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길을 열어준 건 마찬가지겠지만, 영화부터 찍고 보자는 데이비드 고든 그린의 방법은 맨땅에 헤딩하기만큼이나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데뷔기는 좀더 신중했고, 프로듀서의 조력도 있었다. 영화전공자가 아닌 그녀는 30대 중반에 데뷔를 마음먹고는, 효율적으로 투자자를 구하기 위해 영화제에 전략적으로 접근했다. 선댄스영화제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 →투자자 확보 →영화 완성 →베를린영화제 알프레드 바우어상 수상 →유럽 수출로 수지를 맞추고 두 번째 영화를 안정적으로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36살보다 젊어 보이는 이 미인 감독은 서툰 영어를 안타까워하면서 자기 뜻이 제대로 전달됐다 싶을 때까지 수차례 말의 방향을 바꿔가며 설명하는 열의를 보였다.
-아르헨티나에 살면서 선댄스영화제 시나리오 공모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대학에서 신문학을 전공하면서 곁눈질처럼 애니메이션을 공부했지만, 실력이 안 됐다. 영화를 시작한 동기는 단편 시나리오가 상을 받으면서였다. 95년에 그걸 영화로 만들어 또 상을 받았다. 그뒤 장편 <늪>의 시나리오를 썼는데, 이걸 본 당시 텔레비전 프로듀서 리타 스탠틱이 선댄스영화제 시나리오 공모에 내보라고 했다. 영어로 번역해야 하고, 우편으로 부쳐야 하고 귀찮아서 말려고 했는데 그가 계속 부추겨 보냈다. 그 시나리오가 당선되니까 돈줄을 찾기 쉬워졌다. 원래 당선되면 일본 와 <브뤼셀TV>가 지역 배급권을 사게 돼 있었고, 이들 외에 이탈리아-스위스 합작인 몬테치네마, 스페인 방송사, 프랑스 정부 지원금 등을 지원받았다. 또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지원금 20만달러를 받았다. 그래서 120만달러로 만들었다. 상업적인 영화가 아닌데도 큰돈을 모아 영화를 만든 건 행운이었다.
-흥행은.
=영화 완성뒤 2001년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과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두곳에서 초청이 왔다. 아무래도 경쟁이 낫겠다 싶었고, 또 칸영화제 전에 개봉을 해야 했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3만명의 관객이 들었다. 이런 성격의 영화치고는 성공인 셈이다. 또 베를린영화제 수상을 계기로 17개국에 수출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보면 본전치기는 했다.
-두 번째 영화는.
=신앙심이 매우 깊은 10대 소녀의 이야기이다. 신이 자기를 여기에 살게 만든 이유가 뭘까 고민하던 소녀가 길거리에서 50대 남자로부터 성희롱을 당한다. 소녀는 ‘아! 신이 나더러 저 남자를 구원하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는 거꾸로 그 남자를 쫓아간다. 제목은 <홀리 걸>로 그동안 수차례의 오디션을 통해 1300명 가운데서 두명의 소녀 배우를 뽑았다. 일종의 블랙코미디인데, 종교와 섹스가 섞이기 때문에 아르헨티나에서 스캔들이 일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화제가 될 테니까 아무래도 흥행도 좀 낫지 않을까. 이미 유럽에서 투자자들을 확보했고, 시나리오도 완성된 상태다. 리타 스탠틱이 프로듀서를 맡았다. 그는 뉴 아르헨티나 무비에 관심을 갖고 TV에서 영화로 뛰어든 뒤 많은 젊은 아르헨티나 감독들을 발굴해내고 있다.
부드럽고 섬약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루크레시아 마르텔은 원칙주의자였다. “보수적이고 인종편견이 심한” 북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보수성뿐 아니라 이 나라가 미국의 식민지에 가깝고, 이 나라 영화가 미국영화에 눌리고 있는 사실을 개탄했다.
-아르헨티나 경제난으로 영화인들도 힘들지 않은가.
=힘들다. 90년대 들어 영화학교가 급증하고 많은 감독 지망생이 나왔지만, 99년 경제난 이후로는 특히 더 국내 영화산업이 그들을 소화해내지 못한다. 나는 운좋게도 경제난이 터지기 전에 <늪>에 착수해 정부지원금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이 경제난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경제난 이전의 90년대 초·중반은 환영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은 가난하고 경제적으로 미국의 식민지인 아르헨티나의 상황이 그대로 까발려지게 됐다. 이런 정체성을 확인하는 건 영화를 만드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거다.
-영화의 내용면에서는 도움이 되더라고 실제로 돈 구하기는 힘들 것 아닌가.
=돈이 없어도 아이디어가 있으면 어떻게든 된다. 그러나 아이디어 없이 돈만 있다면 뭘 하겠는가. 우리가 정말 현명하다면 새로운 계기다. 어떤 삶을 선택할지 생각하게 하는 기회다. 아르헨티나에 대해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