들과 달리 비반과 펠너는 오로지 진정하게 세계적인 것이 무엇일까에 몰두했다.

“영국 문화의 현주소를 반영하면서도 국적 불문의 상품성이 있는 영화”라는 워킹 타이틀의 꿈은 리처드 커티스 각본, 마이크 뉴웰 감독의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1994)으로 첫 번째 파티를 열었다. 작가 리처드 커티스는 결혼계획 없이 오랫동안 함께 살며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는 여자친구 에마 프로이드와의 관계와 본인의 천태만상 하객 체험을 담아서 <네번의 결혼식…>을 썼다. 다섯번의 결혼식과 장례식으로 분절된 영화의 구조는 TV시트콤에서 단련된 리처드 커티스의 시추에이션 구성능력을 발휘하기에 최적이었다. 본디 커티스는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허니문’이라는 제목으로 써서 찰스가 캐리의 신혼여행을 따라가게 할 구상이었으나 친구 헬렌 필딩(<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작가)이 “너도 이제 철 좀 들라”고 면박을 주는 바람에 W. H .오든의 아름다운 시가 인용된 심오한 분위기의 장례식 시퀀스가 들어갔다.

<네번의 결혼식…>은 곧 워킹 타이틀 로맨틱코미디의 매뉴얼이 됐다. 사랑의 진심조차 장애인 동생의 수화를 통해 발설해야 하는 찰스의 잉글랜드 남자의 전형적 소심증, 그들의 심리적 울타리를 무너뜨리는 여성의 적극성- 활달하고 화려한 미국 여성에 대한 판타지를 포함해- 은 워킹 타이틀 로맨스의 기본 인물형이다. 특히 리처드 커티스와 캐리 그랜트가 뒤섞인 휴 그랜트의 페르소나는 독특했다. 그는 어설프지만 무식하거나 바보스럽지는 않다. 객관적으로 잘생기고 돈도 있지만 솔직히 2류 인생이라는 열등감을 오래된 옷처럼 편안히 걸치고 있으며, 박력이 없는 대신 타인을 치명적으로 해칠 리도 없는 시대극 속 젠틀맨의 귀엽고 현대적인 변형이다. 무엇보다 그는 결코 ‘무리’하지 않는다. 심지어 7년 뒤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거짓말쟁이 악역으로 변신한 그는 어떻게든 잘해보겠다고 약속해도 시원치 않을 터에 “당신이랑 잘 안 되면 나는 누구랑도 잘 안 될 거야”라고 말을 아낀다.

개성만발한 친구들의 서클로 주인공을 에워싸는 설정도 <네번의 결혼식…> 이후 <노팅 힐>의 윌리엄을 둘러싼 정 많은 친구들,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브리짓을 엄호하는 술꾼 친구들로 되풀이된다. 이 우정의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끌어안고 있는 동성애자, 지체장애자, 펑크족 등 소수자의 속성을 지닌 인물들은 단순한 구색이 아니라 그룹에서 가장 현명한 멤버이며 친구 패거리를 따뜻한 유사 가족 집단으로 승화시키는 촉매다.

제작비 450만달러로 전세계적으로 2억5천만달러를 벌어들인 이 영화는 워킹 타이틀뿐 아니라 영국 영화산업에 터닝 포인트를 제공했다. <네번의 결혼식…>의 성공으로 영국 영화인들은 코스튬드라마나 영국의 국가 현실을 그린 영화만 된다는 1980년대의 강박에서 벗어나, 더 넓은 시장을 상상하는 오락영화를 만들어도 좋다는 인식을 얻었고 이는 9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영국영화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1999년 워킹 타이틀은 파트너 폴리그램을 인수한 유니버설과 연간 3∼5편을 제작하는 5년 계약을 통해 인센티브와 입장 수익일부를 받고 1500만달러에서 2천만달러 범위 영화에 대한 자체 결정권을 갖게 되었다. 디즈니 재직시 미라맥스 인수를 지휘했던 당시 유니버설픽처스 대표 크리스 맥거크가 주도한 이 계약으로 펠너와 비반은 와인스타인 형제가 디즈니와 맺은 관계와 유사한 위치를 누리게 됐다.

시나리오작가 리처드 커티스

팀 비반과 에릭 펠너가 영국영화에 우뚝 선 두개의 탑이라면 리처드 커티스(45)는 영국 영화산업이 보유한 마법사의 돌이다. 대학 졸업 직후 TV코미디쇼 의 각본팀에 합류한 리처드 커티스는 19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로완 앳킨슨 주연의 시대극 시트콤 <블랙애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톨 가이>로 에마 톰슨을 출세시키고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으로 휴 그랜트를 세계 영화팬들의 관심권에 진입시켰다. 파트너 에마 프로이드와 <노팅 힐>의 배경이 된 포토벨로 로드에서 사는 커티스는 개인적으로 보고 겪은 사람과 공간을 상업성 있는 코미디로 허구화하는 데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재능을 자랑하는 작가. 재능도 재능이지만 <블랙애더>와 <빈>의 감독 멜 스미스와 로완 앳킨슨, 워킹 타이틀의 팀 비반, <네번의 결혼식…>과 <노팅 힐>의 프로듀서 던칸 켄워시 같은 인적 관계망은 그에게 늘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그중에서도 리처드 커티스의 네잎 클로버는 그의 감독 데뷔작 <말하자면 사랑>에서도 같이 작업할 예정인 휴 그랜트. “음, 휴가 나타나줘서 엄청 편리했죠.”

자신의 핸섬한 영화적 분신에 대한 커티스의 간단한 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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