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나운규의 <아리랑> 리메이크한 이두용 감독 [1]
2002-09-06
글 : 이영진
사진 : 이혜정
노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요즘 이두용(60) 감독은 연일 밤을 지새우고 있다. 나운규의 <아리랑>을 리메이크한 신작 촬영을 마치고 편집작업에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밥먹듯이 밤을 꼬박 새우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여름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나면 기진할 정도다. 그래도 그는 무리를 한다. 그건, 3년 전 영화 <애>를 찍고서 ‘선전비용’이 없어 개봉하지 못했던 때의 참담함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음일까, 아니면 자신만의 스타일이 눅진히 묻어나는 이두용의 <아리랑>을 하루빨리 보여주겠다는 의지일까.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충무로의 고지와 나락을 오가면서도 끊임없이 장르영화를 만들어왔던 한 백전노장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편집자

이두용 감독을 만나는 날 비가 많이 내렸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앞서 도착해보니 감독은 이미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유리창 너머로 내리는 장대비에 시선을 꽂고 있었다. 40년간 카메라가 있는 현장을 누볐음에도 증명사진 찍히는 것조차 어색하다는 그의 몸체가, 튀고 싶어하지 않는 성격을 반영하는 듯한 카키색 의상에 싸여 있었다. 회색 톤의 배경에 놓여 있는 카키색 피사체,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서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언뜻언뜻 강하게 돌변하던 흑갈색 눈동자. 이두용 감독과의 첫 대면이 남겨준 인상이었다. 이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두용 감독의 몇몇 영화에 대한 느낌과도 비슷했다.

한국의 월트 디즈니를 꿈꾸던 할리우드 키드

말문을 열기 위한 어색함은 어린 시절 이야기로부터 깨어졌다. 자신에게는 각별했을 할리우드 키드로서의 생애를 그는 간결하게 요약했다. 그의 고향은 서울 청파동이고 어려서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으며, 훗날 영화 찍겠다고 집에서 돈을 갖다쓴 적도 있으니 비교적 여유있는 집안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영화계 입문 2년 만인 스물네살에 ‘감독이 별것 아니네’ 싶어서 스스로 제작, 감독에 나선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결국 완성되지 않았다. 그 이후 치열한 조감독 생활을 거쳤으니 이 작품의 실패는 감독 이두용이 탄생하는 밑거름이 된 셈이었다).

이두용 감독 대표작 연표

1969 <잃어버린 면사포>1971 <날벼락> <댁의 아빠도 이렇습니까> 1971 <어느 부부>1972 <아낌없이 바치리> <체포령> 1971 <가지마오> 1973 <홍의 장군>1974 <용호대련> <분노의 왼발> 1971 <배신자> <돌아온 외다리>1975 <사생결단> <흑야> <무장해제>1976 <아메리카 방문객> <뉴욕 44번가> 1977 <초분>1978 <생사의 고백> <경찰관> 1979 <오빠가 있다> <선배> <물도리동> 1971 <지옥의 49일> 1980 <귀화산장> <피막> <최후의 증인> 1971 <우산속의 세여자> 1981 <해결사>1982 <욕망의 늪>1983 <물레야 물레야> <이상한 관계> 1984 <낮과 밤> 1985 <장남> <돌아이> <뽕>1986 <내시> 1987 <고속도로> 1988 <뽕2> <업> 1990 <청송으로 가는 길> <흑설>1992 <뽕3> 1994 <연애는 프로, 결혼은 아마추어> 1995 <위대한 헌터 G.J>

극장에 맹렬히 드나들던 이두용 학생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영화들은 <원탁의 기사> <쿼바디스> <십계> <애수>, 그리고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나오는 <녹원의 천사> 같은 것들이었다. 한국영화와 한국 감독들이 눈에 들어오고 애정을 갖게 된 것은 영화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한국영화의 현주소를 알고 난 다음이라고 했다.

한국의 월트 디즈니가 되겠다며 영화계에 ‘늘어붙은’ 장남에게 어머니는 6년 동안 말을 붙이지 않았다. 영화 일을 한다는 것이 운명에 대한 각별한 도전이 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모자간 화해의 전령사는 이모였다. 종로 네거리에서 밤 촬영을 할 때 통제구역 안으로 앰뷸런스가 한대 들어왔다. 일에 몰두한 그가 빨리 비키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픈 아이를 안은 채 차에 타고 있던 이모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두용이가 빤히 쳐다보고도 아는 척을 안 하더라”고 하소연을 한 뒤 “동지섣달 오밤중에 화신 네거리에서 거지꼴을 하고 있는 게 불쌍합디다”라고 덧붙였다. 그뒤로 어머니는 “하는 일이 뭐냐”고 관심을 표하기 시작했고, 돌아가시기 전에는 “담뱃값이나 버냐?”고 묻기도 했다.

데뷔작 <잃어버린 면사포>

사실 담뱃값이나마 만져본 것은 영화계에 들어온 지 7∼8년 지나서의 일이었지만, 그 시기에 이두용은 영화수업에 용맹정진했다. 조감독 시절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는 에피소드 하나. 그의 데뷔작은 <잃어버린 면사포>(1969)인데 신성일과 문희가 주연했다. 조감독 시절 자신의 공부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작품과 감독을 찾아다닐 정도로 배움에 열중하던 그에게, 제작 스케줄을 부지하세월로 만드는 톱스타들은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이 와중에 배우 엄앵란의 매니저와 불화가 생겼다. 정작 감독이 되자니 톱스타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는 당시 스케줄 얻어내기가 하늘의 별따기인데다 엄앵란의 남편이기도 한 신성일을 쳐다보며 시무룩해 있었다. 그러나 신성일은 “그 사람 영화라면 내가 해야지”라고 서슴없이 승낙을 했다. <잃어버린 면사포>는 당시 대유행이던 신파조의 기구한 이야기를 갖고 있지만 신파성을 어느 정도 벗어난 작품으로 평가받으면서 흥행도 어지간히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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