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광주에 온 세 감독,삼색 데뷔기 [4] - 만다 구니토시
2002-11-09
글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늦게,천천히!그래도 먹고살 만은 하니까

만다 구니코시(46)는 데뷔 경로가 앞의 둘과 달랐다. 리쿄대 법학부 시절부터 전공과 무관하게 영화에 빠져버린 뒤, 영화평론과 강의의 길로 나섰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도레미파 소녀 피가 끓는다>, 나가사키 슈니치의 <사국>(死國)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지만 정작 자신은 데뷔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40대 중반이 돼, 아오야마 신지와 가와세 나오미 등 30명 가까운 감독을 발굴해낸 프로듀서 센토 다케노리의 권유로 <언러브드>를 찍었다. 이 영화는 2001년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받았음에도 해외수출이 잘 안 됐다. 평단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제작자들의 입질없이 두 번째 영화가 부진한, 잘 안 풀리는 경우다.

-데뷔가 늦은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너무 게을러서이다. 사실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언젠가 내게 장편영화를 찍을 기회가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를 찾아가고 돈을 모으고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센토 다케노리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리쿄대 영화서클 8년 후배인)아오야마 신지 감독이 95년께 센토가 프로듀서를 맡은 영화의 조감독을 하면서 내게 센토를 소개시켜 줬다. 센토는 내가 학교 때 만든 단편을 본 것 같았다. 이듬해에 센토가 부추겨서 단편을 하나 만들었다. 수년이 지나 센토가 장편 하나 만들어보자고 했다. 센토는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시나리오에 대해 정확하게 얘기하지만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아무 관여를 안 한다. 편집 때 의견을 코멘트하는 정도다. 그런 프로듀서는 드물다. 센토가 아니면 칸에 가기도 힘들었을 거다.

-<언러브드>의 흥행은.

=지난 5월 도쿄의 유로스페이스 극장에서 단관 개봉해 5천명 들었다. 지방에서도 몇곳 상영하고 있는데 다 합하면 1만명 정도가 이 영화를 본 것 같다. 그래도 예산이 5천만엔밖에 안 돼서 적자는 아니었다. 나도 대중에게 먹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러나 그걸 만들어서 잃는 것도 있다. 그 밸런스를 어떻게 맞출지 구체적인 기준은 없지만, 1만명 정도가 내 영화를 본다면 마음에 든다. 생활은 좀 어렵지만 그렇게 지낼 환경은 된다. 관객이 100만명이라면 그 수가 어떤 의미인지를 모르겠다. (유럽에 수출이 안 된 이유를 묻자) 나도 잘 모르겠다.

-두 번째 영화는.

=빨리 영화 찍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러나 만다 영화는 관객이 안 드는 영화 아니냐, 그런 말이 제작자와 프로듀서 사이에 돌면서 다음 작품이 늦어지고 있다. 아직 구체적인 것은 없지만, 앞으로 시나리오를 써서 센토에게 보여주고 제작 의향을 물어볼 생각이다.

만다 구니토시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리쿄대 1년 후배다. 학교 때부터 단짝이었고, 8mm영화를 함께 찍기도 했다. 또 아오야마 신지, 시요타 아키히코 감독의 같은 학교 8년 선배다. 만다는 이들과 함께 2년제 영화미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언러브드>를 보고 뭐라고 하던가.

=말로는 걸작이라고 하는데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언러브드>의 주제가 구로사와에게는 별로 흥미가 없을 거다. 그는 사랑에 대해 전혀 흥미를 안 가지고 있다. 결혼해도 애를 낳지 말자고 구로사와가 말한 적이 있는데, 내가 아이를 낳아서인지 구로사와와의 사이가 좀 뜸해진 것 같다.

-영화평론도 하는 입장에서 모델로 삼는 감독이 있다면.

=<언러브드> 만들 때는 마쓰무라 야쓰조를 염두에 뒀고, 항상 마음에 두는 감독은 오즈 야스지로이다. (오즈는 1년에 한편씩 만들지 않았냐고 묻자) 나도 그러고는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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