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고든 그린은 아직까지 몸이 가볍다. 비싸게 굴지 않는다. 광주국제영화제쪽으로부터 한국에 와달라는 요청을 받은 바로 다음날 가겠다는 대답을 보냈다. 광주 체류 중에도 인터뷰, 대담, 파티 등의 행사가 10∼20분씩 늦어져도 군말없이 앉아 있는다. 27살에 연출작이 한편밖에 없는 신인 감독으로서 당연한 태도라고 여겼다. 그러나 인터뷰를 마친 뒤,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165cm 남짓한 자그마한 체구의 이 젊은 청년은 1∼2년 뒤면 인터뷰하자고 명함도 내밀기 힘든, 할리우드의 거물 감독이 돼 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돈을 모아 만든 첫 영화가 호평을 받아, 두 번째 영화가 발표되기도 전에 미라맥스 영화사와 세 번째 영화 계약을 맺었다. 스티븐 소더버그, 드루 배리모어 등이 제작자로 참여하는 큰 예산의 야심찬 프로젝트다. 이게 성공하면 그는 스티븐 소더보그, 쿠엔틴 타란티노의 뒤를 이어, 미국 인디 출신의 드문 스타감독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노스캐롤라이나 예술학교를 졸업한 98년부터 현재까지 4년간 그의 행보는 성공사례로 꼽기엔 너무 드문 행운의 연속이었다.
-첫 작품 <조지 워싱턴>을 어떻게 만들었나.
=졸업 전부터 1년 반 동안 7개 직업을 전전하면서 3만5천달러를 모았다. 카지노의 잡역부, 정신병원 청소부, 의료기구 회사의 주사기 포장작업, 마케팅 회사…. 문손잡이 만드는 회사에도 다녔는데 거기선 산을 다루는 일을 했기 때문에 보수가 높았다. 또 정자은행에 정자도 팔았다. 여자친구 아버지에게서 1천달러를 꾼 것 합해서 4만달러로 촬영을 시작했고, 편집한 것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투자를 받았다. 그래서 후반작업 때 6만달러를 더 얻어 전체 제작비는 10만달러 정도 들었다. (기존의 제사를 찾아가보지는 않았느냐고 묻자) 연줄이 전혀 없어서 시도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자기 돈으로 만들면서 시네마스코프로 찍은 건 특이하다.
=장비 대여회사에 가장 좋은 걸 빌려달라고 했더니, 시네마스코프용 장비를 빌려줬다. 또 내 첫 영화를 시네마스코프로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흥행은.
→ 원래 저예산이어서 돈을 벌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미국 내 80개 도시에서 개봉해 나 개인을 빼고는 영화에 참여한 모두에게 적절한 보수를 줄 만큼의 수익은 올렸다. 물론 비평가들의 찬사에 비하면 흥행은 훨씬 저조한 편이다. 그러나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에 배급이 이뤄지고 텔레비전 방영권도 팔아서 아직도 돈이 들어오고 있다.
<조지 워싱턴>이 비평가들의 눈에 띈 건 2000년 베를린영화제에서였다. 이 영화제 영포럼 부문 상영을 계기로, 그해 토론토, 토리노, 스톡홀름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미국비평가협회가 주는 신인 감독상을 받아 같은 해 말 미국 개봉의 길이 열렸다. 곧이어 제작자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소니픽처가 두 번째 영화의 돈을 대겠다고 나서더니, 스티븐 소더버그가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왔다.
-베를린영화제에는 어떻게 가게 됐나.
=처음 선댄스영화제에 필름을 보냈다가 탈락했다. 그런데 상영작 선정위원 중 한명이 영화가 무척 좋다며 베를린영화제쪽에 추천을 해줬다. 그뒤 베를린에서 연락이 왔다.
-두 번째 영화는.
=소니픽처에서 다음 아이템이 있냐고 먼저 연락이 왔다. 그래서 내가 쓴 시나리오에, <조지 워싱턴>의 스탭과 배우 그대로 참여하는 <올 더 리얼 걸스>를, 제작비 200만달러를 미리 받고 찍었다. 소니픽처는 일년에 몇편의 저예산 영화를 제작해왔다. 그래도 통상 완성된 영화의 배급권을 사는데 이번에는 먼저 돈을 줬다. 미친 게 아닌가 싶다.(웃음) 촬영은 다 끝났고 내년 2월 개봉예정이다.
-첫 번째 영화 10만달러에서 두 번째 영화 200만달러, 세 번째 영화는 미라맥스 제작인 만큼 예산이 더 클 것 같다.
=64년에 쓰여졌는데, 저자가 자살한 뒤인 88년에 발표된 소설이 있다. 존 케네디 툴의 <바보 동맹>(A Confederacy of Dunces)인데, 이걸 영화로 만들려고 스캇 크레이머라는 프로듀서가 22년 동안 매달렸다. 거기에 스티븐 소더버그, 드루 배리모어가 제작자로 가세해 나를 찾아왔다. 원래는 소더버그에게 감독을 맡기려 했으나 그가 거절하면서 나를 떠올린 것 같았다. 이제까지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디렉터-라이터’만 생각했는데, 믿을 만한 책이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미라맥스에 가지고 가 계약을 맺었다. 시나리오는 완성됐고, 캐스팅과 예산을 짜고 있는 중이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나름의 인지도가 있는 한 배우를 내가 제안했더니, 그 배우보다 비싼 스타로 가야 한다고 하더라. 아무래도 예산이 커질 것 같다. 나는 프로젝트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데.
데이비드 고든 그린은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의대 교수이고 세 누나가 모두 교직에 종사한다. “아카데믹한” 집안 분위기에 어긋나게, 막내인 그만 “학교 수업 빼먹고 여행 다니며” 자유분방하게 자랐다.
-엄청난 행운아다.
=내가 보고 싶어서 만든 걸,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행운이지만 세 번째 영화는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전 같으면 내 취향대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세 번째 것은 제재가 많지 않겠는가.
-미국 독립영화에서 모처럼만에 큰 기회를 맞은 감독인 것 같다. 그런데 쿠엔틴 타란티노 같은 이는 너무 빨리 성공해서 스트레스가 많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 영화가 절대 성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을 거다. 나는 느슨할 수 있는 게 좋다. 다음에는 제작을 할 수도 있고 음악을 맡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감독 영화의 촬영을 할 수도 있다. 테렌스 맬릭을 존경하는데, 그는 조류관찰자이면서 야구도 잘하고 철학교수이다. 영화는 세편밖에 안 찍었지만 모두 좋지 않은가. 그렇게 쿨한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