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패배자,그런데 세상은 우리 삶을 혁명이라 하네
그래 죽여주지. 드라마는 그렇게 시작한다. 소매치기 전과 2범, 세상의 떨거지 고복수는 감방생활을 끝내고 나오자 뇌종양임을 선고받는다. 넌 패배자야, 죽어. 세상은 고복수에게 너무도 당연한 듯 죽음을 예고한다. 그리고 죽어가는 남자에게 새 연인을 선사하고, 오랜 연인을 배신하라 부추기며, 결국 아비를 죽음으로 내몬다. 비정한 드라마다. 설정은 눈씻고 찾아봐도 어느 하나 새로울 것이 없다. 불치병, 복잡한 가정환경, 장애를 극복하는 사랑, 삼각관계 애정구도 등 대중드라마라면 응당 지녀야 할 ‘미덕’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시청자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으로 쾌락을 삼는다.
방영 첫주부터 밝혀진 복수의 죽음은 드라마 전체를 무겁게 짓누를 거라 예상하지만 사실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늘 이런 식이다. 잔뜩 긴장하고 들어야 할 사랑고백이나, 불치병 선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어버리고 만다. 복수 역시 세상에 흔한 방식으로 ‘복수’하지 않는다. 자신을 내팽개친 음험한 세상을 향한 ‘복수’ 따위엔 관심이 없다. 머리채 쥐어잡고 싸워야 할 라이벌 여자 사이에 우정이 싹트고, 지탄받아 마땅한 양다리 남자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양부모 엄연히 살아 있는 전경의 집안이 ‘문제집안’이고 누가 봐도 결손가정인 복수의 집안이 ‘화목가정’이다. 전과자인 복수를 “에이! 전과자”라고 부르는 양찬석의 행동도, 보통 꽃미남 주인공들에 비해 못생긴 양동근을 ‘감자’나 ‘못생긴 놈’으로 지칭하는 것도, ‘은근히 느끼하다’라고 속으로만 생각해왔던 이세창에게 “딱 보면 느끼하게 생겼다”라는 대사를 일부러 집어넣는 것도 다 배신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들을 통해 숨어 있던 것, 드러내기 꺼려했던 것이 사실 그리 심각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청춘, 과도기가 아니다
<네 멋대로 해라>의 바퀴를 움직이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다. 이 드라마 속 인간들은 여러 요소들이 찰흙처럼 뭉쳐져 성분검사를 해보기 전엔 좀처럼 행동을 예상할 수 없다. 하여 이들의 행위엔 쓰레기가 차 있을지언정 상투성이 숨어 있을 공간이 없다. 그저 상황에 가장 정직하게 반응할 뿐이다. 눈물이 나면 울고, 질투나면 질투하고, 화나면 때리고, 억울하면 맞받아친다. 그간 대부분의 드라마에서의 등장인물들이 ‘캐릭터의 일관성’이라는 강박 속에 단선적이고 일차원적인 선택을 해왔던 데 비해 <네 멋대로 해라>의 캐릭터들은 ‘case by case’로 행동한다. 오랫동안 지켜보지 않으면 뭐 저런 아이들이 있나, 오해하기도 쉽다. 그들은 누구와 대화하느냐,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기 일쑤다. 미래 앞에서는 ‘세상없이 답답하게 구는’ 전경이지만 형사 정달이 앞에서는 이빨을 꽉 깨문 채 거친말을 내뱉는다. 미래는 “내가 생각해도 멋진 언니”이기 때문이고 “정달이는 나쁜놈”이기 때문이다. 명료하고 단순하다. 이처럼 <네 멋대로 해라>의 다중적인 캐릭터 설정은 주인공 또래 새로운 세대의 특성들과 맞물려 묘한 시너지를 일으킨다.
전경과 복수, 미래로 대표되는 이십대 청춘. 그들은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되어갈는지에 관심이 없다. 주류와 비주류, 그 어느 쪽에도 포섭되지 않는 새로운 인간형. 이들에게 청년기는 기성과 권력에 순응하기 전 단계인 과도기가 아니다. 또한 기성에 대립하는 반항기도 아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도 전혀 없다. “세상을 바꾸는 건… 죽는 것보다 어려운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 먹을 밥값과 차비, 때론 마음맞는 이성친구 하나만 있으면 족하다. “내가 한 기자님 애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내가 지금 음악을 하는 사람이란 건 알아요”라는 전경의 대사처럼 세상 어느 하나 명쾌한 건 없지만 ‘지금·내가·무엇을·원하고·있나’를 알고, 그것을 유일한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건 다른 누구도 대신 알아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로 인한 모든 문제도 기꺼이 스스로 짊어지려 한다. 그들은 순정, 가족, 집단이데올로기 등에 의한 사회적 동기나 사명감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의리나 사랑으로, 혹은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움직인다. 부모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늦은 나이에 “이혼하겠다”고 집안을 풍비박산 만드는 못난 부모를 뒤로 하고 자기 방에 드러누워 새우깡을 씹으며 “아… 이 집 진짜 싫다”며 중얼거린다고 불효의 극치도 아니고, 복수가 아버지에게 상추쌈을 싸먹이고, 엄마의 맨발을 주무르는 것도 효도에 대한 강박이나 예의범절 때문이 아니다. 그저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내가 아니면 쓰러질 것 같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일 뿐이다. 이렇듯 이들은 사회적 동기는 없지만 너무나도 분명한 내면적인 동기에 몸을 싣는다.
또한 중얼중얼 내뱉는 이들의 헛소리는 느슨해질 법한 드라마의 템포를 잡는 한편 모든 인물을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애인을 뺏긴 억울한 기분에서도, 못 만나서 괴로운 심정에서도, 애인이 죽을병에 걸렸다는 심각한 소식에도 이들을 유머를 잃지 않는다. 심지어 뇌종양을 판명받는 순간에도, “제가 잔머리를 많이 쓰거든요. 그래서 종양이 된 거 아니에요?”라고 묻질 않나, 출소한 아들을 뒤로 두고 떠나는 아버지에게 우산이 촌스럽다고 불러세우는 아들의 헛소리나 “남이사”라고 심드렁하게 돌아서는 아버지의 대꾸나 결코 어느 누구도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작가의 얄미운 장치들이다.
어떤 사랑, 악녀도 왕자도 없는
결국 삶의 태도는 사랑법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때때로 내가 살자고 남의 가슴에 대못 박는 짓을 서슴없이 해버리기도 한다. “마음이 잔인해지지 않고 어떻게 한 사람만 좋아합니까? 착한 마음으로는 세상 전부를 좋아하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만 좋아하려면 착해선 안 돼요. 잔인하게 한 사람만 좋아할래요. 나중에… 후회해도 좋을 사람.” 이처럼 정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이들은 흔히 ‘어른들의 것’으로 치부되던 심각한 사랑과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 전경과 복수의 연애장면은 유치원생보다 더 유치하지만 그 안에는 대부분 한때 자신의 모습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성이 숨어 있다. “나 몰래 만나다 걸리면 죽어!” 하는 미래의 협박은 “부숴버릴 거야”라는 분노보다 더욱 간절하다. 이 사랑의 게임에 악녀도 천사도 왕자도 없다.
<네 멋대로 해라>는 결국 매우 이상한 드라마이며, 매우 ‘제 멋대로’ 만든 드라마다. 대사만 보면 현실적이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현실에서 없는 ‘슈퍼울트라 쿨’한 인간들의 판타지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네 멋’이 마음에 든다. 혁명을 꿈꾸지 않는 루저들에 의해 일어난 아이로니컬한 혁명이 반가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