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나운규의 <아리랑> 리메이크한 이두용 감독 [4]
2002-09-06
글 : 김소희 (전 씨네21 편집장)
노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비디오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영화 가운데 <장남>은 확연하게 계열을 달리한다. 도시에 막 형성되기 시작한 신흥 중산층을 배경으로, <오발탄>의 장엄한 숭고미와는 전혀 다른 장남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대청 마루에서 낮잠 든 노부모를 어루만지는 장남의 얼굴과 손길, 짜증과 연민을 교대로 불러일으키는 부모에 대한 감정이 절제된 감정과 숏으로 표현되는 대목은 가슴을 움직인다.

이두용 감독이 흔히 통용되는 문예영화라는 표현 대신 토속물 혹은 토속사극이라고 명명하는 데에는 중요한 논점이 내포되어 있다. 문학적 완성도가 높은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것을 지칭하는 문예영화는, 검열로 인해 작가적 자의식이 침해당한 감독들과 이들에게 무언가 탈출구를 열어주어야만 했던 권력 당국의 의도가 결합되어 실제 이상으로 과장된 예술적 평판을 얻곤 했다. 1970년대에는 홍보 전단에도 유명 원작자의 이름을 대문짝만하게 새겨넣을 정도였다.

이두용 감독의 경우 61편의 영화를 만드는 동안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한 것은 거의 드물다. “영화가 소설 뒤처리 하는 것도 아닌데 문학성을 기준으로 좋은 영화라는 평판을 얻는 것이 싫다”고 했다. 영화는 영화적 표현력으로 사고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확고하다. <피막>(1980)이 일부 평론가들로부터 “무슨 사극이 저러냐”는 혹평을 받았을 때에도 그는 “화면에 소설 쓸 것도 아닌데 기구절창한 이야기나 역사를 재현하는 데에는 큰 뜻이 없다. 문학적이라고 해서 지적인 것이 아니라 영상 자체가 지적이어야 한다”고 답했다. 그가 이만희 감독을 유난히 좋아하는 이유도 “영상의 멋을 알고 계산이 철두철미한, 영화감독 같은 감독”이기 때문이며 같은 이유로 임권택 감독의 대표작을 <만다라>로 꼽았다. 이것은 현재의 비평담론과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리메이크 <아리랑>, 잊혀진 아버지를 거부하며

그는 요즘 <아리랑> 촬영을 마쳤다. 1926년작 나운규의 <아리랑>을 리메이크하는 것인데, 제작사(시오리엔터테인먼트, 대표 이철민)가 짜준 스탭과 연기자를 데리고 연출 의뢰를 받은 지 2주 만에 촬영지인 전남 낙안으로 내려가 찍었고 지금 한창 편집중이다. “원작의 복원에 뜻이 없고 이두용식 <아리랑>임”을 강조했다.

영화는 초당 18프레임의 흑백에 피사체의 형상도 거칠게 한 무성영화 느낌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한정된 공간에 변사와 오케스트라를 동반한 특수한 형태의 개봉이 될 것이라고 하니 제작 동기가 무엇이든 우리는 흥미로운 실험 하나를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무엇도 아닌, 그리고 어떠한 수식어도 없이 “영화감독”이라고 말했다. 영화에 대한 깨우침이 언제쯤 있었던 것 같으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바로 지금”이라고 답했다. 나이 들면 연출력도 노쇠해진다는 판단에 불만이라는 그는 이런 말을 마지막으로 쏟아냈다. “이응로 화백은 손이 떨려도 획을 긋는다. 젊을 때의 팔팔한 기력과 총기, 나이 들어서 표현하는 원숙미 가운데 어떤 것이 예술의 핵심에 가까운가. 나는 지금에야 어린 시절 담장 뛰어넘어가서 보던 꿈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단 한 가지도 놓치지 않은 채.” <애>(1999)를 만든 지 3년 만에 <아리랑>이라는 흑백무성영화를 예고하며 우리 앞에 돌아온 이두용은 정확히 40년 동안 영화인으로 살았다. 한달에 영화 한편씩 찍어내던 제작환경, 검열의 족쇄, 흥행 압력이라는 삼각 파도 속에서 때로는 날렵한 흥행감독으로, 때로는 숏마다 자신의 서명을 새겨넣으려는 영상주의자로 살아온 이두용 감독이 한국영화사 안에서 어떤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인지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 세대에 대한 부인과 반항을 지상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와중에서, 영화계 후배들에게 쉽게 잊혀진 또 한명의 아버지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 그의 목소리는 매우 강렬했다.

그리고 못다한 이야기들"내가 샛서방이래, 하하"

샛서방의 업보 96년에는 너무 힘들었어. 마누라도 암으로 세상을 떴고, 극장사업도 정리해야 했고. 사별한 마누라 생각하면 영화감독이란 건 못할 짓 같아, 가족한테는. 일년 중 반을 여기저기 쏘다니잖아. 어쩌다 집에 가끔 들어와도 곧 나가니까. 언젠가 마누라가 그러는 거야. 반상회에 나갔는데 혹시 삐쩍 마르고 눈은 퀭하고 머리는 장발인 사람이 샛서방 아니냐는 황당한 질문을 받았다는 거야. 들락거리는 시간이 오밤중 아니면 새벽이니까 공연한 눈총을 받을 만하지. 내가 데뷔한 해에 태어난 아들 놈은 8살 때까지 날 보면 아빠라고 못 불렀을 정도야. 그 녀석이 고2 때인가. 홈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뭘 찍다 내가 집에 들어가니까 갑자기 감추는 거야. 그래서 마누라한테 물어봤지. 저 녀석 뭐하냐고. 그랬더니 영화를 배우겠다는 거야. 듣자마자 바로 수속밟아 유학보냈어. 거기서 컴퓨터공학 공부 열심히 하는 줄만 알았지. 그런데 귀국할 때 보니까 이놈 책이 17박스인가 그랬는데 7박스만 제 전공책이고 나머지는 영화 관련 원서야. 그때부터 말리진 못하겠더라고.

다혈질잘 모르겠는데 다들 다혈질이라고들 하니까. 성격 탓이겠지. 조감독 시절에도 한 작품 끝내고 가만 기다리질 못했어. 그래서 조감독이 정해져 있어도 무조건 가서 ‘야, 내가 조감독 보수 다 너 줄 테니까 너는 그냥 쉬어라’ 그랬다고. 현장에서도 쭉 몰고가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야. 전에 액션영화 하면 특수기술자들 그러니까 스턴트맨이나 무술감독이 따로 있나. 다 내가 시범 보여줬지. 아, 태권도 초단밖에 안 되는데. (웃음) 연기도 그랬어. 우스꽝스러웠겠지. 나야 그렇게 보여주면서 매번 하는 말이 그랬다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 그런데 나중에 연기하는 거 보면 나랑 똑같이 그대로 해. 속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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