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 워킹타이틀 [1]
2002-08-24
글 : 김혜리
로맨틱 코미디, '뻔함'의 가짓수 늘리기

내게 강같은 로맨스 넘치네

로맨틱코미디는 뻔하다고 모두 쉽게 말한다. 비단 우리 관객만의 생각은 아니다.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여자애들이나 보는 영화’(chick flick)라고 은근히 무시하는 영화의 많은 수도 로맨틱코미디 소속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잊을 만하면 한편씩 여자뿐 아니라 남자 관객도, 20대 커플뿐 아니라 30대 외톨이 관객도 즐겁게 하는 로맨틱코미디들이 런던으로부터 극장가로 날아들었다.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그리고 새로 개봉하는 <어바웃 어 보이>까지. 영국의 인디 프로덕션에서 유니버설이 5년간 7억5천만달러를 투자하는 파트너로 성장한 영화사 워킹 타이틀이 휴 그랜트, 리처드 커티스, 헬렌 필딩, 닉 혼비 등의 영국 대중문화의 스타들과 함께 만들어낸 이 로맨틱코미디들은 여자와 남자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덜어낸 자리에, 안 풀리는 캐리어와 각기 제몫의 실패담을 안고 술자리에 모여드는 친구들, 중산층 독신자들의 매너 연구를 넣고 마천루 대신 런던의 아름다운 공원과 건물을 새로운 스펙터클로 담아 관객을 유혹하는 데 성공했다. 대단한 미학적 성취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뻔함’의 가짓수를 늘려서 장르영화 팬을 즐겁게 한 영화 네편과 그들을 통해 자기 브랜드의 하위 장르를 창조하며 성장한 워킹 타이틀, 네편의 로맨스와 하나의 영화사 이야기를 엿본다.

휴 그랜트의 새 영화 <어바웃 어 보이>는, 혹시나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방법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기대어 사는 38살의 바람둥이 백수 윌이 우연히 만난 소년 마커스의 손에 이끌려 진짜배기 사랑과 책임의 세계로 통하는 문턱을 넘는 이야기다. 그것은 오래 전 <키드>의 찰리 채플린이, <퍼펙트 월드>의 케빈 코스트너가 밟은 코스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바웃 어 보이>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첫머리와 똑같이 혼자인 윌과 마주친다. 그럴 리가!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으면 애인 레이첼이 프레임 속으로 들어와 윌의 뺨에 입을 맞춘 뒤 지나간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다시 카메라가 시야를 넓히면 마커스와 레이첼의 아들, 윌의 옛 동료와 마커스의 엄마가 모여 있는 윌의 집안이 보인다. 윌은 레이첼에게 청혼할 거냐는 소년의 질문에 확답하지 않는다. 윌은 여전히 섬이다. 달라진 것은 이제 그의 곁에 다정한 이웃 섬이 군도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어바웃 어 보이>에 나오는 독신부모 클럽의 슬로건 “혼자 또 같이!”(Alone Together!)는 이 영화의 철학이기도 한 셈이다. 로맨스가 있는 코미디 <어바웃 어 보이>가 종국에 윌에게 선사하는 트로피는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가 아니라 대체가족이다.

1994년의 슬리퍼 히트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에서 주인공 남녀의 전통적인 키스와 더불어 영화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대사는 혼인서약의 변으로 익숙한 “그렇게 하겠어요”(Yes, I do)다. 그러나 여자의 그 대답에 앞선 남자의 질문은 “나랑 결혼해 줄래요?”가 아니라 “나와 평생 결혼하지 않(고 곁에 머무르)는 데에 동의해줄 수 있어요?”다. 달착지근한 장르의 공식에 좀더 충실한 <노팅 힐>(1999)과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를 포함해 <네번의 결혼식…>부터 <어바웃 어 보이>에 이르는 네편의 영국산 로맨틱코미디는 모두 어느 교차로로 인생을 몰고가야 좋을지 난감해하는 늦된 30대의 사랑 이야기다. 이들은 남녀가 라이벌로 만나 언쟁의 불꽃 속에 사랑을 확인하는 경로에 집중하는 스크루볼코미디 계보의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와 사뭇 다르다. 영화 속의 30대 남녀에게는 연애말고도 잡다한 골칫거리가 있다. 그들은 때로 자기가 어떻게 해볼 도리없는 문제는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으며 하나의 사랑이 지나가면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다음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푸념을 늘어놓고 홀로 잠든다. 그러나 이 덜 섹시한 30대 남녀들의 연애담은 이상하게도 번번이 전세계 로맨틱코미디 팬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그 이유는 아마 러브스토리에 대한 갈증으로 멜로드라마의 티켓을 사고 스릴에 대한 갈증으로 스릴러를 찾으면서도, 좋은 로맨스영화는 사랑 이외의 다른 것을, 좋은 호러는 공포 이외의 무엇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발견하는 우리의 경험과 통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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