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처럼 엉뚱한 한편 전경만큼 진지한 박성수 감독은 다수의 베스트극장을 거쳐 <햇빛속으로> <맛있는 청혼> 등을 연출했다. 수색의 폐공장터. 복수가 탄 오토바이가 유리창을 향해 날아가는 고난도의 액션신을 찍는 가운데 이루어진 이날 인터뷰는 ‘컷’과 ‘스탠바이’를 신호음 삼아 끊이는 듯 이어졌다.
-처음 아이디어는 감독으로부터 나온 걸로 안다.
=몇 가지 경험과 생각들이 섞여서 나온 거다. 한번은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가 “혼자 있을 땐 웃는 연습을 한다”고 말하는 것을 봤다. 비슷한 때 스물몇살에 루게릭병을 통지받고 환갑이 넘도록 살아 있는 스티븐 호킹이 “시한부 통고를 받고도 그렇게 슬프거나 괴롭지 않았다. 그저 그간 인생을 낭비했다는 후회가 들었다”고 했다. 또 지난 2월에 베니스에 다녀왔는데 그 말로만 듣던 수상도시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여기도 못 보고 죽는 사람들은 참 불행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모든 기억들이 복합된 건지, 미니시리즈를 준비하면서 막연히 ‘시한부 청년’을 떠올렸다. 하지만 흔한 투병 이야기가 아니라 병을 알게 되면서 연애도 하고 직업적인 성취도 이루는 그런 청년을 그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눈이 나쁘다거나, 왼발이 작다거나 하는 수준으로 받아들여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감독과 작가가 한 맥박으로 드라마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작업이 아닌가.
=뻔한 드라마를 찍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작가도 새로워야 한다고 믿었다. 작가 리스트를 보는데 모르는 사람이 인정옥 작가 하나였다. 그냥 몰라서 만났다. 앞서 이야기한 정도만 말해줬는데 인 작가가 대뜸 재밌겠네요, 했다. 숙제가 아니라 재미로 생각해서 좋았다. 이후 써온 시놉시스와 1, 2회 대본을 보면서 시청률은 장담 못하겠지만 좋은 드라마 한편이 나올 것 같았다. 윗선에서는 ‘실패한다’, ‘어렵다’, ‘재미없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몇명의 시청자가 보더라도 그 시청자를 존중하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 시청률 대강 나오고 금방 잊혀지는 드라마라면 왜 꼭 만들어야 하는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내 멋대로 해봤다.
-모든 인물들이 보통의 드라마에서 지켜졌던 캐릭터의 일관성에서 벗어나는듯 보이지만 큰 줄기를 잃지 않는 것 같다.
=방금 전의 사건과 환경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새로운 환경에는 새롭게 반응한다, 는 대원칙을 가지고 디렉팅했다. 사람이란 게 아무리 나쁜 일이 있어도 지나가는 농담에 웃을 수도 있고 아무리 기분좋은 일이 있어도 어떤 일에는 갑자기 화가 날 수도 있지 않나? 그게 진짜다.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 스스로에게 느꼈던 모습을 드라마에서 발견하길 바랐다.
-빡빡한 일정일 텐데도 세트촬영이 거의 없다. 지하철, 버스가 유독 많이 나오고
=돈없는 아이들이니까 공공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건 당연하고, 젊은 아이들이 계속해서 움직이는 드라마니까 그들을 쫓아가는 생생한 느낌이 들길 바랐다. 물론 동시녹음이나 통제문제가 어려운 편인데 활기찬 느낌이 들어서 좋다. 미래의 집을 중심으로 대부분 홍익대에서 촬영되었는데,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이 아이들이 이 근처에서 연애하고 있구나, 하는 리얼리티가 살았으면 했다.
-복수의 직업이 스턴트맨이다보니 대규모 액션신이 많이 등장한다. 쉽지 않았겠다.
=어릴 때 교회 다니면서 들었던 찬송가 중에 ‘부담이 변하여 능력이 되네’라는 구절이 있었다. 꽤 좋아했던 말인데 스턴트신들은 그런 도전과 재미를 준다. 처음엔 부담스러웠는데 찍다보니 꽤 잘 찍게 되는 것 같다. (웃음) 정두홍 무술감독의 공이 크다. 그 어떤 때보다 많이 신뢰하고 조언을 구한다.
-복수아버지의 자살은 의외였다.
=대본 나오기 일주일 전쯤 ‘복수아버지는 죽는 게 좋겠다’는 데 동의했다. 아들은 죽고 노인은 남는, 쓸쓸한 느낌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자살은 그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종영하는 한 형태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였으면 했다. 생사관에 대한 작가와 연출의 의도가 같았기 때문일 거다.
-복수의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 고통과 눈물만이 남았나.
=전혀 반대다. 오히려 유쾌하게 갈 거다. 복수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더이상 잃을 것도 나쁠 것도 없이, 홀가분해지는 느낌일 것이다. 현실 속의 판타지라고 봐도 좋을 신들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