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초점 부문
테크놀로지와 자본주의의 발달, 정치권력과 이데올로기 등 변화하는 사회적 풍경화 속 개인의 일상에 대한 성찰을 담은 해외 다큐멘터리 6편. `일상의 정치학`을 테마로 전쟁, 과학과 물질 문명의 이기, 빈곤 등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사회의 모순과 이에 대한 크고 작은 투쟁 같은 기록들을 보여준다.
<전쟁과 평화> Jang Aur Aman(War and Peace)
비폭력 투쟁의 지도자였던 마하트마 간디의 장례식 영상으로 문을 여는 <전쟁과 평화>는, 핵민족주의와 전쟁의 폭력성에 대한 엄중한 통찰의 영화다. 98년 인도 집권당은 국가의 안위와 번영을 위해 핵무기의 힘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앞세워 핵실험을 진행한다. 종교적 차이와 영토분쟁으로 오랜 적인 파키스탄도 질세라 핵실험에 나선다. 일부 젊은 층은 이를 지지하지만, 실험의 무서운 후유증을 겪은 인도의 케톨라이 주민들을 비롯해 평화를 바라는 이들도 다수. 인도 평화사절단을 따라 파키스탄에 간 감독은,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환대를 받으며 그들 역시 마찬가지임을 새삼 깨닫는다. 인도의 마을을 돌며 평화행진을 벌이는 이들의 고단한 걸음부터 파키스탄의 아이들, 일본 히로시마의 피폭자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정권의 권력유지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날선 비판의식을 보여주며 진심으로 평화와 공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수작.
<푸른색 비닐> Blue Vinyl
주디스 헬펀드는 부모가 집의 외벽을 푸른 비닐로 바꾸자 비닐의 유독성 조사에 나선다. 어머니가 임신 중에 유독물질에 노출된 탓에 어려서 암에 걸렸던 그는 유독물질에 대한 경각심이 남다르다. 루이지애나의 비닐 공장부터 유럽 최대의 공장이 있는 베니스까지, 카메라를 들고 각지를 누비는 헬펀드. 비닐 산업관계자들은 위험할 것 없다며 싸고 유용하다는 장점을 강조하지만, 환경 및 생태학자, 비닐 소재 연구원 등 관련 전문가들을 만날수록 비닐의 유해성은 명백해진다. 공장 부근의 환경오염은 물론, 생산공정에서 암을 유발하는 유독물질이 발생된다는 연구결과, 실제 암으로 사망한 노동자 가족들의 사연까지 알면 알수록 태산. 자칫 복잡해질 설명에는 애니메이션을 동원해가면서, 노동자들의 질병과의 연관성을 부인하는 기업들을 향한 항변, 비닐의 대안을 함께 고민하는 작은 실천부터 시작하는 이들의 반격이 유쾌하다.
<국경 저 편에서> De L’Autre Cote(From the Other Side)
“미국에서 살고 싶어요?” “그랬었죠. 형이 떠나기 전까지는.” 미국으로 가기 위해 떠난 형 일행이 도중 사막에서 길을 잃고 거의 전몰하다시피 했다는 청년에게 고정된 카메라. 국경을 넘고자 했던 아들 일가를 잃었다며 목이 메이는 할아버지, 역시 월경을 시도하다 붙잡혀 소년원을 전전한 소년의 사연을 차례로 들려주는 <국경 저 편에서>는 극심한 빈곤 속에 살아가는 멕시코 국경지대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곳 사람들에게 국경 저편의 미국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듯한 희망의 땅. 하지만 국경을 넘었어도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불법이민자 생활도 고달프긴 마찬가지다. 그리 높지 않은 담벽을 사이에 두고, 황량한 불모지 같은 멕시코 마을의 이미지와 차로 붐비는 거리 및 풍요로운 들이 펼쳐진 미국쪽 풍경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음악과 카메라의 움직임을 절제한 사실주의적인 접근법의 진솔한 힘이 새삼 느껴지는 작품.
<SOS 테헤란> SOS Tehran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사회적인 혼란과 빈곤을 겪고 있는 이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인 다큐멘터리. 카메라는 빈민구호기관과 전화상담소, 심리치료 모임 등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들을 부지런히 누비며 특히 여성들의 현실에 주목한다. 남성 중심의 이슬람사회, 더구나 “인구의 90%가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불우한” 현재의 이란에서 여성의 생존은 험난하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생계수단으로 재봉틀이라도 마련할 지원금을 얻고자 구호기관의 기나긴 대기줄에 선 여성, 익명의 전화로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호소하는 여성, 서로 존중해주지 못하는 결혼과 성의 문제에 대해 진솔한 토론을 벌이는 부부들까지 현지의 육성을 통해 테헤란의 오늘에 대한 관찰을 보여준다.
<니키타 명화극장> Nikita Kino
스탈린이 실각하고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집권한 1960년 이후, 러시아인들의 삶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니키타 명화극장>은 흐루시초프 정권이 서방세계의 방문을 허용하면서 소련의 친척을 찾아간 오스트로프스키 가족의 사적인 여행담, 선전용 다큐멘터리와 영화 등 각종 영상물에 기록된 소련의 이미지들의 콜라주를 통해 ‘니키타 시대’의 일상을 보여준다. 공식적인 영상자료에서 따온 소련의 이미지는 스푸트니크 발사와 현대적인 아파트 같은 풍요로운 진보의 모습, 혹은 혁명의 유산에 대한 자부심을 전시하지만, 다섯 가구가 각각 방 하나씩에 살면서 부엌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아파트처럼 “외부와 결코 같지 않은 내부”를 지닌 사회의 모순이 역동적인 교차편집과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드러난다.
<낙원을 찾아서> Vamos A La Playa(Searching for Paradise)
시원하게 펼쳐진 에메랄드빛 바다, 야자수 그늘이 드리워진 모래사장, 그리고 비키니 차림의 미녀들. 언제부턴가 ‘낙원’의 이미지는 그림엽서 같은 아열대의 해변으로 묘사되고 있다. <낙원을 찾아서>는 18세기의 주요 휴양지였다는 북해 연안부터 화가 고갱의 그림으로 유명한 타히티, 카리브해와 일본의 인공 해변 ‘오션 돔’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부상한 관광산업에 의해 재구성된 낙원의 개념과 이미지에 대한 탐색. 낙원의 이미지를 담은 각종 영상의 감각적인 편집과 해변가에 아무렇게나 놓인 TV 속 화면에 등장하는 두 사회학자의 해석을 통해 현대사회의 낙원에 대한 판타지를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