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나운규의 <아리랑> 리메이크한 이두용 감독 [2]
2002-09-06
글 : 이영진
사진 : 이혜정
노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두용이 영화계에 입문한 뒤 감독으로 데뷔하기까지는 영화사적으로 극적인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그가 스무살 남짓한 나이로 영화계에 들어왔을 1960년대 초반은 4·19 분위기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한국영화사 전체를 일별해볼 때 이 시기의 영화들에는 매우 특별한 분위기가 있다. 필자는 이를 4·19시대의 영화들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한국영화사에서 하나의 특수한 단락을 이루는 4·19시대는 좁게 말하면 1960년 4월19일부터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 5월16일까지의 1년2개월에 불과하지만, 넓게 말하면 해방 직후부터 군사정권 초기까지 지속된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시민 민주주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영화계에서는 김기영, 신상옥, 유현목 등 오늘날 재발견의 붐을 이루는 거장들이 거의 동시에 활동을 시작했고, 한 발짝쯤 뒤에 등장한 이만희를 비롯한 풍부한 인적 자원이 포진해 있었다. 사회는 비록 가난하고 해결하기 버거운 문제들로 넘쳐났지만 작가들이 오히려 그 문제들을 끌어안고 영화에 담을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 정신과 활력이 살아 숨쉬었다. 게다가 관객의 폭넓은 애호에 따른 제작시스템의 활성화, 이것이 황금기인 4·19시대의 비결이자 실상이었다. 한국영화사가인 이영일은 “건강한 시민의식 또는 개인의식 속의 충족감은 이 시대 전체의 자의식이었다”고 결론짓는다.

4·19가 물러간 자리에 신파가 들어서고

4·19시대의 분위기가 후퇴하면서 패배주의적이고 마조히스틱한 신파영화가 대거 되돌아왔다. 이두용 감독의 회고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자신이 데뷔할 무렵이 되자 앞 시대에 허용되었던 사회성 드라마를 비롯해서 영화의 소재가 될 만한 것들에 광범위한 제약이 가해졌다고 했다. “영화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던 그 역시 검찰청에 불려가는 일을 피할 수 없었는데 이 시절의 분위기를 그는 “흉악하다”고 표현했다. “액션영화나 전쟁영화에서 적은 견고하고 강할수록 좋다는 격언이 있다. 강하고 멋있는 적을 자유분방한 약자들이 때려부수어야만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영화든 사회생활이든 기본 문법이다. 우리에게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멜로드라마, 액션, 토속물 내지 사극, 그리고 중간중간 내놓은 사회성 드라마”로 구분했다. 그가 가장 선호하는 장르는 미스터리였지만 한국에서 흥행이 어려운 주변부 장르이자 아직도 미개척 장르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한 내 책임도 있겠죠”라고 덧붙였다. 그는 평론가들이 “주책없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장르를 오간 것에 대해서는 거리낌이 없었다. “나의 직업은 영화감독이다. 어떤 장르든 내 문법 즉 이두용적 표현이 만들어지면 된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피막> <물레야 물레야> 같은 진지한 영화에서 <돌아이> 같은 코믹액션, <청송 가는 길> 같은 우중충한 사회성 영화를 오갈 때면 늘 새로 데뷔하는 듯한 신선한 흥분을 느꼈다”고 했다.

그의 필모그래피가 보여주는 궤적은 전체적으로 그 시대의 요구와 한계선을 따라 흐르면서 경계를 넘실거린다. 신파극이 대유행할 당시 신파성을 뺀 멜로드라마를 지향하며 초기의 필모그래피를 채웠다. 그는 이어서 자신의 관심분야인 미스터리에 도전하지만 곧 이 장르의 한계를 인식한다. 그러고나서 “배우 스케줄 따라 2주 만에 영화 찍고 열흘 만에 후반작업하는 것은 재정 궁핍 때문이다. 외국에 팔릴 만한 영화를 만들자. 그 장르가 무엇이냐. 동양철학이 담긴 특수한 액션영화, 곧 무술영화다”라는 결론을 얻고 합동영화사의 곽정환 사장과 의기투합했다. 그는 “유엔에 가입한 나라 숫자만도 얼마냐. 한 나라에서 1만달러씩만 받아도 한국영화 제작 현실을 뒤바꿀 수 있다”는 논리정연한(?) 계산법을 가지고 <용호대련>(1974)을 필두로 몇년간 “미친 듯이” 액션영화에 매달렸다. 전국적으로 선발한 무술특기자 100여명을 훈련시켜 활용한 탓에 “이두용 사단은 합이 300단”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지금도 액션영화를 좋아하고 한국이 부지런히 해야 할 영화라고 본다”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지만 유엔 가입국가 모두가 1만달러씩 돈을 내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특히 “배우도 아닌 것들 데리고 연탄 찍듯 하느냐”는 비아냥이나 ‘으악새 배우’니 2류 감독이니 하는 평판은 결정적으로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 다음은 토속영화에 미스터리 터치를 가미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초분>(1977), <물도리동>(1979), <피막>(1980)이 그 시절의 소산이다. 간간이 상업적인 목적이 뚜렷한 영화나 화려한 대작을 섞어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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