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 한국적 에로티시즘의 최고 명작”
“계보 안에 졸작 천지”라는 그는 “애정이 가는 영화”라는 표현을 빌려 대표작들을 꼽았다. 멜로드라마로는 <어느 부부>(1971), 샤머니즘을 소재로 구시대에서 신시대로의 변화를 미스터리 작법으로 다룬 <초분>, 토속적인 영화로는 <피막>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0) <뽕>(1985), 코믹영화로는 다시 <뽕>과 <돌아이>(1985), 사회성 드라마로는 <청송 가는 길>(1990) <장남>(1984) <최후의 증인>(1980) <경찰관>(1978)을 꼽았다. 특히 <경찰관>에 대해 “혹자는 어용영화라고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고 덧붙였다.
<피막>은 전통 시대의 성적 억압과 계급 억압이라는 이슈를 무속의 전복성을 빌려 표현했다. 미스터리라는 비주류 장르의 기법을 빌려다 80년대 주류영화를 미학적 숙련공의 솜씨로 다듬은 이 작품은 그 시기 대표적인 여배우 가운데 한명인 유지인으로부터 차가운 카리스마를 끌어냈다. <물레야 물레야>는 가난 때문에 팔려온 서민계급의 젊은 여성이 양반가문의 죽은 영혼과 결혼함으로써 지배계급의 제도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가 된다는 익숙한 문제를 담고 있지만, 이두용식 영상 언어의 결정체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움직임을 충분하게 소화하기 어려운 촬영 장비상의 난점을 다양한 미장센으로 극복하려는 시도가 우선 눈에 띈다. 실내외 공간을 이용해서 다양한 프레임 짜기, 조명을 통해 대각선을 비롯한 프레임 분할하기, 밋밋한 배경 안에 감정이 풍부한 배우의 얼굴 클로즈업, 극단적인 조명의 대조를 통해 만들어낸 실루엣 화면, 매혹과 비정함이 교차하는 공간 포착, 미장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어둠의 효과, 거친 입자의 모노 톤 플래시백 등이 자연과 인공적인 건축, 전체와 부분, 사건과 감정, 공간과 인물 사이의 균형을 시도하며 현란하게 동원된다. 이 작품은 오늘날 평론계와 국제영화계의 강력한 이슈 중 하나인 이른바 ‘한국적 영상미’의 기원과 계보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뽕>은 발표 당시 “한국적 에로티시즘의 최대 명작”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남성 관객 사이에 호평을 받았는데 그 평판은 아직도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곰살맞게 묘사되는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이미숙, 이대근의 생생한 서민적 캐릭터와 과장된 해학이 역설적으로 절제된 인물의 동선과 결합되어 있다. 일상생활의 순간과 동작으로부터 발굴해낸 에로틱한 느낌들로 인해 에로티시즘은 침대나 물레방앗간에만 있다고 생각해온 기존 영화들의 허를 유쾌하게 찌른다. 가난과 여성의 성 매매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다룬 원작의 줄거리와 함께 뻔뻔하고 천연스러운 생명력에 대한 측은지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에로티시즘의 품격에 한몫을 담당했다.
그만의 아리랑을 부른다
<아리랑> 편집실을 가다
“누님, 여기 엔드 한번 이어봐요.” “이거 살리게?” 필동의 주택가에 자리잡은 이경자 편집실. 다음날 공덕동으로 편집실을 옮기는 대형이사가 예정되어 있는데도 감독과 이경자 편집기사는 야심한 시각까지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지금도 하루에 담배 네갑을 피우는 탓에 기관지가 상한 이두용 감독. 그의 기침소리 ‘경고’가 아니라면 편집실에서 오가는 두런두런한 목소리는 불청객에겐 영락없는 자장가다. 데뷔작부터 거의 모든 작품의 편집을 맡아온 탓에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안다. 굳이 묻거나 답하는 일이 드물 수밖에 없다. “다른 장르도 물론이지만 누님 솜씨는 액션영화에서 제일 빛나. 다른 사람들보다 과감하거든.” 그러니 <아리랑>을 찍은 뒤, 그가 주저없이 이경자 ‘누님’을 찾은 것은 별난 일이 아니다.
낯선 경험도 없지 않다. 컴퓨터를 이용한 아비드 편집이 이두용 감독에겐 처음. “모니터로 금방 확인할 수 있으니까 좋다”면서도 “필름을 손으로 안 주무르니까 뭔가 빠진 것 같다”고 허전해한다. 지금 현재 편집 중인 것은 18프레임으로 찍은 버전. “보지 못했지만 옛날 영화들이 다 그렇잖아. 동작들이 빠르고 튀게 보였을 거라고. 지금 보면 코믹하게 보이지. 1920년대를 살았던 보통 사람들의 ‘애환’을 다루지만, 그렇다고 침울하게 그리고 싶지는 않았거든. 18프레임으로 찍어서 경쾌한 느낌이 나기도 해.” 흑백으로 뽑아올린 화면에는 일부 효과음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운드를 넣지 않을 예정. 오케스트라 공연과 함께 변사가 등장해서 당시 상영 형태를 재현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대사 또한 굳이 이해가 쉽지 않은 대목에만 자막으로 넣어 전달한다. 변사로는 최주봉, 윤문식 등 악극에 능한 배우들이 맡는다.
구체적인 일정이 잡힌 것은 아니지만, 극장 개봉을 위해 정상적인 24프레임으로도 찍은 버전 또한 있다. 그 탓에 편집실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기도 한다. 18프레임으로 찍은 장면이 사라져서다. 대개 24프레임으로 찍은 장면들 속에 덧붙여져 있음을 뒤늦게 확인하고서야 한숨을 돌린다. 이경자씨의 남편이자 촬영감독이었던 이성우씨는 “이 감독의 다른 영화에 비해서 컷 수가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서 이상하다 했는데, 이번에는 아예 두 작품을 찍어서 한꺼번에 들고 왔구먼” 하고 놀려댄다. 이번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극중 영진 역을 비롯해서 모두가 신인. 이 감독은 “출연경력이 전무한데다 연기를 일일이 다듬어줄 시간이 없어 힘들었다”지만, 잠깐 들여다본 장면에서는 신선함이 돋보이는 마스크들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자신의 영화 <물레야 물레야>를 기획하기도 했던 김갑의씨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시작됐다. “전부터 호흡도 잘 맞고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추천한 것이라 의뢰에 응했지. 이전 선배 감독들이 리메이크한 적이 있지만, 나 역시 내 식으로 <아리랑>을 보여주고 싶었어. 무성영화 스타일이 투박하지만 오히려 더 모던해 보일 수 있거든. 그렇게 연출하긴 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네.” 한편 끝내고 나면 “반년은 쉬어야 한다”면서도 “2주만 지나면 몸이 근질근질해져서 죽겠다”는 그가 3년 동안 웅크려 있다가 내놓는 <아리랑>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