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광주에 온 세 감독,삼색 데뷔기 [2] - 데이비드 고든 그린
2002-11-09
글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영화부터 만들고 보자

데이비드 고든 그린은 아직까지 몸이 가볍다. 비싸게 굴지 않는다. 광주국제영화제쪽으로부터 한국에 와달라는 요청을 받은 바로 다음날 가겠다는 대답을 보냈다. 광주 체류 중에도 인터뷰, 대담, 파티 등의 행사가 10∼20분씩 늦어져도 군말없이 앉아 있는다. 27살에 연출작이 한편밖에 없는 신인 감독으로서 당연한 태도라고 여겼다. 그러나 인터뷰를 마친 뒤,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165cm 남짓한 자그마한 체구의 이 젊은 청년은 1∼2년 뒤면 인터뷰하자고 명함도 내밀기 힘든, 할리우드의 거물 감독이 돼 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돈을 모아 만든 첫 영화가 호평을 받아, 두 번째 영화가 발표되기도 전에 미라맥스 영화사와 세 번째 영화 계약을 맺었다. 스티븐 소더버그, 드루 배리모어 등이 제작자로 참여하는 큰 예산의 야심찬 프로젝트다. 이게 성공하면 그는 스티븐 소더보그, 쿠엔틴 타란티노의 뒤를 이어, 미국 인디 출신의 드문 스타감독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노스캐롤라이나 예술학교를 졸업한 98년부터 현재까지 4년간 그의 행보는 성공사례로 꼽기엔 너무 드문 행운의 연속이었다.

-첫 작품 <조지 워싱턴>을 어떻게 만들었나.

=졸업 전부터 1년 반 동안 7개 직업을 전전하면서 3만5천달러를 모았다. 카지노의 잡역부, 정신병원 청소부, 의료기구 회사의 주사기 포장작업, 마케팅 회사…. 문손잡이 만드는 회사에도 다녔는데 거기선 산을 다루는 일을 했기 때문에 보수가 높았다. 또 정자은행에 정자도 팔았다. 여자친구 아버지에게서 1천달러를 꾼 것 합해서 4만달러로 촬영을 시작했고, 편집한 것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투자를 받았다. 그래서 후반작업 때 6만달러를 더 얻어 전체 제작비는 10만달러 정도 들었다. (기존의 제사를 찾아가보지는 않았느냐고 묻자) 연줄이 전혀 없어서 시도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자기 돈으로 만들면서 시네마스코프로 찍은 건 특이하다.

=장비 대여회사에 가장 좋은 걸 빌려달라고 했더니, 시네마스코프용 장비를 빌려줬다. 또 내 첫 영화를 시네마스코프로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흥행은.

→ 원래 저예산이어서 돈을 벌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미국 내 80개 도시에서 개봉해 나 개인을 빼고는 영화에 참여한 모두에게 적절한 보수를 줄 만큼의 수익은 올렸다. 물론 비평가들의 찬사에 비하면 흥행은 훨씬 저조한 편이다. 그러나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에 배급이 이뤄지고 텔레비전 방영권도 팔아서 아직도 돈이 들어오고 있다.

<조지 워싱턴>이 비평가들의 눈에 띈 건 2000년 베를린영화제에서였다. 이 영화제 영포럼 부문 상영을 계기로, 그해 토론토, 토리노, 스톡홀름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미국비평가협회가 주는 신인 감독상을 받아 같은 해 말 미국 개봉의 길이 열렸다. 곧이어 제작자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소니픽처가 두 번째 영화의 돈을 대겠다고 나서더니, 스티븐 소더버그가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왔다.

-베를린영화제에는 어떻게 가게 됐나.

=처음 선댄스영화제에 필름을 보냈다가 탈락했다. 그런데 상영작 선정위원 중 한명이 영화가 무척 좋다며 베를린영화제쪽에 추천을 해줬다. 그뒤 베를린에서 연락이 왔다.

-두 번째 영화는.

=소니픽처에서 다음 아이템이 있냐고 먼저 연락이 왔다. 그래서 내가 쓴 시나리오에, <조지 워싱턴>의 스탭과 배우 그대로 참여하는 <올 더 리얼 걸스>를, 제작비 200만달러를 미리 받고 찍었다. 소니픽처는 일년에 몇편의 저예산 영화를 제작해왔다. 그래도 통상 완성된 영화의 배급권을 사는데 이번에는 먼저 돈을 줬다. 미친 게 아닌가 싶다.(웃음) 촬영은 다 끝났고 내년 2월 개봉예정이다.

-첫 번째 영화 10만달러에서 두 번째 영화 200만달러, 세 번째 영화는 미라맥스 제작인 만큼 예산이 더 클 것 같다.

=64년에 쓰여졌는데, 저자가 자살한 뒤인 88년에 발표된 소설이 있다. 존 케네디 툴의 <바보 동맹>(A Confederacy of Dunces)인데, 이걸 영화로 만들려고 스캇 크레이머라는 프로듀서가 22년 동안 매달렸다. 거기에 스티븐 소더버그, 드루 배리모어가 제작자로 가세해 나를 찾아왔다. 원래는 소더버그에게 감독을 맡기려 했으나 그가 거절하면서 나를 떠올린 것 같았다. 이제까지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디렉터-라이터’만 생각했는데, 믿을 만한 책이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미라맥스에 가지고 가 계약을 맺었다. 시나리오는 완성됐고, 캐스팅과 예산을 짜고 있는 중이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나름의 인지도가 있는 한 배우를 내가 제안했더니, 그 배우보다 비싼 스타로 가야 한다고 하더라. 아무래도 예산이 커질 것 같다. 나는 프로젝트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데.

데이비드 고든 그린은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의대 교수이고 세 누나가 모두 교직에 종사한다. “아카데믹한” 집안 분위기에 어긋나게, 막내인 그만 “학교 수업 빼먹고 여행 다니며” 자유분방하게 자랐다.

-엄청난 행운아다.

=내가 보고 싶어서 만든 걸,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행운이지만 세 번째 영화는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전 같으면 내 취향대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세 번째 것은 제재가 많지 않겠는가.

-미국 독립영화에서 모처럼만에 큰 기회를 맞은 감독인 것 같다. 그런데 쿠엔틴 타란티노 같은 이는 너무 빨리 성공해서 스트레스가 많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 영화가 절대 성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을 거다. 나는 느슨할 수 있는 게 좋다. 다음에는 제작을 할 수도 있고 음악을 맡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감독 영화의 촬영을 할 수도 있다. 테렌스 맬릭을 존경하는데, 그는 조류관찰자이면서 야구도 잘하고 철학교수이다. 영화는 세편밖에 안 찍었지만 모두 좋지 않은가. 그렇게 쿨한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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