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가족>
독립영화감독 김동원이 자신의 가족을 찍은 다큐. 게임 ‘철권’과 방귀뀌기가 있는 한 이 가족에 스트레스 걱정은 없어 보인다. ‘철권’ 게임을 하는 사이사이, 가족들은 카메라 앞에서 서로에 대한 불만을 말하기를 가장인 감독에게 요구받는데, 아내가 자신에게 “별 불만이 없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감독은 화면에다가 크게 ‘흐뭇’이라는 자막을 삽입하기도 한다. 카메라가 어떻게 대화의 도구일 수 있는지, 소탈하고 간명하게 보여주는 따스한 작품이다.
<방송사 비정규직 노동조합>
머리에 빨간 염색으로 ‘파견철폐’라는 글자를 새긴 방송사 비정규직 노동조합 위원장 주봉희씨의 인터뷰를 주축으로 한 단편 다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더욱 고통받게 하는 파견법 철폐 투쟁을 그린다. 거의 주봉희씨 한 사람의 인터뷰로만 이루어져 있음에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상암동 월드컵>
상암동에서 보증금 없는 월세집에 살던 한 가족이 서울시의 월드컵경기장 개발 때문에 집을 철거당한 뒤 벌인 투쟁의 기록. 추운 겨울 여러 날을 시청사 문 앞에 비닐을 덮고 잠을 자며 싸웠건만 아내가 병원에 들어가고, 딸은 구속되고, 이들의 고통은 더욱 커진다. 지독히 우울한 투쟁의 결말인데,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이 다큐는 현실을 더욱 예리하게 고발한다.
<장애도 멸시도 없는 세상에서>
장애인 이동권과 도시빈민 생존권 보장을 위해 싸우다 자살을 택한 고 최옥란씨가 투쟁하던 생전의 모습들을 돌아보는 작품. 정부에서 노점상을 그만두는 조건으로 지급하는 월 26만원의 지원으로는 도저히 생활할 수 없다며 보건복지부 장관 집 앞에 현금 26만원을 반납하기도 했던 그녀의 발언은, 이 작품을 통해 여전히 멈추지 않는 듯하다.
<벌거숭이들>
오랜 동거 끝에 결혼하려 하는 두 연극인 남녀가 친구들을 모아 누드화보 촬영을 하며 찍은 다큐. 남자의 옥탑방 옥상에서, 철거예정인 서교아파트에서, 그리고 예술종합학교에서 계속된 이들의 누드촬영은, 처음에는 ‘서로 보이지 않게 묘하게 위치를 정하는’ 어색함에서 시작해 자유로운 분위기로, 그리고 끝내는 여자의 울음으로 끝을 맺는다. 제목도 그렇지만, 어딘가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들>을 연상시키는, 특이한 체험의 솔직한 기록.
하르트무트 비톰스키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다큐멘터리 작가. 독일 태생인 그는 베를린의 프리대학에서 독일 언어학과 연극을 전공했고, 대학 극단의 배우 겸 연출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작가이자 에세이스트로도 알려졌으며, 10년 이상 독일의 영화지 <필름크리틱>의 공동발행인 및 편집자를 지낸 뒤 93년부터 미국 칼아츠의 영화&비디오학과에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40편 이상의 영화, 특히 다큐멘터리의 실험으로 이름난 감독. 이번 회고전에서 상영될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아우토반>과 <폭스바겐의 제국>, 최근작인 <B-52> 3편. 85년부터 86년에 걸쳐 만든 <아우토반>은, 1933년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시행된 대형 도로공사의 산물인 ‘아우토반’의 건설과정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주는 작품. 아우토반 건설은 당시 현대화의 상징과 같았지만, 길게는 하루 12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노동자들이 땀을 흘리고도 자동차가 보편화되지 않은데다 전쟁 때문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당대 선전용 영화에서 따온 건설현장과 결국 잔재로 남은 아우토반의 현재를 병치하는 <아우토반>은 나치의 현대화된 독일이 허울 좋은 선전에 불과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88년작 <폭스바겐의 제국>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독일의 ‘국민차’ 폴크스바겐 역시 나치의 근대화 프로젝트 중 하나. 대량생산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된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지금껏 꾸준히 생산돼온 폴크스바겐의 역사를 통해 독일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본다. 흡사 폐건물처럼 음산한 과거 공장의 영상이 포로들의 강제 노역으로 운영되던 전쟁 시기를 반영한다면, 새로 찍은 이미지들은 현재의 노동환경과 함께 자본주의의 변천사를 암시하는 식이다. 미국의 힘을 상징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폭격기 B-52의 디자인부터 건조, 해체까지를 다룬 2001년작 <B-52>도 비슷한 형식. 미국 자본주의 발달사에 대한 관찰과 비판적인 해석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